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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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그랬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실로 명료했다.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다.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악용당하는 건 차라리 법칙이라 해도 좋다. 굳이 다이너마이트나 핵에너지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 각 세계는 경쟁적으로 튜토리얼을 만들었고 운영했어요. 세계의 구성원이 강해지면 그 세계가 강해질 걸로 믿었던 거죠. 하지만 다른 세력들이 튜토리얼 졸업자들에게 접근해서 영입을 시도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게 만신전과 만마전, 그리고 인류연맹인가.”
= 그 시점에서는 아직 만신전이나 만마전이라는 이름은 붙어 있지 않았지만요. 그리고 그 때는 아직 인류연맹이 생기지도 않은 시점이었어요.
잘 감은 안 오지만, 말하는 걸 들어보니 꽤 예전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 신들과 악마들이 적극적으로 인재영입을 감행해 세력 확대를 꾀하면서 각 세계는 인재유출로 인해 반대로 세력이 많이 약해지게 되었어요.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만신전과 만마전이 각 세계로 침공을 시작했죠.
“침공을 했다고? 전쟁을 했단 말이야?”
= 네, 정복전쟁이요. 신이나 악마들이 각자 뭉쳐서 세력을 이룬 것도 그 때 일이에요. 약화가 되었다고는 해도 세계는 강력한 상대였으니, 연합을 할 필요를 느꼈던 거겠죠.
속이 불편한 이야기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했고.
내가 있던 튜토리얼 세계에서 왜 나만 남기고 모든 플레이어들이 송환되었는가? 그건 내가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만신전이나 만마전의 침공을 받은 세계가 소환한 게 아니었을까?
패색이 짙은 전쟁에 소년병까지 동원되는 건 흔한 일이다. 그 전쟁이 총력전이라면 더더욱.
성장 가능성이 있고, 그대로 성장시키면 분명 더 강력한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아직 튜토리얼을 졸업하지 못한 플레이어는 소년병에 비유될 수 있었다.
= 각 세계가 차례차례 정복당했고, 피난민들이 생겼어요. 그 피난민들이 모여 세력을 이뤘고 아직 침략당하지 않은 세계의 인류가 연합해서 비로소 인류연맹이 생긴 거죠.
“······그렇게 된 거로군.”
크리스티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그녀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인류연맹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일 테니까.
적대세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정의로 규정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연맹과 대립하는 세력인 만신전과 만마전을 악으로 포장하는 건 크리스티나 입장에선 차라리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뒤는 맞아드는군.’
그럼 역시······, 지구는 침공당한 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입맛이 썼다.
그런데 지구가 어찌됐건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날 찬 전 여자 친구의 집안이 망해서 일가족이 풍비박산 났다는 소리는 기쁜 소식일망정 이렇게 씁쓸해 할 일이 아니다.
물론 지구가 진짜로 나랑 사귀었던 건 아니지만. 오히려 지구에서의 내 일생이 더 씁쓸한 것이긴 했다.
그러니 이 씁쓸함을 오래 곱씹고 있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내가 사는 게 더 중요하고 내 사정이 더 중요하니까. 나는 재빨리 잡념을 지워버리고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 크리스티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 이진혁님이 지금 계신 곳은 아마도 만신전에게 점령당해 교단의 관리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교단의 인퀴지터가 갑자기 나타날 이유가 없으니까요.
크리스티나의 추측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주었다.
“새티스루카······, 그 인퀴지터는 내가 이 지역의 살균병기를 파괴했다고 말했어. 이 라켓을 보고 그렇게 말했지.”
헬리펀트 뿔로 만들어진 라켓을 보고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내가 잡아 죽인 지옥 멧돼지가 바로 그 살균병기임을 뜻한다.
= ······확실해졌네요. 교단이 말하는 살균이란 토착인류의 절멸을 뜻합니다.
지옥 멧돼지가 오크들을 잡아먹고 다닌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오크를 포함한 이 지역의 인류절멸. 그게 교단이 살균병기를 이 지역에 배치한 의도일 터였다.
오크나 드워프 등, NPC들이 절멸하든 말든 나하고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나도 교단의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교단의 일을 훼방 놓고 인퀴지터까지 죽여버렸으니 표적이 안 되면 그게 더 놀랄 일이지.
나는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담배연기 뿜듯 내쉬었다. 그래도 속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튜토리얼에서 나오자마자 이렇게 피곤해질 줄은 몰랐군.”
