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291
< 291 >
그날은 무척이나 길었던 장마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태양빛이 유난히 찬란해 보여서, 나는 창문을 열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습하고 더운 공기가 열린 창문을 타고 훅 들어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지나간 줄 알았던 장마전선은 습한 공기를 남겼고, 끝난 줄 알았던 여름은 아직 길게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다.
“그래도 한번 열었으니 환기는 해야지.”
한숨은 짧게만 하고, 나는 창문을 연 채 두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샤워나 해야겠다.”
혼자서 사니 혼잣말이 는다. 혼잣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말하는 법을 까먹을 것 같아서일까. 아니, 그런 자각을 갖고 혼잣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텅 빈 공간을 혼잣말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무의식을 지배한 까닭일까.
“아무렴 어때.”
나는 수도관을 타고 올라오느라 미지근해진 물로 땀을 식히려 노력했다. 다행히도 노력해야 했던 건 잠시뿐이었다. 물은 금세 차가워졌다. 수돗물 만세다. 수도가 없었던 시절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적당히 몸을 씻어내고 대충 몸에 맺힌 물을 닦아낸 나는 다시 타자기 앞에 앉았다. 사실 샤워 같은 걸 할 시간은 없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원고를 넘겨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워를 한 건 일종의 현실도피에 가까웠다.
햇살은 어느새 방 안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타닥타닥.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기를 더듬는 내 손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탓일까. 아니, 이건 일이다.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일이며, 정해진 시간 내에 완성품을 내놓아야 비로소 프로다. 그리고 나는 프로다.
마음을 다져먹고 다시 달려드니 집중을 좀 했나 보다. 타자기에서 눈을 떼니 어느새 사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맞은편 아파트 너머로 해가 헐떡이며 넘어가고 있었다.
“안 돼!”
나는 타자기에서 미완성 원고를 거칠게 쭉 빼내어 두세 차례 흔들었다. 잉크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원고들을 조심스럽게 겹쳐 서류 봉투 안에 쑤셔 넣은 후, 그 봉투를 가방 안에 던져 넣고 집을 나섰다.
달려라, 달려!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했고, 그 노력은 어느 정도 보답받았다. 두 량짜리 작은 전차 안에 간신히 몸을 싣고서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라도 앉아서 원고를 가다듬고 싶지만, 이 시간대에 앉을 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기껏 샤워한 몸은 달리느라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고, 도착할 때쯤에는 어중간하게 말라 좋지 않은 냄새를 피우게 될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지금 한숨을 내쉬면 내 앞에 선 아가씨의 정수리를 테러하게 될 테니 참아야 했다.
결국 별수 없이 눈을 감은 채 전차 안에서 덜컹덜컹 흔들리고 있으려니, 어느새 해가 꼴딱 넘어갔다.
이미 전차를 탔으니 늦지는 않겠지만, 해가 지기 전까지 원고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탓인지 기묘한 강박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주먹을 꽉 쥐니 손 안이 땀으로 축축했다. 나는 바지에 땀을 슥슥 닦았지만 곧 후회했다.
냄새가 좀 더 심해지겠군. 손수건을 가지고 나왔어야 했는데,
너무 서둘러 나오다 보니 깜박했다. 평소에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 서두르지 않았어도 깜박했을 테지만.
“내려요. 죄송합니다. 저 내려요.”
다음 역이 목적지였기에, 나는 주변에 사과를 구하며 열리는 문을 향해 나아갔다.
이렇게 많이들 타는데 한 량만 더 늘려주지. 아니면 열차 편성을 좀 자주 해주던가.
혼자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으려니 곧 전차가 멈췄다.
그리고 세계도 함께 멈췄다.
[세계 퀘스트] – 의뢰인 : 지구– 분류 : 토벌
– 난이도 : 쉬움
– 임무 내용 : 이 세계에 마구니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마구니를 처치해 주십시오.
나는 눈의 망막에 맺힌 그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누군가가 뒤에서 등을 밀었다.
아, 내가 길을 막고 있었군.
나는 서둘러 전차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곧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이진혁이다.”
이 문장을 입 밖에 내자마자, 진실은 현실성을 띠고 나 자신을 뒤바꾸어 놓았다.
