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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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설마 이 놈, 교단의 인퀴지터인가?
하지만 인퀴지터 치고는 너무 약하다. 처음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식인거미보다야 강하지만 지옥 멧돼지의 절반만큼도 위협적이지 않다.
‘혹시······. 힘을 숨길 수 있다거나?’
모르는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좀 긴장을 할 필요가 있겠다.
“지금 너, 네 동족들을 세균이라고 부른 건가?”
일단은 가볍게 탐색해보자. 이 녀석이 정말 인퀴지터라면 엘프들을 절대 동족이라 부르진 않을 터였다.
내 질문에, 녀석은 코웃음을 쳤다.
“이들은 내 동족이 아니다. 균사체가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게 사람일까?”
말하는 뽄새하고는. 그래도 이로써 이 녀석을 상대로 좀 긴장해야 할 이유가 는 셈이다.
내가 경계심을 보이자, 녀석은 한 번 더 픽 웃곤 내게 은혜라도 베풀 듯 말했다.
“넌 좀 쓸 만할 것 같아 보이는군. 감사해라. 나는 위대한 교단의 영광스러운 전도사다.”
전도사? 인퀴지터가 아니라? 내가 눈을 작게 뜨자, 전도사는 짐짓 위엄 있는 체 했다.
“아무리 무식해도 내 직업명을 듣고도 눈치를 못 챌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겠지. 그렇다. 내겐 전도의 권한이 있다.”
전도의 권한이라. 그걸 권한이라고 할 정도인가? 의무에 더 가깝지 않나? 하긴, 교단이 내가 아는 기존의 종교집단과 그 성질이 판이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종교 주제에 사람을 가려 받을 수도 있지. 고정관념은 좋지 않다.
그건 그렇다 치지만 이 놈 말 뽄새가 진짜 마음에 안 드는군.
그냥 한 번 들이받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교단에 귀의해라. 그리하면 네게도 무궁한 영광이 주어질 것이다.”
전도사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나를 전도하는 건가?”
“교단은 자애롭다. 네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일단 교단에 귀의한다면 네 죄를 사할 것이다. 두려워말고 복종하라.”
허.
아니, 덮어놓고 어이없어 할 이야기는 아니다. 내게 있어서도 꽤나 달콤한 이야기다.
운 좋게 인퀴지터를 죽이고도 살아남긴 했지만, 교단이라는 거대한 세력은 내게 상당히 위협적이다.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는 아군으로 삼는 것이 내 보신에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르히를 비롯한 설원 엘프들이 현혹에 걸린 채 멍청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아무리 NPC라지만, 내 눈엔 이들이 세균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한 번 훗 웃어주었다. 자칭 전도사처럼.
“모든 죄를 사해주나? 정말로?”
“그렇다.”
“인퀴지터를 죽인 죄도 말인가?”
“인퀴지터를······, 뭐라고?!”
전도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은 볼만했다. 놈의 태도가 일변했다.
“네 놈······, 교단의 적!”
“하, 그럼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일개 전도사가 모든 죄를 사하여줄 순 없다. 처음부터 사기였다. 입만 번지르르해선. 도중부턴 한 대 패줄까 고민했으니 입이 번지르르한 것도 아니지.
그리고 지금부터 난 실제로 이 놈을 한 대 패줄 예정이었다. 그런 내 속내를 눈치챈 건지, 전도사가 소릴 꽥 질렀다.
“날 지켜라! 아니, 죽여!!”
그 말이 날 향하는 것이 아님은 명백했다. 당장 엘르히가 내게 덤벼들고 있었다. 날 구원자로 여기던 그가 말이다.
“하하, 현혹이란 무섭군.”
난 씁쓸하게 웃으며 몇 분 전에 [흡수]해놨던 [현혹]을 [방출]했다.
– 현혹에 실패했습니다. 이미 현혹에 걸린 상태입니다.
– 현혹을 시도해보기 (1/1)
“랭크 업.”
[현혹] – F랭크나는 그 이상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대충 엘르히를 밀었다. 뒤이어 덤벼들던 레인저들이 엘르히의 몸에 같이 밀려 넘어졌다.
“그러고 조용히 있으라고.”
[마비 마안]식인 거미에게서 얻은 마안 스킬을 엘르히에게 쏴주자, 엘르히의 몸이 그 자리에서 뻣뻣이 굳었다. 음, 마력 올려두길 잘했군. 수련치도 쌓였다.
