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267
에르메스는 이런 광경을 생전 처음 보았다.
수 십 만에 달하는 마구니들이 한 군데에 모여 있는 것은 에르메스가 스스로를 마구니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하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세상에 마구니가 이렇게 많았다니.’
마구니 동맹이 진짜 힘을 드러내면 세계 정복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던 속설이 그저 허풍만인 건 아님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줄을 잘 섰다는 생각에 입가가 호선을 그리는 것도 잠시.
“뭐야? 두령, 우리 부대만 수행하는 작전이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분신님.”
마구니 두령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에르메스의 질문에 공손히 대답했다.
저 마구니들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는 에르메스가 스스로의 몸으로 통감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상급 신이었던 그가 단번에 사로잡혀 십자가에 묶여 전시되었던 경험은 아군이 되었다고 해서 쉽게 잊힐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에르메스를 사로잡은 마구니는 평범한 개체가 아닌 마라 파피야스의 분신이었고 300번대의 실력자였다고 변명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변명이 여기 모인 마구니 동맹의 병력을 얕보게 할 수는 없었다. 모인 이들 중 적어도 수만은 마라 파피야스의 분신이었으니 말이다.
“고작 인류연맹을 치는 데 이토록 대병력을 모아들일 줄이야.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에르메스는 느낀 바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마라 파피야스께서 직접 명하신 사항입니다.”
마구니 두령의 그 말을 들은 에르메스는 다른 마라 파피야스의 분신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1번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처음부터 스스로를 마라 파피야스라 여기는 분신들과 달리, 만신전에서 조직 생활을 해본 에르메스는 이 상황을 보다 심플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그의 반응에 마구니 두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마구니들만 모은 게 아니로군.”
저쪽에 아는 얼굴이 보였다. 천계의 천신들, 그리고 그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옥황상제의 조카 천원이 바로 그 상대였다. 천계와 만신전은 서로를 소 닭 보듯 했지만 워낙 역사가 길다 보니 몇 백 년에 한두 번쯤은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만난 사이였다.
“허, 옥황상제의 조카가 마구니라니.”
에르메스는 혀를 찼지만 잘 생각해 보니 자기가 할 말이 아니었던지라 곧 입을 다물었다. 그 또한 만신전의 상급 신인 주제에 마구니가 된 거니 말이다. 상대, 천원도 똑같은 생각을 한 건지 헛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면식이 있다고 인사나 할 상황은 아니었다. 사실 별로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보다는 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좀 더 높은 번호를 부여받고 싶은 야망이 앞섰다.
인류연맹은 작은 세력이다. 죽일 적도 파괴할 시설도 적을 터. 거기다 라이벌도 많다. 먼저 움직여야 공을 세울 수 있으리라. 이렇게 판단한 에르메스는 마구니 두령에게 넌지시 지시했다.
“앞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선봉을 차지해야 해.”
“예? 하, 하지만······.”
마구니 두령은 에르메스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선봉이라니, 이 갓 마구니가 된 새 상사는 벌써 죽고 싶은 건가?
물론 인류연맹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건 두령의 실수였다. 에르메스가 이러한 오판을 내리리라고 생각지 못하고 한 짓이었다.
상사가 죽어나가는 거야 상관없지만 자기가 죽는 건 곤란하다고 여긴 두령은 고의적으로 누락했던 정보를 지금이라도 에르메스에게 전달하려 들었다.
그러나 두령의 그러한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씁! 말 들어. 명령이다.”
마구니 두령이 겁을 먹었다고 판단한 에르메스는 두령의 보고를 묵살했다. 게다가 마침 저쪽에서 천계 소속이었던 마구니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쪽이 이쪽과 같은 생각을 했으리란 건 너무나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에르메스의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앞으로 간다!!”
“예, 예이.”
마구니 두령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
크리스티나의 외침 후에 대관식 자리는 바로 아수라장이 됐다.
“마구니 동맹이 쳐들어왔다고? 그놈들이 왜?”
“슈퍼 포스 부대를 내보내서 막게 해! 아, 맞다. 슈퍼 포스 다 실각했지.”
