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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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겼군.”
룰렛의 결과를 보고, 나는 선언했다.
“끄아앙으아으아앙!”
그리고 안젤라가 뭔가 굉장히 괴로운 것 같은 신음성을 내지르며 함교 바닥에 나뒹굴었다.
우리는 함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인생게임]을 하고 있었다.
인생게임은 되게 오랜만에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잘 생각해 보니 처음 하는 건가? 지구에선 같이 할 사람이 없었지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잘 기억도 안 나는데 뭐 어때. 내 편한 데로 생각해야지.
“인류종의 인생이란 참 허무하군요.”
이 와중에 악마 여왕 출신 비토리야나는 인생게임을 통해 승패를 초월해 뭔가 이상한 깨달음 같은 걸 얻은 모양이었다.
“인생은 짧기에 반짝이는 거 아니겠어요?”
루시피엘라도 뭔가 이상한 맞장구를 치고 있고 말이다.
“다음! 다음 판 해요!”
악마와 타천사가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에 키르드는 휘말리지 않고 게임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그래도 안젤라와 키르드는 승패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다행이다. 이래야 재밌지.
“그래, 다음 판.”
우리는 다음 판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다음 판, 다다음 판도 진행했다.
“꺄우으앙! 왜, 왜 나만······!”
[공정한 게임] 옵션이 적용된 유물급 [인생게임]에 스킬과 능력치는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는 사람은 계속 이기고 지는 사람은 계속 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진 사람이 누군지는 굳이 거론하지 않겠다.
“안제 누나, 너무 약해······.”
“나라고 약하고 싶어서 약한 게 아니야!”
몇 판 졌다고 애한테 소릴 빽 지르는 모습이 벌써 추해지기 시작한 것 같지만, 난 그냥 못 본 척하기로 했다.
“그럼 인생게임은 여기까지로 하고, 다른 게임 좀 해볼까?”
그리고 물 흐르듯 종목 변경을 제안했다. 그런 내 제안을 받은 건 뜻밖에 비토리야나였다.
“아, 좋네요. 윷놀이 어때요?”
얘가 윷놀이는 어디서 배웠지? 인류연맹의 아이템 설명 같은 거 보면 한국 문화는 인류종의 문화 중에서도 소수파에 속하는 거 같던데. 나는 궁금해졌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저, 있어요! [공평한 게임]이 적용되어 있는 유물 [윷놀이]!!”
안젤라가 이상하게 의욕을 불태우면서 [윷놀이]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아니, 넌 언제 또 그런 걸 사둔 거야? 하지만 묻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바라고 묻는단 말인가?
게임 참가자 모두에게 룰을 이해시키기 위해 연습용 한 판을 진행한 후, 우리는 정식으로 윷놀이를 진행했다.
오, 이거 재밌다. [공정한 게임] 옵션 때문이지 윷이 제멋대로 튄다. 내가 알고 있는 꼼수 몇 개를 써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게임은 꽤 긴장감 있게 돌아갔다.
“아으아앙!”
하지만 이번에도 패배자는 안젤라였다. 아니, 왜? 어째서?
“······테스카 보고 싶다.”
안젤라는 눈을 글썽이며 그런 혼잣말을 뱉었다. 그녀의 결코 길지는 않은 보드 게임 역사에서 테스카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호구 잡은 플레이어였다.
그렇게 이기고 싶나. 그렇다면 한 번쯤 져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말이다. 뭐, 어차피 [공정한 게임] 때문에 일부러 져주지도 못하지만.
“이게 재밌네요. 한 판 더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보기 드물게 루시피엘라가 마음에 든 듯 이렇게 말했다. 뭐, 설마 아무리 안젤라라도 끝까지 지겠어? 하다보면 이기는 판도 생기겠지. 나는 루시피엘라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함의 전진 속도가 느릿했기에,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우리는 다시 윷을 던지기 시작했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전장, 그중에서도 만마전 세력의 후방에 위치한 악마 대왕들의 모함이 위치한 공역이었다.
“······.”
나는 함교 바닥에 시체처럼 축 늘어진 안젤라를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안 좋은 예감이 실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안젤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단 한 판을 이기지 못했다.
이거 진짜 [공정한 게임]이 적용된 유물이 맞나 싶어서 중간에 다른 게임을 해보기도 했지만 새 게임으로도 안젤라는 졌다. 엉망진창으로 졌다. 그야말로 패배의 신화를 쌓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아무튼.”
나는 안젤라로부터 시선을 슥 피하며 손뼉을 짝짝 쳤다.
“게임 끝. 이제 일할 시간이야.”
그런 내 선언에 이상하게 루시피엘라가 세상 끝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보드게임이 재밌었던 걸까.
“알겠습니다, 서방님! 정리하도록 하죠.”
반대로 비토리야나는 의욕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이 악마여왕, 요즘에 들어선 내 말에 대답한 후 신음성을 흘리는 비율이 줄었다. [기아스]의 효력이 약해졌다기보다는 그냥 쾌감의 역치가 높아진 탓이겠지. 맛있는 것도 매일 먹으면 질리니 말이다.
어쨌든 이번 작전에서도 비토리야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줘야 한다. 그런 그녀가 고작 내 말에 대답했다고 앙앙거리고 있는 것보다야 의욕에 차 있는 게 더 낫다. 그 의욕의 목적이 다소 불순한 거야 이제 와서는 신경 쓸 거리도 못 된다.
“그럼 각자 위치로.”
작전 시작이다.
