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34
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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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차원의 어느 장소.
이진혁이 막 드워프이터라고 명명된 필드 보스와 맞붙고 있을 때.
그들은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에서 테이블 하나 놓고 둘러앉아 블랙잭을 하고 있었다.
“······새티스루카는 대체 어딜 간 거야?”
패가 별로 좋지 않은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남자가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새티스루카, 교단의 인퀴지터.
본래 이 작은 방에 앉아 포커를 치고 있던 남자.
그리고 방금 혼잣말을 흘린 남자는 새티스루카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자였다.
“일하는 중이겠지.”
새티스루카의 자리에서 보자면 오른쪽에 앉아있던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왼쪽의 남자는 기분이 나빠 보이는 남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가 딜러였다.
“히트.”
맞은편의 남자가 요청하자, 딜러인 남자가 카드 한 장을 더 넘겨주었다. 카드를 조심스럽게 까보던 맞은편의 남자는 낮은 신음성을 으르렁거리더니, 카드를 덮었다.
“가봐야겠군.”
“뭐? 갑자기 왜?”
갑작스런 맞은 편 남자의 말에 오른쪽 남자가 물었다.
“D-1 지역에 배치해둔 ‘가습기’가 망가졌어.”
“응? 가습기? 아아, 그 똥 뿌리개 말이야?”
“그런 불쾌한 별명으로 부르지 마. 어쨌든 가볼게.”
맞은편의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안도의 한숨 내쉰 거지?”
“아니야.”
“그럼 카드 까고 갈래?”
“아니.”
“까고 가는 게 원칙 아니야?”
“아니야.”
오른쪽의 남자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맞은편의 남자 미간의 주름이 한층 더 진해졌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둘의 표정을 힐끔거리던 왼쪽의 남자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D-1 지역이라면 새티스루카가 간 E-20지역 지척 아냐? 만나면 안부 전해줘.”
“그 놈 날 보면 도망칠걸. 따고서 도망친 놈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 가능성이 높겠어!”
오른쪽의 남자는 웃음소리를 섞은 채 끼어들었다. 그를 불쾌한 듯 쳐다보던 맞은편의 남자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곤 등을 돌렸다.
“간다.”
“으, 응! 다녀와!!”
왼쪽의 남자가 급하게 말했지만, 맞은편의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맞은편의 남자가 떠나자마자 오른쪽의 남자는 맞은편의 남자가 까지 않고 갔던 카드패를 까보았다.
카드의 합은 22였다.
망한 패였다.
*
드워프이터와의 싸움은 의외로 힘들었다.
원인은 명백했다. 내가 수련치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24밖에 안 되는 마력 가지고 드워프이터한테 매혹을 걸어보려고 온갖 수작을 다하다가, 결국 공격을 몇 대 허용하고 말았다.
“옷이 찢어졌잖아.”
뭐, 인벤토리에 같은 게 98장이나 더 있는 헌 옷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드워프이터 정도의 강적에게 초급 마법사 수준에 불과한 내 마법이 통할 리 없지만,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때렸더니 간신히 통했다. 딱 한 번 성공시킨 것 가지고는 랭크 업 수련치가 부족해서, 응급치료로 치료해주고 다시 스킬을 걸어댄 건 나와 드워프이터만 간직한 비밀이다.
그렇게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현혹 S랭크, 슬로우 S랭크, 마비 S랭크를 모두 달성했다.
얻은 경험치가 조금 부족해서 레벨 업을 못한 건 좀 아쉽지만, 당연히 얻어야 하는 보상인 퀘스트 보상, 그러니까 금화와 기여도도 얻었고 말이다.
“금화 2만개 달성!”
이 정도 금화면 내가 원하는 슈퍼레어 스킬 하나쯤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링링은 최소한 일만 개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내가 원하는 스킬은 가장 싼 스킬이 아니라 내게 유용한 스킬이니까 이 정도 금화는 쌓아놔야 한다.
