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2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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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을 간단히 잡은 것 같지만, 이것도 다년간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블랙 드래곤을 쉽게 토막 내지는 못했다. 애초에 역린의 위치를 찾는 데만 몇 년을 허비했을 정도니까.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을 쳤기에 지금의 이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 혼자서.
동료들과 함께 블랙 드래곤 토벌에 임했다면 더 쉽고 편하게 성공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혼자서 블랙 드래곤한테 도전한 데에는 굉장히 현실적이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 이 튜토리얼 세계에는 나 혼자 뿐이다.
다른 플레이어는 없다.
그러니까 나 혼자 어떻게든 블랙 드래곤을 잡아보려고 온몸 비틀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분명 이 튜토리얼 세계에는 나 외의 다른 플레이어들로 우글거리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그 많던 플레이어들이 전부 튜토리얼에서 나가버렸다.
나만 빼고.
“왜지?!”
이유 따위 내가 알 리 없지. 어쨌든 난 남겨졌고, 낙오당했고, 고립되었다. 그 결과만이 남았을 따름이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상태창!”
나는 우렁차게 외쳤다. 왼쪽 눈을 두 번 깜박이는 것만으로도 불러낼 수 있는 상태창이지만, 나는 굳이 소리치는 쪽을 택했다.
블랙 드래곤을 한 번 잡을 때마다 오르는 경험치는 0.2%. 그리고 한 번 잡은 블랙 드래곤이 다시 등장하는데 일주일씩 걸린다. 다른 적들은 레벨 차이가 너무 나서 경험치가 아예 들어오지 않는 수준이라, 블랙 드래곤만으로 경험치를 채워야 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근 10년만의 레벨 업이다.
이럴 때 정도는 큰 소리를 칠만도 하지 않은가?
이름 : 이진혁
레벨 : 00 (경험치 00.0%)
그런데 내 외침에 반응해 나타난 상태창의 상태가 이상했다.
뭐야, 이거? 99레벨에서 레벨 업을 했는데, 어째서 00레벨로 표기된 거지?
나는 당황해서 왼쪽 눈을 두 번 깜박였다. 그러자 간략화 되었던 상태창이 자세한 정보를 불러내왔다.
이름 : 이진혁
레벨 : 00 (경험치 0.00%)
종족 : 인간
직업 : 무직
능력치
– 근력 : 99+
– 강건 : 99+
– 민첩 : 99+
– 솜씨 : 99+
– 직감 : 99+
소지 스킬 :
– [강타] S랭크, [도약] S랭크, [질주] S랭크, [투척] S랭크, [휴식] S랭크, [캠프파이어] S랭크, [응급치료] S랭크.
잔여 미배분 능력치 :0
잔여 스킬 포인트 : 999+
아, 능력치랑 스킬은 그대로군. 능력치가 전부 99+인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99를 넘은 시점에서 표기가 저렇게 고정되어 버렸으니까. 잔여 스킬 포인트도 마찬가지.
그래서 나는 레벨 업을 하고나면 내 레벨표기도 99+나 100이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00레벨이라니.
오버플로우라도 된 건가?
오버플로우. 고전 게임에서 자주 보이던 증상, 혹은 버그다. 설정된 최댓값을 상회하면 0이나 심하면 -값으로 표기하게 되는. 내 레벨의 경우는 0으로 돌아오는 방식의 버그가 난 모양이었다.
능력치와 스킬은 그대로고 레벨만 오버플로우된 거면 상관없지.
0레벨도 됐겠다, 혹시 레벨 업이 될지 싶어서 일주일 더 기다려 블랙 드래곤을 한 번 더 잡아봤지만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레벨은 오르지 않았다. 몇 가지 시도를 해봤지만 경험치는 전혀 쌓이지 않았다. 단 1도. 0.01퍼가 아니라 1. 숫자 1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튜토리얼을 시작할 때 시작레벨은 1이지 0이 아니다. 내 경우는 그냥 0 레벨도 아니고 00레벨이고.
하긴 블랙 드래곤도 잡으라고 만들어둔 몹이 아니었지.
블랙 드래곤은 잡아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생긴 건 정말 전형적인 드래곤이라 엄청나게 많은 금과 보석, 그리고 전설적인 무구를 줘도 이상하지 않은데.