“이건 불가항력이야, 엘르히. 하핫.”
나는 연습 랭크 수련치를 채운 마비 마안을 랭크 업 시키고, 내게 달려드는 다른 엘프들에게도 차례차례 슬로우와 마비를 걸었다. 상황은 더럽지만 수련치는 맛있다.
그렇게 엘프들을 무력화시키고 나니, 전도사는 마을회관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어딜!”
나는 전도사를 향해 마비 마안을 날렸다. 다른 엘프가 몸을 날려 그 마비를 막아주려고 했으나 이미 슬로우에 걸린 터라 너무 느렸다.
“아악!”
마비 저주에 걸린 전도사가 비명을 질렀다.
이거 꽤 아픈가 보군. 아니면 그냥 전도사만 엄살이 많아 이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게 날아드는 [마비 마안]은 족족 흡수하거나 받아쳐 날려서 직접 맞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얼마나 아픈지 잘 모른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 수련치 좀 마저 채우게.”
나는 전도사에게 그리 말하고, [슬로우]에 걸려 느릿느릿하게 내게 달려드는 설원 엘프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저 현혹 당했을 뿐인 설원 엘프들에게 죄는 없지만, 어쨌든 제압할 필요는 있었다. 이런 좋은 변명거리가 있는데 수련치 쌓을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한 명, 한 명. 일부러 슬로우를 먼저 걸고 그 다음에 마비를 거는 식으로 꼼꼼하게 수련치를 채웠다. 그랬던 보람이 있어, 나는 두 스킬 모두 D랭크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마비에서 벗어나 도망치려는 전도사에게도 추가로 슬로우와 마비를 걸어준 건 덤이다.
“으으, 으으으······.”
전도사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안 끝났어.”
현혹 스킬의 수련치도 채워야 하거든.
*
[응급치료] +4– 등급 : 일반(Common)
– 숙련도 : S랭크
– 효과 : 비전투 상태에서만 사용가능. 대상의 생명력을 천천히 회복시키고 부상을 치료한다. 스킬 사용에 붕대가 필요하다.
스킬 설명에 붙어 있진 않지만, 내 응급치료는 S랭크 보너스로 원래 대상의 가벼운 상태이상을 하나 해제해주는 효과가 붙어 있다.
그런데 일전에 응급치료를 강화하면서, 새로운 보너스가 붙었다. 치료효과가 올라간 것은 물론 동시에 상태이상도 여러 개를 동시에 풀 수 있게 되었고, 정신이상까지 치유할 수 있게 된 게 그것이었다.
즉, [응급치료] +4로 풀 수 있는 상태이상에 [현혹]이 포함됐다.
그럼 뭐다?
“으윽······! 그, 그만!!”
“안 돼. 후후후.”
나는 전도사에게 붕대를 감았다 풀었다 하면서 현혹도 반복적으로 걸고 있었다. 전도사를 고문하는 게 아니라 그냥 수련치를 쌓고 있는 거다.
이미 현혹에 걸린 대상에게 다시 현혹을 걸어도 수련치가 쌓이지 않기에, 그럼 현혹을 푼 다음에 다시 걸면 되지 않을까? 하는 발상을 떠올렸는데 그게 멋지게 들어맞았다.
[슬로우] [마비 마안]하는 김에 슬로우와 마비 마안 수련치도 마저 채우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무고한 설원 엘프들한테 이런 극악한 고문을 할 순 없으니.
아니, 고문 아니지만. 이거 고문 아니다.
“어버버버······.”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전도사의 표정을 보아하니 측은지심이 일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방심해서도 안 되고 잊어서도 안 된다.
이놈은 사람을 벌레처럼 보는 교단소속이며 나도 현혹하려고 했고 죽이려고도 했다.
그러니까 이것도 다 정당방위다. 좀 과잉방어인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그게 뭐 중요할까.
“그래서 네 목적은 이 고원에 설원 엘프들을 묶어두고 모두 자연스럽게 굶어죽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구원자 마법사가 찾아온다며 헛된 희망을 준 것도 그 때문이고?”
“그렇습니다······.”
“그러느니 그냥 네 손으로 죽이지 그랬어?”
“그래선 안 됩니다······. 이들의 죽음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현혹에 걸린 전도사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교단이 직접 ‘살균’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도 확실해졌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전도사도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뭐 종교적인 이유겠지.