내가 내 의지로 감추고 있었던 기억이 샘솟듯 솟아 나왔다.
***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인류 앞에 서 있었다. 사라졌던 지구의 인류가 내 앞에서 부활한 모습을 보자 기묘한 감격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감격은 길지 않았다.
나와 조우하게 된 지구 인류는 말 그대로의 원시인이었다. 문자는커녕 언어조차 갖지 못한 선사시대의 인류. 교감을 하려고 해도 보디랭귀지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으니 흥이 식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들을 문명사회로 이끌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이 욕망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느냐에 대해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진혁이라는 초인이 지구 문명 전체를 개화시키고 선도해 가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지구인 모두를 나라는 개인의 추종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언젠가 떠날 사람이다. 나 혼자 다 해먹다가 내가 떠난 후에 지구가 어떤 상태에 놓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쉬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블루 마블처럼 내 가르침을 잊고 내부 분열을 일삼거나, 고대 로마 멸망 후의 유럽처럼 암흑기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지난 수백 년간의 슈퍼스타 생활로 인해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것에 질린 상태였다. 나 개인적으로도 나 혼자 나대서 관심과 신앙을 끌어모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진혁이라는 이름과 존재를 숨긴 채 인류 문명을 발전시킬 방법을 찾았다.
그 방법이 이것이었다.
나는 내 존재를 수만 조각으로 찢었다. 마치 한때의 마라 파피야스처럼.
그렇다고 모든 분신에게 이진혁의 몇 번째 분신이니 하는 이상한 넘버링을 하진 않았다. 내가 택한 것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모든 내 분신은 인류 사회에 녹아들어야 했고, 이진혁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서도 안 됐다. 그러기엔 이진혁이라는 존재는 지나치게 강렬했다.
따라서 나는 모든 분신으로 하여금 이진혁의 기억을 봉인토록 했다. 봉인한 것은 기억만이 아니었다. 신격도 봉인하고, 신성도 봉인했다.
당연히 분신들은 불멸을 받지 못하고 수명을 채우면 죽는 필멸자가 되었다. 대신 하나가 죽을 때마다 또 하나의 분신이 별개로 태어나는 것으로 했다.
모든 분신에게 각각 다른 이름과 능력, 재능, 인격을 부여하고 능력과 기억은 현생 인류의 단 한 발만 앞서도록, 그들이 내 분신들의 행보를 이해는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움직이도록 조정했다.
그렇게 지난 수백 년간, 나는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름과 성격, 직업을 갖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선 내 자아는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나는 이진혁이다.”
나는 다시금 중얼거렸다.
확신을 가지고.
“······나는 성공한 모양이로군.”
태양은 떨어졌다. 밤은 완전히 내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어둡지만은 않았다.
수백 년 전, 동굴에 틀어박혀 살던 인류는 이 어둠을 두려워하기만 했다. 그러나 고작 수백 년 만에 인류는 밤의 어둠을 뚫고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가로등이 어두운 골목길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골목길로 이어진 사람들의 집집마다 불빛이 새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집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빛뿐이 아니었다.
요리하는 냄새, 즐거운 웃음소리, 라디오의 소음.
어둠이 주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떨며 숨을 죽이던 선사시대의 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골목길에서 빠져나오면 대로변으로 이어진다. 그 대로변 양옆으로 커다란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 건물들마다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다.
채집과 사냥으로만 식량을 충당할 수 있었던 옛날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구밀도였으나, 도시에서 조금만 빠져나오면 펼쳐지는 농경지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이들 모두를 부양하고도 남아 닭과 소, 돼지를 먹이고 그래도 남는 것은 창고를 채웠다.
잉여생산물은 자본을 만들었고, 자본은 부의 집중을 만들었다. 집중된 힘은 고층 건물이라는 형태로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간다. 아직 마천루라 하기에는 손색이 좀 있지만, 도시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적합한 풍경이 그렇게 형성되었다.
나는 내가 타고 온 전차를 바라보았다. 나를 태우고 온 전차는 도시를 떠나 다시 드넓은 논밭 사이를 꿰뚫고 지나가고 있다.