그리고 비상시에 사용할 금화도 남겨놔야 되고.
새티스루카와 조우했을 때 부스터 앰플 살 금화 없었으면 지금 난 살아있지도 않을 테니까. 같은 일이 두 번 발생하면 안 되겠지만,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또 없으니 보험은 들어놔야 한다.
[드워프이터의 역린] – 분류 : 제작재료– 등급 : 전리품(Loot)
– 설명 : 드워프이터의 가슴 중앙에 난 가장 단단한 비늘.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늘이 드워프이터의 약점이다. 이 약점을 찔러서 드워프이터를 쓰러뜨렸다면 역린은 얻을 수 없다.
인벤토리에 이런 재료 아이템이 들어온 것도 한 가지 반길 만한 소식이었다. 팔아서 금화로 바꿔도 되고 장비를 제작해도 되고.
자, 그럼 쌓아놓은 금화와 이 역린으로 무엇을 할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도망가야지.”
필드 보스를 쓰러뜨리면 반드시 교단의 인퀴지터가 나타난다······, 는 법칙이 성립하기엔 아직 논거가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진짜로 나타나면 죽을 수도 있는데, 아무리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순 없다.
“얼른 여길 떠야겠어.”
[섬전신속]파슷!
드워프이터 공략에 체력과 마나를 잔뜩 쓰긴 했지만 레벨 업으로 다 회복되어, 섬전신속을 몇 번 쓰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파슷! 파슷!
타이밍 좋게 섬전신속의 재사용 대기시간 초기화 옵션이 연속으로 터졌다. 그럼 써야지. 안 쓸 이유가 없다.
파슷!
“······어라라?!”
네번째인가, 섬전신속을 썼던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야 했다. 왜냐하면 순간적으로 보인 광경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굉장한 도시였다. 거대한 바위를 파내서 만든 것 같은, 마치 화려한 부조 같은 건물들이 절벽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계곡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계곡으로도 섬세한 건축물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었다.
이렇게 화려하고 규모가 있는 도시임에도, 이제는 사람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버려진 도시, 유적일 것이다.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굳이 확인해볼 것도 없었다. 세 마리의 드워프이터가 건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긴 혀를 구멍마다 쉴 새 없이 밀어 넣고 있었으니까.
이 도시가 살아있는 도시라면 저 드워프이터와 맞서 싸웠겠지.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미 다 털어먹은 과자통의 부스러기를 핥아먹듯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저 혐오스러운 괴수들의 모습이 대신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수련치는 다 채웠는데 말이지.”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퀘스트] – 의뢰인 : 크리스티나– 종류 : 토벌
– 난이도 : 극도로 위험!
– 임무 내용 : 드워프의 천적, 드워프이터를 토벌하라!
– 보상 : 한 마리당 금화 1200개(+100%), 기여도 1200(+100%), 직업 경험치 1200(+100%)
= 아니, 왜 필드보스가 한 곳에 세 마리가 한꺼번에 몰려있죠?
레벨 업 마스터를 꺼내어 전원을 켜자마자, 크리스티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원래 네 마리였을 거야.”
한 마리는 먹을 것을 찾아 눈 토끼 고원을 향해 올라온 것일 뿐. 원래 이들 무리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하긴, 이 거대한 도시를 샅샅이 뒤져 철저히 ‘살균’하려면 한 마리로는 힘들 테니.”
자연스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만약 ‘교단’이 이것들을 배치했다는 가설을 믿는다면 말이다.
= 얼른 도망쳐요.
“그래야지.”
마음 같아선 다 잡고 가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된다. 드워프이터 세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나라도 힘들 뿐더러, 싸우는 도중 인퀴지터가 난입해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쳇······.”
역시 나는 아직 약하다. 조금만 더 강했다면 저 꿀 같은 사냥감들을 그냥 두고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 마리를 다 잡으면 경험치 3600. 레벨을 두 단계는 더 올릴 수 있는 대단한 보상이다.
