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83
모으는 건 어려워도 쓰는 건 금방이다. 이런 말이 있지만 내게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왜냐면 금방 모았으니까. 그러니 내게 적용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간다.
5,000만 개에 달하는 금화를 쉽게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쓰자고 마음먹었더니 금방이었다. 거래소에 나온 스킬들을 싹 쓸어 모아 전설급 미만을 드르륵 갈아버렸더니 벌써 반이 훅 날아갔다.
이걸로도 만족을 못하고 다른 데서 못 사는 교단 한정 특별 등급 스킬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더니 그렇게 많았던 통장의 자릿수가 줄어드는 것도 금방이었다.
기여도 쪽도 마찬가지였다. 전략물자라 기여도로밖에 못 사는 전함의 무장에 손대기 시작했더니 5,000만 정도 훅 날아가는 건 그리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고급품일수록 골동품 느낌이 강했던 인류연맹의 상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최신 기술이 적용된 미사일 연사포나 기관포, 레이저 총 등을 보니 눈이 막 돌아갔다.
여기에 교단 특산물인 진은제 아이템들을 추가로 좀 사 모았더니 그렇게 많았던 기여도가 이렇게도 쉽게 바닥을 보였다.
뭐, 좀 엄살을 피웠지만 내 여생을 교단에서 편하게 보낼 수도 있을 정도의 금화와 기여도는 아직도 충분히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교단 사람들은 내게 잘 대해준다. 괜히 교단의 은인이자 영웅인 게 아니다.
이대로 교단에서 자리를 틀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잠깐일 뿐이었다.
교단 중심부의 최고급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에 마련된 안락소파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편히 산다고 레벨이 오르는 건 아니니까.”
나는 레벨 업을 하고 싶다.
안 그래도 새 히든 직업으로 전직했는데, 레벨 업을 하고 새 스킬을 배우고 수련치를 올리고 그걸 또 실전에서 써보고 그래야지!
그런데 교단은 너무 평화롭다.
아니, 교단의 기존 구성원 입장에서는 매일매일이 대격변인 지금의 상황이 평화롭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내 입장에선 그렇다.
만마전에서의 즐거운 한때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악마를 썰 때마다 오르는 능력치와 신성! 그리고 쏠쏠한 경험치!! 어느새 만마전은 내 깊은 마음속에서 그랑 란츠나 지구보다도 더 그리운 땅이 되었다.
“아, 악마 썰고 싶다.”
교단이 만마전과의 전쟁을 계속한다고는 했지만, 지금 당장 만마전 본진을 칠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만마전의 후방을 완전히 교란시켜 두었음은 아직 크루세이더들을 비롯한 교단 관계자들에겐 비밀이었다. 그러니 교단이 만마전 공략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전력을 구성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더군다나 갓 일어난 혁명으로 인해 교단은 아직 혼란한 채였다. 아무리 조용한 혁명이라도 혼란이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교단의 크루세이더들과 함께 만마전 공략에 나서는 건 바라기 힘들다.
게다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악마를 처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게 많은 내가 교단에 그 과실을 넘겨줄 의리나 의무 따윈 없었다.
“그 전에 내가 먼저 만마전으로 가서 나 혼자 악마 놈들을 털어먹어야지.”
이제는 굳이 내가 직접 나서서 싸울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내 개인적인 욕망과 쾌락을 채우기 위해 그런 계획을 세웠다.
***
“정말 훌륭한 판단이세요!”
우리가 교단에 체재하는 동안에는 줄곧 안젤라의 고유 특성 안에 숨어 있다가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지, 비토리야나는 정말 후련해했다.
“저도 찬성입니다.”
루시피엘라도 한마디 보탰다. 너도 그렇게 답답했어?
“진은제 아이템 착용으로 올리는 신성은 격의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으니까요. 그보다는 직접 악마를 처치하시는 게 격의 상승에는 더 유리할 겁니다.”
