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82
“아, 이건 서비스야.”
나는 비토리야나가 놈에게 걸어두었던 [유혹의 권능]도 해제해 놨다. 놈과는 최대한 관계를 끊어놓는 게 좋았다. 또 무슨 계기로 이상한 배신욕을 느껴 우리 일행에 수작을 걸어올지 모르니 말이다.
“오, 아쉽게도. 하지만 감사드리는 게 맞겠죠. 감사드립니다.”
뻔뻔하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놈에게, 나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기아스를 풀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려다 말았다. 이 ‘기대’를 ‘배신’할 수도 있으니, 그냥 입 다무는 게 맞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카자크는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기대’하면서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이것이 카자크 나름의 마지막 인사임을 깨닫고 파안대소했다.
한참을 웃고난 뒤에, 나는 정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널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
카자크가 깨닫기도 전에, 나는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네가 벌인 일도 있으니 그냥 두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걸로 확신했어. 널 이대로 두긴 너무······.”
사용한 스킬은 [신산귀모], 스킬 사용 목적은······.
“찜찜해.”
[기아스]의 해제.“큭, 끄아아악!”
카자크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스킬 해제해준 게 아플 리는 없을 텐데?
“어, 어째서?!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시련인 거냐! 하긴 그렇게 느낄 만도 하겠다. 이 카자크란 남자는 브뤼스만에게서도 배신욕을 강탈당하고 [지배의 권능]에마저 걸렸음에도 놈을 배신하고 내게 기아스를 다시 걸어주길 부탁할 정도로······, 그 뭐냐.
변태였으니까.
날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는 카자크를 보며, 나는 씨익 웃어주었다.
카자크를 [배신해]라는 기아스를 건 채 내버려둔다면, 본인은 행복을 느낄지 몰라도 그 여생이 행복할 리는 없었다. 이번에는 그 배신의 대상이 브뤼스만이어서 잘 풀렸지만, 언제든 그럴 순 없다. 그 끝은 틀림없이 파멸이리라.
그렇다고 그냥 기아스를 푼 채로 내버려 둔다면, 그건 카자크에게 있어서 그보다 큰 불행은 없으리라. 이 남자는 이미 배신욕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배신으로 인해 더 이상 쾌락을 얻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편집증적으로 배신을 계속하다 파멸로 향할 것이다.
행복한 파멸이냐, 불행한 파멸이냐. 이 남자의 미래에는 이 둘 밖에 남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세번째 답이 있었다.
“이러려고.”
[기아스]이렇게 하면 된다.
“[배신하지 마].”
내가 걸어준 새로운 [기아스]의 내용에 한동안 멀거니 있던 카자크는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게 선언했다.
“알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조금 긴장했다. 카자크가 비토리야나처럼 되어버리는 게 아닌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자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좋군요.”
내게도 카자크에게도 다행하게도, 결자해지는 통한 것 같았다.
***
나는 한동안 교단에 머물렀다.
교단의 고위직들에 걸린 [지배의 권능]은 대부분 해제했지만, 교단의 모든 이들이 브뤼스만의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하긴 힘들었다. 물론 교단에도 나름대로의 대책이 있긴 했지만, 기존에 쓰던 방법은 아무래도 신뢰성이 떨어지는 모양인지 내 [신산귀모]에 꽤 의존해 왔다.
그렇다고 나만 믿고 모든 걸 맡긴 건 또 아니지만 말이다. 교단의 인원들도 그들 나름대로 노력했다. 거름망이 하나인 것보다는 둘인 게 더 낫다는 개념이라고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공짜로 봉사한 건 아니다. [신산귀모]로 대상의 스킬을 받아 챙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건마다 일정량의 교단 금화와 기여도를 받았다. 이 교단 금화와 기여도로 교단의 자원이나 아이템 등을 교환해 준다고 하니, 나도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열심히 기여도를 어느 정도 모은 후, 나는 진은제 아이템과 교환하려고 교단 교환소로 갔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교환소 직원은 아저씨였다.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댄디한 중년 아저씨. 물론 여긴 교단인 만큼 교환소 직원도 천사였고, 실제 나이가 어떤지는 모른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그랬다는 소리였다.