어쩌면 튜토리얼의 제작자는 블랙 드래곤이 잡히는 상황 자체를 아예 고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경험치라도 줘서 다행이다 싶지.
어쨌든 이 이상 레벨 업을 하지 못한다면 튜토리얼 세계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나는 당초 계획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튜토리얼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더라면 내가 00레벨을 찍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 눌러앉아있으면서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시작한 게 레벨 업이었으니까.
바꿔 말하면, 나갈 수 있었다면 진작 나갔을 터였다. 솔직히 말해 튜토리얼 세계는 별로 살기 좋은 곳도 아닐 뿐더러, 오래 머문다고 득볼 것도 없는 곳이니까.
진작 나갔어야 했지······, 원래는.
튜토리얼 세계와 바깥세상은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출입구가 존재한다. 지금 내 눈 앞에 서 있는 [힘 100의 문]이 바로 그것이다. 다섯 기본 능력치 중 하나를 100 이상으로 올리면 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일종의 비상 탈출구이다.
이 문은 평범한 튜토리얼 플레이어가 사용하라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40레벨 이상으로는 레벨을 올릴 수 없는 튜토리얼 세계에서는 능력치를 100 이상 올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사실상 저 문의 존재이유는 그냥 제작자의 악취미이다. 플레이어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농락하기 위한.
하지만 나는 조건을 채우는 것이 가능했다.
이름 : 이진혁
고유 특성 : [한계돌파]
– 희귀도 : 고유(Unique)
– 등급 : 등급 외
– 설명 : 한계를 넘어서 성장할 수 있다.
이 특성 덕에 40레벨이라는 한계를 초월해 00레벨까지 성장했으니까.
처음 튜토리얼 세계로 들어와 상태창을 부여받고 그 내용을 확인했을 때, 나는 내가 흔히 말하는 축캐인 줄 알았다. 축복받은 캐릭터. 고유 특성으로 딱 봐도 뭔가 대단해 보이는 걸 얻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계에서 뒹굴어 본 결과 내 고유특성이 별로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튜토리얼은 빨리 깨고 나가는 게 장땡이고, 그러려면 지금 당장 도움이 되는 특성이 더 좋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도 낙오당하기 전까지의 이야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다행이지.
여전히 좋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특성이 없었으면 레벨 제한을 뛰어넘어 성장해 모든 능력치를 99+로 올리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 말 그대로 ‘다행’인 셈이다.
“자, 그럼 나가볼까?”
입으로는 호기롭게 그런 말을 뱉었지만, 긴장으로 인해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막상 능력치 하나를 99+ 찍어놓고도 바로 나가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변명이라고 해도 좋다. 굳이 00레벨을 찍을 때까지 나가는 걸 뒤로 미룬 건, 어떤 불길한 상상 때문이었다.
튜토리얼의 주인은 왜 갑자기 튜토리얼 세계를 폐쇄하고 모든 플레이어를 내보낸 걸까? 그것도 나만 빼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모른다. 하지만 가설은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가설 중에 희망적인 건 별로 없었다.
튜토리얼을 졸업한 플레이어는 강력한 존재이다. 보통 사람의 몇 배나 되는 신체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데다, 전직을 통해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더욱 큰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잠재력마저 갖췄다.
이 잠재력과 가능성을 포기하고 덜 성장한 플레이어마저 억지로 동원해야 하는 사태라.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바깥세상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거란 이미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강해진 뒤에 여기서 나가기로 결정했다.
바깥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최악의 경우에 대처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강한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튜토리얼에서 얻을 수 있는 힘이라곤 레벨과 보잘 것 없는 스킬들뿐이지만, 뭐라도 없는 것보다는 좋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00레벨에 도달했다. 내 특성인 [한계돌파]로도 깨지지 않는 성장한계를 맞이했다. 그렇다면 더 결단을 뒤로 미룰 필요가 없다. 지금이 바로 결단을 내릴 때다.
“에잇!”
나는 [힘 100의 문]에 손을 내밀었다. 쪼렙시절엔 아무리 두들겨도 굳건히 닫혀있던, 통곡의 벽과 같던 문은 거짓말처럼 스르륵 소리도 없이 열렸다.
빛이 내 시야를 감쌌다.
*
문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황무지였다.
