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86
악마를 죽인다.
이 선언으로 나는 대량의 혁명력을 벌어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만마전에는 악마들이 널려있으니, 이런 판단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내 이런 예상은 틀려먹었다.
“악마왕을 죽일 때만 들어오는군.”
그것도 그냥 죽이는 걸론 아무 의미가 없고, 진짜로 죽였을 때만 들어온다. 무슨 의미냐면, 일부러 코어를 내버려 두고 부활시켜 버리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더 이상 부활 못하게 완전히 죽여야 혁명력이 보수로 들어오니, 꼼수를 부릴 여지도 없다.
“결국 레콩키스타 때랑 변한 게 없네······.”
당연하지만 악마왕은 혼자 배회하고 다니지 않는다. 자기 마계를 열고 옥좌에 앉아서야 비로소 악마왕이라 자칭할 자격이 생긴다.
이 기준에 따르면 비토리야나도 악마왕이 아닌 셈이 되지만······. 뭐······, 실제로 얘 보면서 이제 악마여왕이니 하는 단어가 안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지.
하긴 쪼그만 임프 같은 거 잡아 터트리면서 혁명력이 쌓일 거라고 진지하게 기대한 적은 없다. 별로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따지면 일반 악마들을 죽여도 혁명력이 들어오기는 한다. 소수점 6~7자리쯤의 수치로 말이다. 그러니까······, 대충 백만 마리에서 천만 마리쯤 죽여야 1 쌓이는 셈이다.
그나마 악마군주, 악마남작이나 악마백작 같은 애들 죽이면 소수점 3~4자리까지도 들어오지만 얘네는 수가 적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뭐, 혁명력의 소모는 1단위로 이뤄질 테니 다 허수다. 의미가 없다는 소리다.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겠군.”
반대로 생각하자. 레콩키스타도 끝났는데 추가로 혁명력을 쌓을 수단이 생긴 게 어딘가? 이걸로 만족하자고. 나는 대충 내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며 악마들을 죽였다.
뭐, 혁명력이 전부인 게 아니니까. 악마를 죽일 때마다 신성이 쌓이기도 하니 바즈라를 휘두르는 손을 멈출 수야 없다.
“쌓이는 신성이 9,999+에서 표시가 멈춰서 얼마나 올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 혼의 격은 [찬란함]에 머무른 상태이고, 신으로서의 존재력도 반신 상태에서 멈춘 상태이다.
그렇다고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꾸준히 성장하다 보면 언젠가 신위에 도달하겠지.
여기까지 오는 데 채 3년도 안 걸렸다. 오히려 지나치게 빠른 성장이다. 적어도 비토리야나나 루시피엘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신이 되길 원하는 타천사와 악마여왕이 그렇다고 하니 그러려니 해야겠지.
“아무튼!”
혁명력이고 신성이고 다 부수적인 거에 불과하다.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레벨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레벨이 올랐다!
이름 : 이진혁
직업 : 세계혁명가
레벨 :10
그 결과, 드디어 기대하고 고대하던 히든 2차 전직의 세 번째 스킬이 그 전모를 드러냈다!
[시대정신의 맹아] – 등급 : 세계 상위(World Elite)– 숙련도 : 연습 랭크
– 설명 : 혁명력을 소모한다. [시대정신의 씨앗]을 싹틔울 수 있다.
“과연.”
[시대정신의 씨앗] : 발아에 필요한 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이 메시지가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려도 [시대정신의 씨앗]이 싹을 틔우지 않느냐 했더니만 이런 이유였다. 싹을 틔우는 스킬이 따로 있었던 거였다니.
왜 씨앗인데 농부 보조직업의 효과를 안 받나 했네. 하긴 [농사일의 대가] 스킬은 [수확의 신]의 합성재료로 써버린 터라, 농부 직업도 스킬 하나 없는 빈껍데기기도 했고. 이럴 줄 알았으면 [농사일의 대가] 스킬을 지우지 말걸 그랬지? 농부 스킬이 거기 다 묶여있었는데.
아니, 내 생각이지만 애초부터 그거랑은 관계없었을 것 같다.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쳐두자.
“이렇게 되면 돈 놓고 돈 먹기네.”
[시대정신의 씨앗]을 만드는 데 소모되는 혁명력이 1, [시대정신의 맹아]를 사용하여 싹 틔우는 데 1. 이렇게 고작 혁명력 2를 투자한 [시대정신의 씨앗]이 발아하면 보상으로 혁명력 10을 가져다준다.즉, 시대정신의 씨앗을 심고 싹틔우는 것만으로 혁명력은 흑자다.
아쉬운 점이라면 세계마다 심을 수 있는 씨앗은 한 번에 하나뿐이라는 거다. 그러니 잔뜩 벌어들이고 싶으면 여러 세계를 돌아다니며 씨앗을 심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씨앗은 심자마자 발아시킬 수 있는 게 아닌 듯했다. 아예 씨앗의 정보에 ‘발아에 필요한 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뜬 걸 보니 말이다. 아마 씨앗이 세계의 토양이라든가 하는 조건을 요구하는 거겠지. 무슨 토양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발아에 필요한 조건이 만족되었다니 스킬을 써봐야겠지?
[시대정신의 새싹] : [시대정신의 씨앗]이 싹튼 결과물. 혁명력 +10– [시대정신의 새싹]은 심겨진 세계의 시대정신이 발전할수록 자라난다. [시대정신의 나무]로 육성해 내면 혁명력 +10. 개화시키면 추가로 +10.
혁명력을 벌었다! 그리고 추가로 벌어들일 수 있는 구석이 생겼다!