“기여도를 보상품과 교환하고 싶어서 왔거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상태창의 교단 기여도 항목을 공개로 돌렸다.
“어디 봅시다······. 흠, 흠. ······어?!”
교환소 직원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뭐가 잘못됐나 싶어서 봤더니, 갑자기 교환소 직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이렇게 물었다.
“이진혁 씨?! 그 이진혁 씨 맞습니까?”
그 이진혁? 그게 무슨 이진혁인데?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이 이진혁인 건 사실이니까. 그러자 아저씨가 카운터에서 튀어나와 내 손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대는 게 아닌가?
“교단의 영웅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인 한 장만 해주실 수 없을까요?”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렇게 요구하는데, 나로서도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사인을 세 장쯤 해주고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은 후 다시 한번 악수를 하고 교환소 직원이 기뻐서 몸부림을 치는 걸 감상한 후에나 나는 교환거래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진혁 씨께선 교단의 영웅이시기 때문에 50% 할인이 적용됩니다! 당연한 일이죠!!”
실컷 하고 싶은 걸 해서 흥분이 가라앉았을 텐데도, 교환소 직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50% 할인? 처음 듣는 이야기다.
“아, 교환소 이용이 처음이셨군요! 그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관공서나 은행에 찾아가셨을 때 안내를 받으실 수 있는 사항이지만, 제가 영웅님께 직접 그 혜택을 설명해드리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놓칠 수 없죠.”
교환소 직원 아저씨는 내 표정을 보고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이진혁 씨의 경우는 최고위 영웅이시기 때문에 우선 말씀드렸다시피 기여도 교환소의 모든 교환거래에 50% 할인 혜택을 받으실 수가 있고요······.”
교환소 직원은 입에서 침까지 튀겨가며 열정적으로 내가 받을 수 있는 혜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요약해 주면 다음과 같았다.
– 교단 기여도교환소 교환 제한 없음, 모든 교환에 할인율 50%
– 교단 공공거래소 고객 등급 및 신용도 최상급 대우, 거래 시 수수료 무료, 거래 가격의 30%를 교단 측에서 부담
– 교단중앙은행에서 엑스트라 골드 등급으로 대우, 100년간 무이자 대출 (교단 금화 백만 개까지). 다른 세계의 금화로 환전 시 수수료 무료
– 교단에서 운영하는 각 세계의 호텔 숙박비 무료
– 교단에서 운영하는 포탈 및 모든 공공 이동 수단 무료 등등······.
열거하다 보니 요약이 안 된다. 아무튼 뭐가 많았다.
인류연맹과 달리 그 혜택이 사회적 보장에 집중되어 있고, 교단에 머무르며 그 혜택을 제대로 뽑아먹으면 되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부럽네요! 물론 이진혁 씨께서 우리 교단을 위해 해주신 일을 생각하자면 이것마저도 부족할 테지만요. 아, 그러고 보니 이 설명을 제게 처음 들으시는 거라면 일단 기여도 교환 거래는 뒤로 미루고 은행에 한번 들러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죠?”
“영웅의 위격을 올릴 때마다 수령하실 수 있는 보상을 은행에서 지급해 주거든요. 관공서에 가셔서 확인해 보셔도 되지만, 관공서에서도 보상 수령은 은행에서 하시라고 안내해 줄 겁니다.”
아니, 혜택뿐만 아니라 일시불 보상도 따로 있었던 거야?
“그 보상이란 게 얼마나 되나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죄송합니다.”
아저씨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은행에 다녀오시죠. 저는 그 동안 준비를 할 테니까요.”
“무슨 준비요?”
“아, 제 딸을 이진혁 씨에게 보여 드리려고요.”
은행에서 보상을 수령한 다음엔 다른 교환소를 찾아봐야겠다. 나는 그렇게 굳게 마음먹었다.
***
교단중앙은행 본점.
“꺄아아아아악!”
여성의 비명 소리가 은행을 쩌렁쩌렁하니 울렸다.
뭐, 위급한 사건이 벌어진 건 아니다. 교환소에서 안내받은 보상을 수령하려 은행에 들렀고, 내 앞의 은행원에게 신분 증명을 위해 상태창을 공개했다.
“이진혁 씨! 교단의 영웅! 진짜 맞아요?!”
