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203
블루 마블에서 그랑 란츠로 향하는 여정은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거였다. 그 여정도 복잡했고 말이다.
그랑 란츠에서 만마전으로 갔다가, 만마전을 적당히 털어먹고 만마전과 교단의 중간 지점인 전선에서 두 세력 간의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교단 중심지까지 가서 브뤼스만의 일파를 축출하고 교단을 혁명했다가, 다시 만마전으로 와서 만마전을 블루 마블로 바꾼 후에 그랑 란츠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간만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가 그랑 란츠로 돌아왔을 때 본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저, 저거 뭐야?!”
안젤라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그녀가 그렇게 외칠 만도 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아직 그랑 란츠에 착륙하지도 않았다. 대기권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궤도 선상에서 관측 가능한 빌딩이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고층 빌딩! 이게 한 채도 아니고 여러 채가 하늘을 찌를 듯 쭉쭉 솟아 올라와 있었다.
“마천루(Skyscraper)!”
그렇게 외친 건 비토리야나였다. 그래, 맞아. 마천루. 그녀의 말대로 진짜 마천루였다!
그런데 도리어 지구 출신이라던 안젤라는 비토리야나의 외침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질문했다.
“마천루가 뭐야?”
“하늘을 긁어댈 수 있는 누각이라는 뜻이야. 지구 역사 기준으로 20세기 미국 도시들에 경쟁적으로 세워진 고층건물군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
비토리야나는 모처럼 아는 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빠른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비토리야나 너, 진짜 지구 문화에 대해 잘 아는구나······. 내가 모르는 것도 아네.”
안젤라가 감탄했다. 그녀가 마천루를 모르는 걸 보니 내가 튜토리얼 세계에 처박혀 있는 동안 지구에 대체 무슨 일이 생겼었는지 대충 감이 오지만 나는 굳이 모르는 척했다.
그거야 뭐 어쨌든.
우리가 그랑 란츠를 떠난 것도 몇 달 지나지 않았다. 불과 1년도 안 되는 세월이다. 그 세월동안 마천루 같은 게 세워질 수도 있는 건가?
아니,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일단 착륙해 봐야겠군.”
대체 그랑 란츠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한번 알아봐야겠다.
***
대기권으로 강하하여 내려오며 보이는 모습은 한층 더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궤도상에서 본 마천루는 변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처음 튜토리얼 세계에서 뛰쳐나왔을 때 보았던, 척박하고 그저 광활하기만 하던 황무지는 간 곳 없었다.
그 대신 푸르른 농지와 목초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방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소와 말, 개가 목초지를 뛰어다니고 있었고, 농지 위에는 웬 드론이 날아다니며 물을 뿌리고 있었다.
드론? 잉? 그 드론?!
자세히 보니 내가 아는 그 드론이 맞았다. 프로펠러 몇 개 달고 시끄럽게 날아다니며 물을 뿌리는 저 무인비행체는 지구 시절에 하나쯤은 갖고 싶었던 드론, 그 자체였다.
아니, 그랑 란츠에 왜 드론이야?!
그리고 그 농지들을 가로지르듯 잘 정비된 도로가 쭉쭉 뻗어 있었다. 그렇다, 도로다. 흙길도 아니고, 로마 시대 때 깔렸다던 돌로 만들어진 도로도 아니었다. 다행인지 뭔지 아스팔트 도로는 아니었으나, 콘크리트 비슷한 걸로 굳혀진 도로의 모습은 내게도 익숙했다.
왜 익숙하냐? 난 누구 멱살이라도 붙잡고 따져 묻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지평선은 더 이상 지평선이 아니었다. 시야가 닿는 곳마다 건물들이 늘어서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궤도상에서 봤던 마천루가 늘어선 곳이 아무래도 가장 큰 도시이긴 한 듯 보였지만, 다른 도시에도 빌딩이 늘어서 번화해 보였다.
“와, 진짜 발전 많이 했네요? 여기가 그 변방세계 맞아요?”