“조용히! 지금은 폐하의 대관식 중이오!!”
“이런, 현실감각 없긴. 지금 대관식이 문제야?”
마지막은 내 입에서 나온 소리다. 혀를 몇 번 찬 나는 크게 소리쳤다.
“모두 들어라!”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최고회의의 의원들은 물론 3대 가문의 가주들까지. 좋았어, 비록 입헌군주라지만 이 정도 끗발은 있군.
“우선 내가 나서서 막겠다.”
내 말에 모두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왜. 이게 의외인가?
“하지만 폐하!”
의장이 뭔가 반론하려 들 기색이라, 나는 외쳐 그의 말을 막았다.
“들어! 내가 나서서 해결되면 그걸로 좋은 거고, 아니면 뭐······. 그 뒤의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 시간은 내가 벌어줄 테니.”
“······폐하······.”
왜 다들 감동한 기색이지? 난 그냥 내가 먹을 수 있을 만큼 마구니를 먹어치운 후 버거워지면 튈 생각인데.
설마 내가 목숨이라도 걸 거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니겠지. 아무리 내가 왕이라지만 입헌군주에 불과한데, 인류연맹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의리는 없다.
그렇다고 이걸 솔직하게 밝혀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떠들고 있을 시간이 없군. 아무튼 대관식은 이걸로 끝이다! 이로써 나는 너희의 왕이니, 왕으로서 먼저 나아가 적을 막겠다!”
더 길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됐고.
“왕의 싸움을 지켜보아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움직였다.
“폐하! 건승하시옵소서!”
“건승하시옵소서!!”
나는 사람들의 외침을 뒤로한 채 곧장 [폭군의 대역]을 써 누에보 베르사유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고 [진홍 혜성]을 불러내 탑승했다.
“크리스티나! 적이 온 방향을 말해.”
= 예, 폐하!
나는 크리스티나에게서 마구니 동맹이 집결해 있는 좌표를 듣고, 곧장 [폭군의 정당한 영광] 스위치를 음으로 돌린 후 그쪽을 향해 워프했다.
시야가 일그러지더니, 내 앞에 장관이 펼쳐졌다.
“와!”
나는 놀라 외쳤다.
“이렇게 많은 마구니라니, 생전 처음 보는군.”
그냥 보기에도 수십만은 되어 보이는 마구니들. 이것들을 모조리 [이진혁의 홀]로 해치우면 단순 계산으로도 수십만의 신성이 모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절로 군침이 난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이제까지 만난 마구니는 모조리 내 한 끼 식사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아무리 나라도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식당의 도전 메뉴를 앞에 둔 것 같은 압박감이다. 지금이야 위장 한계돌파로 음식이 아무리 많아도 문제없이 다 비울 수 있지만 튜토리얼 세계에 들어가 고유 특성을 얻기 전에는 꿈도 못 꿨지.
이게 아니라.
나는 [금신전선 상유십이]를 써서 [진홍 혜성]을 12척 추가로 소환하고 그 하나하나에 모두 [폭군의 대역]으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나를 배치했다. 적의 숫자가 많으니 합체해서 때리는 것보다는 13명의 나를 움직여 각개격파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구니들은 아직 내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워프 전에 스위치를 음으로 돌려 [기습 준비 태세]를 취해둔 덕택이다.
“하긴 만신전의 왕도 천계의 옥황상제도 간파 못 한 걸 저놈들이 어떻게 알겠어?”
나는 크크큭 웃곤 13명의 나를 골고루 퍼뜨렸다. 나와 나를 선으로 잇는 것처럼, 13명의 내가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을 때 효과적으로 적의 선봉과 본대를 갈라놓을 수 있도록 배치했다.
적 선봉에는 어째선지 만신전의 녀석들과 천계의 녀석들이 섞여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하게 여길 건 아니다. 마구니들이랑 섞여 있는 걸 보니 저것들도 마구니겠지. 뭐, 상관없다. 다 죽이면 되니까.