“부스터 앰플 쿨타임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겠다.”
나는 다짐했다. 그 때가 되면 드워프이터 놈들을 한꺼번에 다 잡고 인퀴지터를 불러들여 그 놈까지 다 잡아내리라.
*
새티스루카의 맞은편에 앉았던 남자, 인퀴지터 프랑시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엉망이군.”
코드명 ‘가습기’, 스노우 오버로드가 모조리 파괴된 것도 모자라서, 살균 대상으로 지정된 설원 엘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원 엘프들 중 적합자가 나타나면 전도해두라고 파견해둔 전도사는 껍질이 홀랑 벗겨진 채 커다란 꼬챙이에 꿰여 고원의 찬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었고, 전도사의 요청으로 배치한 식인거미들도 간 곳 없었다.
“내 관리자로서의 커리어가 엉망이 됐어.”
그렇게 프랑시안이 허무하게 독백할 때였다.
나쁜 일은 항상 겹쳐서 일어난다고 누가 말했던가. 그 말을 믿은 적은 없으나,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이 믿어야 할 것 같았다.
메시지가 날아왔다. 믿기 힘든, 그리고 믿고 싶지 않은 메시지가.
“D-3 지역의 살균병기가 망가졌다고?”
프랑시안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편두통을 느낀 것도 잠시. 프랑시안은 빛의 날개를 펼쳤다.
“어떤 놈 짓인지 걸리기만 해봐라.”
그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살짝 흩날리는 빛의 입자가 방금 전에 여기에 어떤 신성한 존재가 거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곧 없어졌다.
*
프랑시안이 공간이동을 감행한 장소는 이미 파괴된 살균병기가 위치한 곳이 아니었다. 아직 살아남아있는 살균병기들이 위치한 곳이었다.
일각에서는 드워프이터라 불리는 살균병기 셋은 건재했다. 열심히 구멍 안에 혀를 집어넣으며 자기 일을 수행하느라 바빴다.
“흐음······.”
프랑시안은 상공에 머문 채 턱을 만졌다.
“하나는 부쉈지만 남은 셋은 남아있다, 라······. 하나를 상대하는 건 손쉽지만 셋은 부담스러웠던 걸까?”
수염 하나 없이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프랑시안은 미간의 주름을 한층 더 진하게 했다.
“그렇다면 만마전의 악마 놈들 짓이 아니란 뜻인데.”
그의 뇌리에 떠올랐던 어떤 가설 하나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애초에 악마라면 이렇게 조용히 다니지도 않는다. 적극적으로 돌아다니며 파괴를 일삼을 것이다. 숨어있지도 않을 테고, 교단의 인퀴지터인 프랑시안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달려들어야 정상이다.
“악마도 아니면 대체 어떤 놈 짓이지?”
악마가 한 짓이 아니라면, 다음 가설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설원 엘프 중에 적합자가 나타나 각성했다. 전도사가 그의 회유에 실패했고, 적합자는 스노우 오버로드와 드워프이터, 식인거미를 모조리 처치하고 일족을 거느리고 E-20 지역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가설이지만, 남은 가설은 그것 밖에 없었다.
“아니면 지금 와서 갑자기 튜토리얼에서 플레이어가 튀어나와 다 정리했다는 가설 밖에 안 남으니까.”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됐다. 세상의 모든 튜토리얼은 이제 기능하지 않으니까. 설령 튜토리얼에서 플레이어 졸업자가 튀어나왔다고 해도, 갓 졸업한 플레이어는 식인거미 한 마리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다.
“······E-20 지역에 가봐야겠군.”
지금으로썬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새티스루카 놈도 찾아보고.”
프랑시안은 포커 치다 도망간 동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도 망한 블랙잭 패를 버려두고 도망 왔으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세상에는 한 가지 진리가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새티스루카를 찾으면 실컷 비난하면서 스트레스를 좀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프랑시안은 다시금 공간이동을 감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