안젤라가 감탄하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랑 란츠는 이렇지 않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니, 그야 그렇죠. 거의 딴 세상인데.”
“마음에 안 든다는 게 아니야.”
이게 1년도 안 되는 세월 만에 가능한 변화인가? 아무리 스킬이 존재하고 물리법칙이 뒷전으로 밀리는 세상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듣고 보니 이상하네요.”
안젤라도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만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찾아가서 물어보죠.”
“정확히 하자면 사람이 아니지만 말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천사긴 한데, 뭐 아무튼요.”
우리는 우리가 없는 사이 그랑 란츠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만한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보기로 했다.
***
“오시길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걸로 12년 만이네요, 이진혁 님!”
케이와 테스카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케이, 원래 이름 케찰코아틀. 그리고 테스카, 원래 이름 테스카틀리포카. 이 두 존재는 브뤼스만의 [지배의 권능]에 당해 그랑 란츠에서 ‘신 가나안 계획’을 실행하는 필드 보스로서 명령을 수행하다가 내 손에 의해 권능에서 풀려나게 되자 내게 은혜를 갚겠다며 날 따랐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이진혁교의 권속으로 임명해서 혹시 모를 교단의 습격에 대비해 그랑 란츠의 인류 종족들을 지키고 이끌도록 했다.
물론 내가 걱정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교단은 브뤼스만의 마수로부터 벗어났고, 그 브뤼스만도 내 손에 의해 모든 능력을 잃고 교단의 잭 제이콥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제 나와 교단은 적대관계가 아니며, 인류연맹과 교단의 사이도 개선되었다. 다른 위협 세력인 만마전조차 블루 마블로 새로 태어났으니, 이제 그랑 란츠의 안위를 위협하는 거의 대부분의 요인이 사라진 셈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둘도 데리고 다닐 걸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도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그, 그래. 잉? 그런데, 뭐? 12년?”
테스카의 입에서 나온 숫자가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네, 12년이요.”
“대충 12년 맞아요.”
케이도 동의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그랑 란츠를 떠나 있던 건 1년도 채 안 되는 세월이었다. 그런데 잠깐 만신전이랑 교단 좀 왕복하다 왔다고 그랑 란츠에선 12년이 흘러 있었다? 상대가 내 권속들이 아니었다면 몰래 카메라를 의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아, 로드. 저 이 현상 알아요.”
그렇게 말을 꺼낸 건 의외로 키르드였다.
“쌍둥이의 역설 현상이에요.”
“그게 뭔데?”
“저도 책에서 읽은 건데요.”
쌍둥이가 있다. 그런데 쌍둥이 동생은 자리에 머물러 있고, 쌍둥이 형은 굉장히 빠르게 움직인다. 빛에 가까운 속도로. 쌍둥이 형이 그 속도로 멀리 갔다가 돌아왔을 때, 형은 10살밖에 먹지 않았지만 동생은 20살을 먹게 된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돼?”
“그, 그······. 저도 책에서 읽은 거예요.”
키르드도 제대로 설명을 못하겠는지 그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나는 김이 빠져 되물었다.
“소설이야?”
“과학서요.”
“뭐라고?”
“아, 그거.”
옆에서 듣고 있던 안젤라가 알아들었다는 듯 끼어들었다.
“저도 생각났어요, 선배. 원정 다니는 크루세이더들한테 들은 건데, 원래 우주전함에 오래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하더라고요.”
“뭐라고?”
“멀리 원정 가는 함대 소속일수록 심한데, 갓난아기였던 아들이 장성해 있는 일도 생긴다더라고요. 뭐, 종족이 천사다 보니 수명으로 큰 문제가 발생하진 않지만요.”
“아니. 우리가 전장에서 교단으로 갔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 는데?”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가 교단을 습격한 그날, 추모식은 1주기 추모식이었다. 누가 말을 해준 것도 아니고 그냥 스쳐 지나가다 현수막 걸어놓은 걸 본 게 전부였다.
난 그냥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야?