딱 보기에도 척박한 돌과 바위의 왕국. 바위 틈새로 억척스럽게 자라난 말라비틀어진 덩굴들을 제외하곤 살아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뭐야, 여긴?”
나는 오래 전의 기억을 뒤져,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튜토리얼을 졸업했을 때 어디로 나왔는지에 대해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보통 자기가 ‘실종’된 곳에 다시 나타난다고 했었지.”
그리고 나는 서울의 내 작은 반지하 자취방에서 ‘실종’됐었다.
그런데 여긴 뭐지? 서울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고, 한국조차 아니어 보였다.
“잠깐만. 이건 아니지.”
뒤를 돌아보니 [힘 100의 문]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바위사막의 메마른 바람만이 휘몰아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로써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내가 생각한 거랑 다른데.”
파도처럼 덮쳐오는 당혹감에 뒷머리를 긁으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어떤 벼락같은 깨달음이 날 덮쳤다.
“혹시······, 지구 망한 거 아냐?”
그렇게 혼잣말을 하자마자,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랬겠다.’ 라고 납득해버렸다.
내가 튜토리얼 세계에 머문 것도 수백 년이 지났다. 행성이 하나 멸망하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지만, 문명이 하나 멸망하기엔 차고 넘치는 시간이지. 게다가 내가 튜토리얼에 혼자 남겨지게 된 사건을 떠올려 보면, 어떤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으리란 건 어찌 보면 빤하다.
“그렇구나. 지구 망했구나.”
생각 외로 별 생각이 들진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이미 각오를 하기도 했고, 더욱이 어차피 지구에 남겨둔 인연은 없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간 얼굴이 빚쟁이니 말 다했지.
하지만 곤란한걸.
“개미새끼 한 마리 없네······.”
딱 봐도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아 보이는 환경은 아니다. 먹을 것은커녕 물조차 구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이 정도면 생존이 곤란한 수준이다.
생존 문제를 떠올리자마자, 나는 급히 인벤토리를 열어보았다.
인벤토리를 여는 법은 간단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손으로 허벅지를 두 번 두들기면 된다. 아니면 “인벤토리!”라고 크게 외치든가.
다행히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만으로도 인벤토리는 제대로 열렸다. 어쩌면 시스템 자체가 망가져 인벤토리고 뭐고 다 날아가 버렸을 수도 있다는 최악의 가설은 일단 접어도 될 것 같았다.
서둘러 인벤토리를 확인해보니, 먹을 것이 꽉꽉 차 있긴 했다. 물을 채운 가죽 물통과 딱딱해진 빵이 겹쳐 넣을 수 있는 한계치인 99개씩, 인벤토리 기준 2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제대로 다 남아있다. 녹슨 대검과 헌 장갑, 바래진 천 옷, 헤진 가죽 부츠 등 여분 장비들도 정상적으로 인벤토리에 남아있었다.
더러운 붕대, 튼튼한 가죽 끈, 거친 천 조각, 질 나쁜 기름, 투척용 작은 돌멩이 등의 소모품도 그렇고 조잡한 만능 도구 세트와 구부러진 바늘, 변색된 실, 거친 숫돌, 길이 잘 든 로프 등의 잡동사니도 건재했다.
튜토리얼 세계에서 나올 때 이런 평범한 아이템들은 가지고 나올 수 있다고 하기에 힘 100의 문을 열기 전에 최대한 끌어 모아둔 것들이었다. 사실 기본적인 현대사회만 유지되었어도 별 필요 없는 전근대적인 결함품들 뿐이지만 혹시 몰라 챙겨둔 것들.
“이런 게 쓸모 있길 바라지는 않았는데······.”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내 판단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솔직히 틀리길 바랐건만.
생각난 김에 인벤토리를 정리하고 있다가, 구석탱이에 던져둔 특이한 아이템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아이템의 아이콘을 끌어다 놓고 아이템 설명을 확인했다.
[???] – 등급 : 고유(Unique)– 기능 : 잠겨있음.
– 설명 : 플레이어 이진혁의 고유 퀘스트 달성 보상품. 해당 플레이어의 세계관을 반영한 외견을 취하고 있으나, 본질은 전혀 다르다.
– 튜토리얼 월드에서는 사용 불가능.
– 거래, 폐기 불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