나무? 개화? 잘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하면 되겠지? 그럼 장기적으로는 다 이득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벌어들인 혁명력을 대체 어디다 쓰느냐는 걸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지만, 레벨을 올리다 보면 다 알게 되겠지. 세계혁명가는 2차 히든 전직 직업이다. 그것도 선멸자 다음으로 나온. 약할 리는 없었다. ······없겠지? 이럴 때만 직감은 조용하다니까.
“그럼 레벨을 더 올려야겠군.”
어째 내가 내리는 모든 의문의 결론이 이걸로 귀결되는 것 같지만, 아마 기분 탓일 거다.
***
시대는 난세!
만마전의 모든 세력들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고 있다.
그렇기에 지난번과 달리 우리가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추가로 두 개의 왕국을 점령했음에도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세력은 적었다.
지난번엔 교단과 전쟁 중이라는 상황도 도운 탓인지 악마들답지 않게 다른 악마 왕국들이 서로 협력하고 정보를 나누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껴도, 그 정보를 주변 왕국에 퍼뜨리지 않는 거다.
덕분에 우리의 정복전은 꽤 수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해요, 서방님.”
안절부절못하던 비토리야나가 뭔가 굳은 결심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벌리더니, 하는 말이란 게 이런 거였다.
“뭐가?”
“아시겠지만 전 서방님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질이 좋은 정보를 손에 넣기 위해 만마전 곳곳에 정찰마를 뿌려놓았거든요.”
괜찮은 자기 어필이다. 현대시대, 적절한 자기 어필은 최고의 생존전략 중 하나니까. 물론 지금 시대를 과거 지구인의 인식으로 현대시대라고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런 건 신경 끄자. 나는 턱을 두 번 당겨 설명을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우리가 있는 곳의 완전히 반대편이긴 하지만, 이상한 징후가 관찰됐어요.”
그리곤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뭐지? 귀여운 척인가? 귀엽긴 하지만 귀엽다고 말하면 큰일 나는 국면이다. 나는 반대로 그녀의 대답을 종용하기로 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비토리야나.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를 말해.”
“죄송해요, 서방님. 서방님하고 대화하는 게 즐거워서 그만.”
그 사과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비토리야나가 말하려던 이야기의 본론을 비로소 귀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본론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간단했다.
“악마제국이 생겨났다던데요?”
진짜로 간단했다.
하지만 동시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내용이기도 했다.
“저도 처음 들어보는 단어예요. 악마제국.”
나는 들어본 적이 있다. 지구 시절, 내가 하던 게임에서 말이다. 그런데도 비토리야나가 들어본 적이 없다니. 하긴 악마제국이란 게 적어도 지구에 있진 않았지. 게다가 만마전에도 있던 적이 없다면 그녀가 처음 듣는 것도 무리도 아니리라.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제국이 맞더라고요.”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내 생각을 캐치한 건지, 비토리야나가 그렇게 이어 말했다.
“두각을 드러낸 한 악마 대왕이 스스로를 악마 황제라 자처하더니, 주변의 왕국들을 정복하고 규합해서 제국을 이뤘어요. 그리고 정복한 악마왕국들을 제후국으로 두고 악마왕들 위에 서서 군림하고 있더라고요.”
“······듣고 보니 왜 이제야 생겨났는지가 더 의심스러울 정도인데?”
아무리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질서와 규율을 도입했다지만, 악마의 본질은 약육강식에 기초한다. 왕국끼리 정복을 거듭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제국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비토리야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단 악마왕들끼리 싸워서 그 승패가 갈리면 이긴 쪽이 진 쪽의 코어를 그냥 남겨두는 법이 없어요. 반드시 먹어치우죠.”
악마왕은 상대가 악마군주, 그러니까 귀족급이라면 살려두고 지속적으로 마기를 상납 받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에라도 나중에 커서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 같은 동급의 왕을 살려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먹는 쪽이 더 이득이니까요.”
이미 군주로서 성장을 끝마친 악마왕의 코어는 악마들에게 있어 최고의 마기증폭수단이니, 그 시점에서 수확하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라고 비토리야나는 설명했다.
“그런데 악마 제국의 악마 황제는 달라요. 다른 악마왕의 마계에 쳐들어가 정복하더라도 적국 악마왕의 코어를 먹는 법이 없다고 해요. 그냥 휘하로 끌어들여 제후국의 왕으로 삼는다고 하더라고요. 이상하죠?”
“네가 이상하다고 하니 이상하군.”
악마에 관해선 비토리야나 쪽이 더 잘 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이상한데, 더 이상한 점이 있어요.”
“그게 뭔데?”
“그 악마 황제의 이름은 알렉산드로스라 하던데요?”
“잉? ······뭐라?!”
알렉산드로스.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한국에선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알려졌던······.
“뭐야.”
갑자기 쎄한 느낌이 든다.
악마의 발상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인간의 방식으로 세워진 악마 제국. 그리고 그 황제의 이름이 하필이면 인류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복왕 중 하나에서 따온 거라는 사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인류연맹이나 교단에서 이런 이름을 보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은 다른 종족으로 모습을 바꿨다지만, 지구인들이 퍼져나간 세력들이니까.
하지만 만마전은 다르다. 만마전에서 지구인을 비롯한 인류종은 식료품에 불과하다. 식료품의 이름을 따와 자기 이름을 짓는다? 적어도 만마전에선 그런 경우를 한 번도 본 적 없다.
게다가······.
“이런 거 한 번 본 적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줄리아 시저의 이름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녀의 이름을 지어준 양부의 이름을.
브뤼스만 라이언폴드.
여기에서 나는 그 자칭 악마 황제, 알렉산드로스란 놈의 배후에 그 놈이 서 있을 가능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