“맞아요. 우리가 며칠 걸려 교단으로 가는 동안, 교단에서는 벌써 1년이 지나 있었던 거죠.”
우리한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닌 건 알았다. 그렇다고 납득이 가는 건 아니었다.
“뭐야? 그런 현상이 왜 발생하는 거야?”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이네요.”
그때, 비토리야나의 입에서 왠지 익숙한 이름과 단어가 나왔다.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
“네, 그게······.”
비토리야나는 뭔가 설명하려고 했지만 나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입을 멈추게 했다.
“아니야, 설명하지 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란 건 알아들었어.”
“아인슈타인하고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그 사람은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천재란 걸 알 뿐이다. 난 문과라고. 그런 이과의 최종보스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아, 문과란 건 물론 고등학교에서 그랬다는 이야기다.
내 최종학력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그래서 내가 체감상 1년도 안 되는 여행을 다녀오는 새, 그랑 란츠에선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소리구나.”
나는 그냥 눈앞의 현상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하긴 어째 이상하다 싶긴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할부로 준다던 인류연맹의 보상이 매일매일 들어온다든가, 입금되는 것에 시간 좀 걸릴 거라던 교단의 현상금이 며칠도 안 지나서 들어온다든가.
내가 그렇게 원리는 모르기로 한 채 현상만 이해하고 있으려니, 케이와 테스카가 상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그런 케이와 테스카가 내게 깊은 동질감을 주었다. 나는 그들을 와락 껴안으며 외쳤다.
“역시 너희는 내 권속이구나!”
얘네들을 내 권속으로 임명하길 정말 잘했다.
***
불과 12년간, 그랑 란츠는 눈부신 발전과 성장을 이룩했다.
그랑 란츠에서 처음 만난 드워프들이 오줌을 걸러서 먹고 바위 밑의 벌레를 잡아먹는 걸 직접 봤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선 그게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사실 지난 세월이 1년이 아니라 12년이었다는 걸 알아도 이상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 이유를 케이는 이렇게 설명했다.
“원래대로라면 각기 다른 종족들이 치고받고 싸워서 인구와 생산력을 낭비하고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로 인해 문명이 후퇴하고······, 뭐 그런 일들을 다 겪어야 했을 테지만요.”
“그런데 그랑 란츠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래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네!”
케이가 자랑스러운 듯 대답했다.
“원인은 물론 이진혁교죠!”
“이진혁교의 교리가 ‘화합하라, 서로 협력하라’니까요!”
테스카가 거들었다.
요는 세계 구세주 이진혁을 섬기는 이진혁교가 그들을 한데 묶는 구심점이 되었다는 논리였다. 더욱이 대제사장 케이와 총대주교 테스카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설령 싸움을 좋아하고 야망이 있는 종족이라 하더라도 쉬이 나서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그랑 란츠의 모든 인류 종족들이 이진혁교의 가르침에 따라 서로 힘을 합쳐 각자의 장점을 살려서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그 결과, 그랑 란츠 세계는 불과 12년 만에 마천루를 올리고 드론으로 농지 관리를 하는 현대시대로 돌입하는 게 가능해졌다.
듣고도 못 믿을 이야기였다. 아니, 그게 가능해?
“아예 밑바닥부터 문명을 쌓아올리는 거였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요.”
“각 종족이 멸망당하기 전의 지식과 기술을 어떻게든 보존하고 전승해서 서로 보완하고 발전시킨 결과물이죠.”
하긴 6.25전쟁으로 산업 기반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던 남한이 21세기에는 선진국 소릴 듣게 된 걸 보면 아주 없을 일인 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더욱이 눈앞에 결과물이 있는데 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난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둘이 아주 쿵짝이 잘 맞는군.”
내가 다소 심술궂게 그렇게 말하자 둘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먼저 케이가 얼굴을 발그레 물들였다. 테스카도 겸연쩍은 듯 우물거리더니, 뭔가 큰 용기라도 낸 것처럼 내게 이렇게 선언했다.
“저, 저희 결혼했습니다!”
뜬금없는 폭탄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