배치를 마친 나는 모든 [진홍 혜성]을 [하이퍼 이진혁 모드]로 전환시켰다.
“그럼 이제 식사를 시작해 볼까?”
위장이 허용하는 한, 마구니들을 모조리 집어삼켜 볼 셈이다.
***
천신 출신의 대라신선이었던 천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원래 천원은 마구니가 될 생각이 없었다. 옥황상제의 조카인 그녀는 이미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욕망을 이룬 상태였다.
도를 닦는 천계 출신의 신선임에도 어지간한 만마전의 악마보다도 타락한 것이 그녀였다. 말하자면 그녀는 마구니 동맹에 속해 있지 않았을 뿐 이미 마구니나 다름없는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천계에 있을 때의 천원은 그 누구에게도 명령을 받지 않는 만인지상의 존재였다. 심지어 그 옥황상제조차도 천원에게는 명령을 내리거나 벌을 내릴 수 없었다. 먼저 상위 세계로 가버린 어머니의 후광이 아직도 그녀에게 머무른 탓이었다.
그런 탓에 천계의 천원은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갖고 싶은 건 다 갖고 죽이고 싶은 놈은 다 죽이고, 누구에게도 양보할 필요도 스스로 자제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지위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선으로서의 가면을 쓰고 위선을 떨 필요는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천원이 원한 바였다. 아름답고 고귀한 신분의 명망 있고 촉망받는 아가씨로서의 나. 이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도 그녀에겐 한 가지 풍류이자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였으니까.
그러니까 천원은 마구니가 될 필요가 없었고 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왜 마라 파피야스 같은 수상하고 괴상한 존재와 엮일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마구니 동맹이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바치는 뇌물을 자제심 없이 집어먹으며 늘 그렇듯 즐기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천원은 몰랐다. 그녀가 갖고 있던 모든 권한과 권력과 자유, 그리고 재산과 영향력은 어디까지나 천계가 존재하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천계가 없으면 천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천계 같은 강대한 세력이 하루아침에 망할 리는 없다. 천원이 이러한 경우를 아예 상상조차 못 한 건 결코 무리라 할 수 없었다. 일어날 리 없는 일을 굳이 상상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걸 상상하는 건 인류종뿐이다.
그런데 천계가 망해 버렸다. 그것도 하루아침 만에.
이진혁이란 이름의 천둥벌거숭이가 혼자 와 날뛰는데, 그걸 아무도 못 막는다. 그 모습을 보고 천원은 천계가 망했음을 확신했다.
그렇다고 천원이 천계를 지키려고 애를 쓸 리는 없었다. 저 이진혁이라는 자, 옥황상제조차 막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 그녀가 나선다고 뭔가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없거니와 그럴 능력도 없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더 쉽고 편한 방법을.
그것이 마구니 동맹으로의 망명이었다.
물론 마구니 동맹에 망명한다는 것은 곧 마구니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천원도 이걸 모르지는 않았다. 딱히 거부감도 없었고 말이다.
문제는 마구니 동맹에 망명하자마자 이상한 명령을 받은 거였다. 천계 소속이었던 마구니들을 이끌고 인류연맹을 침략하라는 명령. 그건 참 이상하고 괴상한 명령이었다.
“내가 명령을 받다니.”
천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명령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천원에게 있어선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배알 꼴리고 심술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녀는 이미 마구니 동맹 소속이고 명령을 거부할 권한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까지 불려 나오게 된 거였다.
“거참, 많기도 하지.”
그나마 위안인 건, 이 자리에 모인 마구니들이 참 많다는 점이었다. 이게 뜻하는 바는 굳이 그녀가 나서지 않아도 일이 저절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기도 했다.
마구니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마라 파피야스만큼이나 나태한 천원은 이 사실을 매우 기꺼워했다.
“두령아.”
“예, 마님.”
천원에게 붙은 마구니 두령은 그녀의 부름에 매우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원래대로라면 분신님이라 불러야 할 호칭을 마님으로 수정한 것도 그녀의 의향이었다. 그 정도야 못 들어줄 일도 아니었다.
“앞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