아니었다. 루시피엘라는 나 잘되라고, 그리고 내가 잘되면 그 콩고물을 얻어먹으려고 이러는 거였다. 뭐, 비토리야나보다는 건전하다는 점에서 그리 기분 나쁠 건 없었다.
안젤라는 사실 교단의 배신자이자 범죄자 목록에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명예를 회복했고, 압류되었던 집과 재산도 다 되찾았다. 괜히 교단의 비밀요원인 인스펙터가 아닌지라 안젤라는 꽤 좋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안젤라는 그렇게 되찾은 집과 재산을 다 팔고 다시 내 황금 전함에 올라탔다. 그 이유는······, 나겠지. 역시.
안젤라가 내게 품은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는 있었으나, 그 마음을 받아주는 건 무리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피 섞인 가족 같은 느낌의 대상이니까. 그것도 여동생······, 이라기보다는 남동생에 가까운 느낌이다.
남동생이 사귀자고 하면······, 사귀나?
가능······, 하지 않다! 생리적으로 무리!
“안젤라, 너는 교단에 남았어도 상관없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안젤라에게 지속적으로 이런 멘트를 날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선배.”
안젤라도 익숙하게 받아넘겼다. 그럴 만도 했다. 이런 대사를 지속적으로 쳐준 게 슬슬 세 자릿수는 넘어갈 테니까. 처음에는 눈물도 찔끔 흘렸지만 이제 와선 다 옛날 일이다.
“키르드, 너는 교단에 남았어도 상관없었는데.”
그러고선 뻔뻔하게 그런 대사를 키르드에게 칠 정도로 대담해지기까지 했다.
“어, 내가 왜?”
키르드는 정말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그 큰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안젤라는 그런 키르드의 반응에 도리어 놀라서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기만하는 거야?”
“기만이라니?”
“교단에서 네 인기가 대단하잖아.”
그랬다. 키르드는 교단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 계기를 말하자면 좀 길어지는데, 가능한 한 축약하자면······. 인류연맹과의 우호 모드에 들어가면서 교단에선 인류연맹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여러 개 제작했다. 그중 하나에 키르드가 출연한 게 계기가 되었다.
우리 키르드가 좀 귀여운가. 아니, 조금 귀엽지 않다. 굉장히 귀엽다. 나도 처음 얘를 봤을 때 천사인 줄 알았으니까. 물론 키르드의 종족은 천사지만, 그걸 말한 게 아니라 수사적 표현으로 그렇게 보였다는 소리다.
원래도 귀여웠는데, 뷰티 포인트를 벌기 위해서 매력 능력치를 사다 올리고 비토리야나에게서 [그루밍] 스킬을 받은 그의 외견은 내성이 없는 사람이 보면 문자 그대로 ‘찬란하게’ 보일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인류연맹 3대 가문 중 하나인 하워드 가문의 도련님이었다는, 교단의 기준으로는 ‘적국의 귀족’ 같은 느낌의 혈통. 교단에서도 유명한 범죄자였던 로제펠트에게 납치당했다가 나한테 구조되어 내 양자가 되었다는, 살짝 자극적이지만 어쨌건 해피엔딩인 에피소드.
이걸로 끝난 게 아니라, 우리 키르드가 좀 착한가.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그런 인품이 묻어나는 데다 기본적으로 예의도 바르지! 나는 몰랐지만 녀석이 하워드 가문에서 예의 교육을 빡세게 받았는지 기품을 넘어 고귀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에 살짝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 화룡점정이 되었다.
그렇게 키르드는 몇 번 방송을 타지도 않았음에도 교단의 새로운 스타이자 언니들의 우상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교단의 인류연맹에 대한 우호 모드에 키르드의 존재도 꽤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가들이 분석할 만큼 말이다.
그러니 안젤라도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거다.
“너······, 교단에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셀럽이 될 수도 있었잖아. 그런데 굳이 악마들과 싸우러 만마전에 가겠다고?”