=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좀 더 심플하게 생각하자.
강해져야 할 이유가 늘었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취미가 의무로 변질되어버린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교단은 인류연맹의 적이라며?”
= 네, 그렇죠.
“그런데 왜 퀘스트 안 줘?”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퀘스트를 해결해서 보상을 받는 게 플레이어의 방식이다.
비록 튜토리얼에선 도중부터 퀘스트 라인에서 이탈해서 그러지 못했지만, 튜토리얼 세계에서 빠져나온 뒤로는 나는 착실히 퀘스트를 해결하고 그 보상을 받아 성장해왔다.
그런데 무려 인퀴지터를 잡았는데도 퀘스트도 안 나오고 그 보상도 안 나오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이건 플레이어로서 매우 합당한 의문이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 인퀴지터의 토벌이라는 퀘스트는 연맹원 레벨에는 존재하지 않아요. 레벨 업 마스터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고요.
“뭐? 왜?”
= 불가능하니까요. ······원래는.
크리스티나는 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 안 그래도 상부에서 이진혁님께 어떤 보상을 드려야 할지 논공행상 중이에요. 이건 퀘스트 해결로 퉁 칠 게 아니라 전공(戰功)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구요. 저도 그 자리에 참석하고 오는 길이에요.
내가 인퀴지터를 처치했을 때 조용했던 게 그런 이유였나.
=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전공은 반드시 높은 평가를 받을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아무래도 저도 회의에 다시 참석해야 할 것 같아요.
내게 더 좋은 보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데 보내주지 않기도 좀 그랬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크리스티나가 자리를 비우는 것을 허락했다.
나도 생각할 게 많았다.
*
크리스티나를 보낸 후 레벨 업 마스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자 그 동안 숨죽인 채 조용히 있던 드워프들과 오크들이 갑자기 내게 절을 했다.
“신이시여, 저희를 구원해주심에 감읍하나이다!”
“감읍하나이다!”
드워프 두프르프의 선창에 따라 오크들도 다 같이 소리 지르는 게 굉장히 기이해 보였지만 그건 둘째 치고.
아까 전부터 내 주변에 몰려들어서 지들끼리 수군대나 싶더니만 이들 나름대로 어떤 결론에 이른 모양이었다.
그 결론이란 게 완전히 글러먹었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신이라니.
“왜 내가 신이라고 생각하지?”
“그, 그야······.”
“대장, 아니지. 위대하신 이께서 신을 죽이셨으니 그러하나이다!!”
두프르프가 우물쭈물하던 사이, 라카차가 선수를 쳐 냅다 외쳤다. 그러면서도 우쭐해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신 뿐!”
“그러니 위대하신 이께서는 신이시나이다!!”
다른 오크들도 서둘러 이어 외쳤다.
“이진혁님께서 토벌하신 저 자는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고 저희들을 더러운 벌레라 말하였나이다. 더불어 저희에게서 불을 빼앗아갔으니, 저희는 두려움에 떨며 저 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나이다. 한데 이진혁님께서 불을 하사하여 주시고, 저희를 벌레처럼 여겼던 자를 토벌하셨으니, 이는 신적인 위업이라 부르기에 합당하다 여겼나이다!”
오크들이 잠깐 입을 멈춘 사이, 생각을 정리해낸 건지 두프르프가 외쳤다.
그래, 드워프가 확실히 오크들에 비해선 잘 말하는군.
그러나 틀렸다.
“내가 죽인 자는 신이 아니다. 그러니 나도 신이 아니지.”
나의 선언에 오크들은 웅성댔으나, 드워프들은 완고했다.
“미천한 이들의 숭배가 불쾌하시다면 거두겠나이다. 그렇다 한들 이진혁님께서는 저희에게 있어 이미 신과 같사옵니다.”
“아, 그래. 그렇지. 저희 오크들도 드워프들과 같은 생각이나이다!!”
두프르프의 말에 감화된 듯 라카차가 얼른 외치자, 다른 오크들도 웅성대길 관두고 고개를 조아렸다.
– 방랑 드워프의 우호도가 255 상승했습니다.
– 황야 오크의 우호도가 255 상승했습니다.
– 방랑 드워프가 당신을 신으로 섬깁니다.
– 황야 오크가 당신을 신으로 섬깁니다.