교환소 아저씨만 유독 날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은행원도 같은 부류였던 모양이다.
“네, 맞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약간은 쑥스러운 긍정의 대답을 돌려주자, 겉보기엔 얌전해 보였던 은행원 아가씨는 은행 강도처럼 터프하게 창구를 뛰어넘어 왔다. 그리고 이렇게 요구했다.
“포옹해 주세요!”
그다음에는 거래소에서 한 것의 반복이었다. 악수하고 사인하고 사진 찍고 다시 악수하고 또 한 번 포옹해 달라고 해서 포옹해 주고.
그나마 엑스트라 골드 등급이라 따로 마련된 2층의 전용 창구로 안내되어 망정이지, 만약 이 난리를 은행 로비에서 했다간 무슨 곤욕을 치렀을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잘 못 알아보던데.”
길거리 다니면서 악수나 사인, 사진 등을 요청받은 기억은 없는데, 꼭 거래소 직원과 은행원만 이러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이 여자가 웃으면서 이렇게 설명해 줬다.
“외모만 보고 알아볼 수가 없어서 그래요!”
설명을 들었는데 이해가 안 되서 다시 물어봤더니 이런 사정이 있었다.
지금 교단에선 내 얼굴이 유행이라, 내 얼굴로 성형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잔뜩 생겼단다. 그래서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 없이 얼굴만 보곤 내가 진짜 이진혁이라고 확신을 못 한다고.
······스킬 덕에 성형이 쉽고 간단해지다 보니 이런 부작용도 생기는구나. 그러고 보니 교환소 직원도 내 상태창을 보고서야 표정이 바뀌었었지.
아니, 그보다 내 얼굴이 유행이라는 게 무슨 소리야? 내 얼굴 하고 돌아다니는 놈들이 그렇게 많은가? 하고 나중에 거리에 나가보니 진짜 많았다. 인지하기 전엔 몰랐는데. 세상에는 모르는 게 더 나은 사실이 많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뭐, 이건 나중 이야기고.
“이진혁 씨께서는 바로 최고위 영웅이 되셨기 때문에 하위의 보상도 소급해서 수령하실 수 있어요. 그래서 수령하실 수 있는 기여도와 금화는 각각 5,147만 포인트와 5,147만 개네요.”
“네? 헉!”
갑자기 부자가 됐네?
그간 열심히 [신산귀모]를 쓰고 다녔던 게 바보 같아질 정도의 교단 금화와 교단 기여도가 갑자기 생겼다.
참고로 내가 한 번 [신산귀모]를 쓸 때마다 받았던 교단 금화가 천 개, 기여도는 1,000포인트였다. 물론 이것도 충분히 괜찮은 보수였다. 현시점 환율 기준으로 볼 때 교단 금화 백 개로 인류연맹 금화 1,120개를 교환할 수 있으니까.
이제는 거의 의미 없는 비교지만, 지구의 21세기 한국 기준으로 [신산귀모] 한 번 쓸 때마다 1억 원씩 버는 거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그걸 천 번 가까이 했으니, 내가 생각해도 알알이 잘 모았다.
그런데 이번에 받은 보상을 같은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갑자기 5조대의 자산을 지닌 거부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잭 제이콥스, 이 사실을 일부러 내게 알리지 않은 거냐! 이걸 미리 알려줬어도 난 그냥 무료봉사라도 했을 텐데! ······스킬을 얻기 위해서라도!
“조금도 부담스러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진혁 씨가 교단을 위해 해주신 일은 이보다도 더 가치 있으니까요. 새삼스럽게나마 이진혁 씨의 헌신에 교단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은행원은 대단히 사무적으로 그렇게 늘어놓았다. 아마도 영웅 보상 수령을 할 때 하도록 정해진 멘트겠지. 미리 연습한 티가 났다. 문제는 그다음 이어진 말이었다.
“그리고 저랑 결혼해 주세요!”
“아, 저 그런 취향은 없어서요.”
당연하지만 은행원 아가씨도 종족은 천사였다. 내 감정도 신체도 조금도 반응하지 않는 대상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은행원 아가씨는 불쾌해하기는커녕, 영웅에게 차였다고 좋아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진 모르겠지만 기쁘다니 다행이군, 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