“로드가 계신 곳이 내가 있을 곳이야. 그렇죠, 로드?”
귀여운 것이 귀여운 말을 하네? 심지어 처음엔 좀 어른스럽게 발언하다가 내게 되물을 땐 날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이는데 어떻게 안 귀여울 수가 있을까. 그러나 나는 안이하게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 주거나 고개를 끄덕여 주지 않았다.
“아니야.”
“네?”
“네가 있을 곳은 네가 직접 정해야지.”
살짝 상처받은 듯 큰 눈을 끔벅이던 키르드는 뭔가 깨달은 건지 다시 눈을 반짝이며 내게 이렇게 선언했다.
“······제가 있을 곳은 로드가 계신 곳이에요!”
아이고, 귀여운 것. 그 발언이 그냥 도치법만 쓴 것일 뿐이라는 건 이성으론 알고 있지만, 뭐 어떤가. 이렇게 귀여운데. 나는 절로 올라가려는 입 끝을 내리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정했다면야, 어쩔 수 없구나.”
원했던 반응이 아닌지 조금 시무룩해하는 반응의 키르드를 보고, 난 더 못 참고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고 말았다.
내가 이러는 걸 보자마자, 비토리야나가 빽 외쳤다.
“저도 쓰다듬어 주세요, 서방님!”
“안 돼.”
안젤라도 빽 외쳤다.
“저는요, 선배!”
“안 돼.”
너희도 귀엽다면 귀엽지만 그 속에 도사린 깊고 짙은 흑심이 무서워. 안 돼.
나는 재빨리 키르드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비토리야나에게 명령했다.
“자, 목적지는 만마전이다. 전속 전진!”
키르드 녀석도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난 애써 무시했다.
***
브뤼스만 라이언폴드는 생각했다.
왜 자신의 완벽한 계획이 실패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변수.”
완벽한 계획은 항상 변수로 인해 무너진다.
모든 변인은 완전히 통제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통제에서 벗어난 변인이 존재했다.
카자크? 아니다. 놈의 이름은······.
“이진혁.”
브뤼스만 라이언폴드는 자신이 지나치게 오만했음을 뒤늦게 반성했다. 놈을 계획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다. 그냥 처음부터 죽여 버렸어야 하는 것을.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완전히 통제된 안전하고 완벽한 환경에서, 그는 권태로움을 느끼고 말았다.
“나도 아직 인간이로군.”
인간은 의외의 것에서 놀라움을 느낀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특히나 권태 속을 유영할 때 그 놀라움은 곧 즐거움으로 바뀐다.
브뤼스만은 이진혁의 존재를 발견하고 즐거움을 느꼈다.
느끼고 말았다.
그게 실수였음을, 브뤼스만은 지금에야 인정하게 되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것이다.”
브뤼스만은 생각했다.
교단에서 구축해 놨던 그의 지위는 모조리 무너지고, 재산 또한 80% 이상 잃었다. 그것뿐이 아니다. 교단이라는 최강의 세력이 그의 적이 되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브뤼스만 라이언폴드는 끝났다. 그가 브뤼스만인 이상, 이 위기를 돌파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봐도 될 정도로 희박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초심이라는 단어, 싫어하는데 말이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브뤼스만 라이언폴드는 1인용 차원이동 셔틀에서 내렸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겠군.”
셔틀에서 나오자마자 짙은 마기가 브뤼스만의 전신을 감쌌다. 그 마기 속에서, 그는 심호흡을 했다.
“스읍, 하······. 고향에라도 돌아온 기분이야.”
인체에는 물론이고 천사의 몸에도 유해한 마기의 영향은 조금도 받지 않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마계의 지독한 마기가 브뤼스만의 몸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끼에에에에엑!
먼 곳에서부터 뭔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존재의 불길한 외침이 들렸다. 그 외침을 들으며 브뤼스만은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오히려 웃었다.
“빨리도 환영해 주는군.”
브뤼스만의 두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났다.
“역시 만마전은 이래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