도시와 마을, 마을과 도시 사이를 연결해 주는 전차는 오늘도 적혈구처럼 사람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운반되어져 온 사람들은 활기라는 이름의 산소를 도시 곳곳에 운반했다. 그리고 그 활기로 사람들은, 기술은, 문화는, 문명은 오늘도 발전하고 있었다.
문명의 힘이 지구 전역에 꿈틀거리며 인류를 번영으로 이끌어내고 있었다.
비록 내가 경험했던 21세기 지구의 문명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나, 원래 지구 역사대로라면 이 수준까지 문명을 끌어 올리는 데에도 수만 년은 걸렸을 터였다. 그러나 지구인들은 해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나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제자가 되려 한 이도 있었고, 내게 이끌려 나의 가족이 되고자 한 이도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걸 넘어서, 나보다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자 내게 도전하는 라이벌까지도 생겨났다.
조각조각으로 나눠진 탓에 신격을 잃고 필멸자가 된 내가 하나하나 수명을 다해 죽어도, 내가 남긴 것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 기술을 제자가 이었다. 내 유훈을 자손이 이었다. 라이벌이 된 이가 내가 남긴 것을 더욱 발전시키기도 했다. 나와는 상관없이 아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지구 문명은 발전했다.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고는 이 문명을 세우는 데에 있어 첫 불씨가 된 것뿐이다. 그것을 불길로 일으켜 문명으로 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현생 지구 인류의 공이었다.
“······뿌듯하군.”
나는 그것이 그저 자랑스러웠다.
지구는 부활했다. 지구 문명은 다시 세워졌다. 지구 인류가 지구 위를 걷고 있었다.
이제 이들은 내가 없어도 걸을 수 있다. 내가 언제 떠나든 혹은 그러지 않든 이들은 여전히 지구인일 것이고 앞으로도 문명을 발전시킬 것이다. 굴러가기 시작한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을 테니까.
갑자기 예기치 못한 커다란 암초를 만나지 않는 이상은.
“그런데 이놈들이 왔단 말이지.”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수백 년 만에 하는 행동이었으나, 방금 전까지 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익숙하게 인벤토리를 조작한 나는 거기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천옥봉호로]그리고 나는 지난 수백 년간 이 호리병 안에 유폐되어 있던 마구니를 꺼냈다.
“응! 엄마!”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정신 나간 천계 출신의 마구니, 천원은 내게 말했다.
“마라 파피야스가 지구로 올 거래!”
마라 파피야스는 설마 유혹이나 지배 같은 걸 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대신 내 말을 듣는 마구니가 존재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니 보안 같은 걸 챙길 생각도 않고 마구니들에게 일괄 명령을 내린 거겠지.
이 변수, 천원 덕에 나는 마라 파피야스의 계획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다.
내게 수십만 개체의 마구니를 몰살시키도록 한 건 나를 상위 세계로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든가, 일백 개체의 마라 파피야스의 분신을 남겨놓고 마구니 동맹 자체를 봉인한 후에 천 년 뒤에 다시 돌아올 거라든가.
그 모든 정보를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이 일을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마구니 동맹이 부활해 지구를 위협할 때, 지구로 하여금 내게 [세계 퀘스트]를 발주하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그 [세계 퀘스트]를 받자마자 이진혁으로서의 인격과 신격, 그리고 능력을 각성하도록 스위치를 걸어놓았다.
그 안배가 지금 발동했다.
“그렇다면 이진혁으로서의 일을 해야겠지.”
그러기 위해 예비해 놓은 안배였으니까.
“아, 그 전에 우선 사무실에 원고부터 전달하고.”
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사무실에 원고를 전달하는 것도.
마라 파피야스의 잔당을 처치하는 것도.
***
그날 밤.
지구인들은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기묘한 유성우를 보았다.
우주를 향해 솟아오르는 수만 개의 빛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단순히 예쁘다고 감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소원을 비는 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길조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것이 흉조라고도 했다.
그러나 몇 달이 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곧 그들은 기묘한 유성우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다음날에는 또 해가 떴고, 일을 하러 나가봐야 했으므로.
그렇게 지구의 일상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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