어쨌든 이 말이 맞는다면 당분간은 황무지의 드워프와 오크들도 안전할 테니 다행이다.
[응급치료]“허억, 허억! 제, 제발 그만! 그만해주십시오!!”
현혹에 걸려 있었던 때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작 레어 스킬인 현혹에 기억조작이나 최면 같은 고급 효과가 붙어 나올 리가 없다. S랭크 보너스라도 받으면 모를까.
즉, 이 전도사는 자기가 현혹당해 중요정보를 나불나불 떠들고 있다는 걸 자기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상태다.
“크크큭. 너도 잘 아는 모양이로군. 그래, 너는 이미 교단의 배신자다.”
“아니야······. 아닙니다!”
전도사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람이 이렇게 된 걸 보고 있자니 좀 불쌍한데?
[슬로우] [마비 마안] [현혹]그렇다고 수련치 쌓는 걸 멈출 생각은 없지만. 값싼 연민이나 동정심보다는 수련치가 더 중요하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변함없는 진실이자 진리다.
“으아악! 흐아앙!”
마비의 고통과 현혹의 쾌락에 농락당하며, 전도사는 혼자서 다양한 소릴 연주했다.
나는 그냥 설원 엘프들 모인 자리에서 전도사를 상대로 수련치를 쌓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전도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설원 엘프들도 다 듣고 있었고, 진실을 알게 된 엘프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그들은 전도사의 껍질을 산 채로 벗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내가 제지했다.
즉, 전도사의 목숨을 붙여두고 있는 건 나다.
이런 내게 전도사를 상대로 스킬 수련치를 쌓을 정도의 자격은 있지 않을까?
“차라리 그냥 죽이는 게 더 자비로울 정도로군요······.”
도중부터는 엘프들도 끼어들지 않고 안 그래도 흰 낯빛을 더 새하얗게 하곤 내 하는 양을 보고만 있었지만, 그리고 자기들끼리 저런 소릴 속닥거리고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다.
“음, 마나가 다 떨어졌군.”
마비되어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린 채 바들바들 떠는 전도사를 내버려두고, 나는 불가에 앉아 좀 쉬기로 했다. 휴식을 켜면 마력도 회복되니까.
더욱이 어차피 캐낼 만한 정보는 다 캐낸 후였다. 수련치도 충분히 쌓았고.
그런데 이상하다. 불가에 앉은 사람이 나 밖에 없다. 분명히 아까 앉아도 된다고 허락했었는데, 그새 까먹은 모양이다.
“다들 여기 불가로 와서 앉지?”
마을회관의 벽에 달라붙어 오들오들 떠는 엘프들에게 나는 되도록 친절한 말투로 그렇게 제안했다.
그러자 엘프들은 마치 사형선고를 당한 죄수마냥 흠칫 놀라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불가로 와서 앉았다.
이거야 원, 내가 무슨 처형인도 아니고. 반응이 이래서야 어디 우호도 채우겠어?
하는 수 없지. 이럴 땐 역시 오퍼레이션 미군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자 [캠프파이어] 스킬의 효과로 불가에 앉아있던 엘프 전원의 앞에 물이 뿅 하고 생겼다.
“오, 오오!”
“네 말이 정말이었군, 엘르히!!”
아직 놀라기엔 좀 이르지. 이어서 나는 인벤토리에서 그 동안 잘 묵혀뒀던 탕수육을 꺼내 들었다. 인류연맹에서 제공하는 탕수육은 이미 소스가 뿌려진 상태였지만, 갓 볶은 듯 바삭함이 살아있었다.
“볶먹인가······.”
“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내 혼잣말에 엘르히가 반응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큰 사고는 아니었다.
“이, 이럴 수가! 이런 호화로운 음식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니!!”
탕수육 절반을 받아든 엘프들은 동공이 너무 확대되어 안구가 터질 것처럼 보였다. 입에선 벌써 침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와, 진짜 깬다. 얘네 엘프 맞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물과 음식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아, 그렇군.
“먹어도 좋아.”
내 그런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설원 엘프들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니, 뭔. 무슨 잘 훈련된 개도 아니고. 얘네들 왜 이러지? 내가 그렇게 무서웠나?
어쨌든 다들 탕수육을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좀 주저했지만, 탕수육이 이 입에 들어간 그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
긴장과 공포로 인해 굳어있던 설원 엘프들의 표정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