***
악마 대왕 바질루르는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뭔가가 이상했다. 그 처음이 어느 시점이냐면, 갑자기 잘되던 보급이 끊겨 나가던 그 시점을 가리키는 거였다.
악마 대왕들이 만마전을 비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소 악마들끼리의 전쟁이 일어났다. 그거야 늘상 일어나는 일이니 대왕들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보급만 제때 되면 문제 삼을 일이 없었다.
한데 그 보급이 끊겨 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바질루르도 후방을 맡은 악마왕들을 신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악마를 신뢰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모든 약속은 악마를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계약을 통해 맺어졌다. 만마전에 남은 모든 악마 군주를 상대로 맺어진 계약. 후방에 남은 이들은 전방에의 보급에 충실히 임한다. 이 계약을 어길 수 있는 악마 군주는 만마전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급이 끊기다니? 군주가 아닌 일반 악마가 쿠데타에 성공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거야말로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악마가 인간도 아닌데. 아래부터의 혁명 같은 공상이 현실로 일어날 리가 없었다.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어.”
교단 놈들이 만마전을 급습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교단 놈들은 이 전쟁에 별로 의욕적이지 않다. 놈들이 선전포고문의 내용대로 분노에 차 있었더라면 이 전선은 몇 개월 전에 이미 붕괴되어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놈들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너무 침착한 나머지 오히려 이 대치상태를 오래 유지하려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더욱이 이 드넓은 우주에서 만마전의 좌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만마전은 거대한 우주선이나 다름없으며, 위험해지면 언제든 위치를 바꿀 수 있었다.
특히나 교단 상대로는 교란에 힘쓰고 있었다. 애초에 대왕들이 교단에 맞서려 전선에 나온 건 만마전의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최악의 경우, 그러니까 교단에게 만마전의 위치를 들킨 경우였다고 가정해 봐도 그것도 그것대로 이상했다. 그 상황이더라도 마찬가지로 전쟁은 끝나 있어야 했으니까. 더군다나 만마전을 찾아낸 놈들이 그냥 보급만 끊는 데서 만족한다고?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럼 역시 제3의 세력이 끼어든 건가?”
제3의 세력이라고 해도 딱히 떠오르는 세력은 없다.
과거 만마전의 강력한 적수였던 만신전은 교단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해 외부진출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멸망이 목전에 다가왔는데도 내분과 내전에 정신이 없다고 들었다.
도관법인 천계가 끼어들었을 가능성도 매우 희박했다. 놈들에게 만마전의 위치를 추적할 능력이 있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놈들에게도 전쟁을 할 여력 같은 건 없다.
마구니 동맹이나 타천한 이들의 모임은 만마전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져도 중립을 취하는 정도일 테고. 비록 이번 전쟁엔 중립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그건 교단의 분노에 휘말려 피해를 보기 싫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그럼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경우의 수가 없다. 우주의 세력 구도는 이미 굳어진 지 오래다. 지구 인류라는 거대한 변수가 나타났던 수백 년 전이라면 모를까.
“젠장.”
악마 모함의 함교에 마련된 옥좌에 앉아, 바질루르는 나지막하니 욕설을 내뱉었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뭔가가 불길했다. 그리고 악마인, 악마 대왕인 그는 자신의 직감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불안감에는 분명 원인이 존재했다.
“음?”
지나치게 오래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생각을 한 건 이미 일이 일어난 후였다.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건 놀랍게도 각 악마 대왕의 권속들이었다. 물론 대왕급이 뽑아낸 권속들이라 결코 약하지는 않지만, 교단 무력의 중추인 크루세이더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면서 전선을 유지시킬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저 빈약한 방어선을 억지로 뚫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바질루르는 교단의 전쟁수행의지가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권속들도 당연히 자신들이 더 약한 걸 잘 아니 방어선만 굳힌 채 먼저 공격을 하거나 하지는 않아서, 기묘한 대치상황만 요 몇 주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 상황에 변화가 찾아와 있었다.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도 적의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부 권속들이 도망치거나 미쳐서 아군을 물어뜯거나 하는 바람에 구멍이 생기고 있었다.
“아, 뭐야. 저거. 누구네 권속이야?”
바질루르도 악마라, 상황파악보다는 먼저 남 탓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누구 탓인지 알게 되자마자 바질루르는 자연히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냥 일부 권속이 이상행동을 벌인 게 아니라, 특정 악마 대왕의 권속들만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따지기 위해 해당 악마 대왕에게 연락을 해보니 연락 두절 상태였다.
연락만 안 받으면 상관없지만, 아까부터 느껴지는 진한 불안감은 그로 하여금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다른 회선으로 연락해 봐. 우회해서······.”
바질루르는 통신담당 악마 비서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 우회회선으로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연락마를 보내.”
통신이 안 된다면 직접 접촉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판단했기에 바질루르는 직접 연락마로 쓰는 권속 하나를 보냈다. 이러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터다. 적어도 연락마의 목을 잘라 보내든가 하는 반응은 보이겠지. 그런 판단에서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틀렸다.
연락마가 훅 사라졌다. 아무런 신호도 전조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더욱이 상황은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바질루르가 연락을 취하려고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 방어선에 또다시 난동이 일어났다. 조금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지만 다른 악마 대왕의 권속들이······.
악마는 땀을 흘리지 않지만, 바질루르가 만약 인류종이었다면 식은땀을 와락 흘렸을 것이다.
“······뭐야?”
이제는 불안함, 불길함 정도가 아니었다.
위기감이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