시스템 메시지까지······. 뭐, 이들의 우호도는 이미 한계돌파를 거친 탓에 더 올라봤자 별 의미는 없지만 말이다.
– 방랑 드워프와 황야 오프의 우호도가 신앙심으로 치환됩니다.
– 현재 당신의 신앙점수 : 10 포인트
– 다른 조건을 만족하면 종교를 세우고 신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다른 밝혀진 조건
– 더 많은 신자를 모아 신앙점수를 쌓으십시오.
없던 의미가 방금 생겼다.
“하하핫.”
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플레이어란 건 하기에 따라 신까지 될 수도 있는 건가?
물론 나는 지금 50명도 안 되는 NPC의 신앙을 받았을 뿐이고, 그로써 얻은 신앙점수는 고작 10이다. 지금 시점에서 밝혀진 건 얼마 없지만, 실제로 신이 되려고 마음먹으면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건 눈치로 알아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될 수 있다’는 이 명제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꽤 의미는 컸다.
교단이라는 단체가 섬기는 신이라는 나부랭이들이 결코 손에도 닿지 않고 꿈도 꿀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주니 말이다.
‘어쩌면 교단의 신들도 원래는 플레이어였을지도 모르지.’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뭐, 좋아. 알았어.”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는 좀 쫄아있었다.
어쩌다 보니 지옥 멧돼지를 죽였고, 교단의 인퀴지터까지 죽였다. 앞으로는 신마저도 적대시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암담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상대할 신이란 것들의 정체가 옛날엔 나와 같은 플레이어였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작지 않은 용기가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물러날 곳도 없다.
“갈 데까지 가보자고.”
나는 각오를 다졌다.
*
반격가 12레벨을 찍음으로써 새로운 스킬을 손에 넣었다.
[흡수/방출] – 등급 : 희귀(Rare)– 숙련도 : 연습 랭크
– 효과 : 적의 마법계열, 혹은 에너지 투사 스킬을 흡수한다. 흡수한 스킬은 원하는 방향으로 방출할 수 있다.
적의 모든 투사체를 반격할 수 있는 받아쳐 날리기에 비해 조건은 조금 더 빡빡하지만 반격 타이밍을 조절할 수 있고 방향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서 명중률이 더 높은 스킬이다.
애초에 레벨이 너무 높은 탓에 적을 제압해 경험치를 얻는 것 자체가 힘든 나다. 새로 수련할 수 있는 스킬이 생긴 것 자체가 꽤 큰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이 스킬을 오크 상대로 수련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오크들 중에 마법을 쓸 수 있는 오크는 단 한 명도 없다. 마법 외의 에너지 공격도 그렇고.
받아쳐 날리기도 마법 공격 반격 수련치를 채울 수 없으니, S랭크를 찍기 위해서는 결국 다른 연습 상대를 찾아야 했다.
막고 던지기도 마찬가지. 대형종 대상 반격 수련치가 필요했다,
결국 오크 상대로 채울 수 있는 수련치는 다 채운 셈이다.
‘슬슬 오크들을 두고 떠날 생각을 해야겠군.’
애초에 교단의 인퀴지터를 죽여 버린 이상 정주생활을 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교단이 인퀴지터의 죽음을 언제 인지하고 날 추적해올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이 자리에 계속 남아있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새티스루카는 오크나 드워프들에게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그가 직접 죽이려고 한 건 나뿐이다.
뭐, 성직자가 ‘잡균’에 직접 접촉하면 안 된다는 교리라도 있는 모양이지.
모든 종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보통 종교란 건 합리와는 거리가 멀기 마련이다. 다른 종교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들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최대한 빨리 내 흔적을 지우고 이 자리를 떠나는 게 내게도 좋고 드워프나 오크들에게도 좋을 가능성이 높았다.
“신이시여! 저희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차라리 따르라 하옵소서!!”
당연히 드워프와 오크들은 떠나려는 나를 잡으려고 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해봐야 먹히지 않을 것임은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에게 비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했다.
“너희들에게는 날 붙잡을 자격이 없다. 지금의 너희는 너무 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이지.”
나의 말에 두프르프와 라카차의 입이 닫혔다.
“그, 그렇다면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라카차는 바로 닥쳤지만, 두프르프는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내게 그렇게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생각해두지 않았던 나는 잠깐 망설였다가, 생각나는 대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