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46
046
————– 46/169 ————–
“그래, 결심했어.”
나는 결심했다. 결심하는 데는 오래 걸렸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안이란 건 다른 게 아니라 [힘의 말 : 죽어라!]를 비롯한 저주 계열 스킬군의 승화 여부였다.
“유니크 스킬을 승화시켰는데 신화 스킬을 얻은 것도 운이 좋은 거였지.”
설마 신화급보다도 더 높은 급의 스킬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아무리 스킬 다섯 개를 합쳐 승화시켰다지만 두 단계나 더 높은 급수의 스킬이 나오는 건 굉장히 운이 좋은 케이스일 터였다. 보통이라면 레전드급이 나오는 게 맞으리라.
설령 신화급 스킬을 얻더라도 미약한 신성을 얻은 지금이라면 최소한 사용할 권한은 받을 수 있을 테니 이득이라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니다.
더욱이 [뇌신의 징벌]이 보여준 위력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망설일 수 없게 만들었다.
결정은 내렸으니 취할 행동이 명확해졌다.
연맹 지휘관으로서 새로 얻은 권한으로, 나는 상점에서 레어 스킬 강화권 5매를 구입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전까지는 구매가 불가능했던 상품이었다. 개당 금화 천 개씩이나 했으나, 25% 할인을 끼면 못 살 것도 없는 가격이었다.
그렇게 얻은 강화권으로 레어 스킬인 [정지] 주문을 강화하고, 마지막 남은 주사위들을 이용해 행운 작업까지 한 후 나는 [스킬 승화] 창을 띄웠다.
– 동일 계열 스킬을 5개 이상 소유하고 있습니다.
– [힘의 말 : 죽어라!], [현혹], [정지], [마비 마안], [슬로우]
– 스킬 승화가 가능합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나는 YES를 선택했다.
– 스킬 승화에는 스킬 포인트 299가 필요합니다.
– 스킬 승화를 승인하시겠습니까?
“승······, 인!”
이미 결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승화를 승인하는 데는 심력이 필요했다. 뭐, 결국 눌렀지만 말이다.
– 스킬 승화를 실행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 사실 별로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결과는 바로 나왔다.
[기아스 Geis] +6– 등급 : 신화(Myth)
– 숙련도 : EX랭크
– 효과 : 명령을 내려 따르게 합니다. 이 스킬은 신성이 높을수록 강화됩니다.
“또 신화급 스킬이 나왔네?”
[숨겨진 옵션]이 주르륵 달려 나왔고, 그게 하나도 공개되지 않았으며, 다른 설명도 없는 것까지 똑같았다. 하지만 별로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기아스].이 유명한 스킬이 어느 ‘신화’에서 유래해 신화급 스킬이 되었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중학생 때 이런 걸 파던 때가 있었으니까. 켈트 신화의 영웅들이 이 [기아스]에 걸려 족족 죽어나가던 장면은 비극적이었지만 내게 큰 인상을 주었다.
그런 [기아스]를 걸리는 입장이 아니라 거는 입장이 되어 스킬이라는 형태로 받게 되다니.
“역시 난 운이 좋군.”
웃음이 절로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자, 그럼 슬슬 전투준비를 해봐야겠군.”
나는 이제부터 버프를 걸고 이 지역의 필드 보스를 찾아가 뵐 생각이다.
필드 보스에게 이 쿨도 길고 신성 소모량도 아마도 높을 스킬을 쓸 생각은 당연히 없다. 나는 필드 보스를 처치하고 나오는 인퀴지터를 상대로 이 [기아스]를 실험해 볼 생각이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인퀴지터라도 신화급 스킬은 먹히겠지? 만약 진짜 먹힌다면 대박이다. 인퀴지터라는 나보다 두 수는 높은 존재를 부려먹을 수 있게 되니까.
뭐, 고작 ‘미약한 신성’ 가지고 그런 게 가능하리라는 기대는 품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어디 가능한 꿈만 꾸던가?
원래 꿈은 크게 꾸는 거다.
***
작은 방.
베르지에르, 아샨타. 두 인퀴지터는 테이블을 사이에 끼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트럼프 카드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지만, 둘 다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뭐 다른 걸 하는 건 아니었다.
베르지에르는 심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고, 아샨타는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건 아샨타쪽이었다.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 침묵이 이어진지 벌써 몇 시간씩이나 지났으니까.
아샨타가 이단 발생의 이슈를 가져오고, 그 뒤로 베르지에르는 아무 말도 대답도 하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길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샨타도 몰랐다. 그런 걸 세고 있을 정신머리는 없었다. 그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베르지에르의 맞은편에 앉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다. 아샨타가 먼저 그렇게 마음을 먹었기에, 그가 먼저 입을 열게 된 것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해야 돼, 베르지에르.”
“어떻게든?”
날카로운 대답이 베르지에르로부터 돌아왔다.
“어떻게도 안 돼.”
아샨타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 답은 하나였다.
관리자로서의 임무를 방기하고 도망치는 것.
그런데 둘 모두 상대가 먼저 이 말을 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 그렇다. 그 말을 뱉는 것 자체가 죄고, 약점이 되니까. 이 작은 방의 네 관리자는 친구이기 이전에 라이벌이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베르지에르는 아샨타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아샨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쉽게 상처 부위를 드러낼 수 있을 리 없다.
물어뜯길 테니까.
이미 자신의 관리영역에 트러블이 일어났기에, 아샨타는 자신이 더 불리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는 섣불리 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샨타는 몰랐지만, 사실은 베르지에르의 상처가 더 컸다.
베르지에르는 그 성격으로만 보면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이 작은 방의 리더였다. 성격에 결함이 있을 뿐, 가장 평가가 높고 능력도 뛰어났다. 그렇기에 방충망이 설치된 B지역의 관리자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이 관리소가 관할하는 지역에 이단이 발생한 것에는 베르지에르의 책임도 있었다. 그가 다른 세 관리자를 제대로 이끌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물론 그 이전에 신이 직접 만든 방충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보다 직접적인 약점이 존재했지만, 아샨타가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샨타.”
그렇기에 아샨타는 의외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죄인이다.”
베르지에르가 먼저 그 말을 꺼냈다는 것을.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통상적으로 성장해서야 이 인퀴지터라는 자리에 앉을 수 있을 리 없지. 하지만 우리는 라이벌들을 죽이고 성장한 덕에 교단에 마련된 마지막 의자에 앉을 수 있었어.”
아샨타도 잘 아는 사실을 베르지에르가 새삼 다시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샨타는 대충 짐작했다. 그래서 그의 입을 막지도, 끼어들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쌓인 네가티브 카르마는 어쩔 수 없었고, 그 카르마를 갚기 위해 이 관리소에 배치되었다.”
베르지에르의 말대로였다. 아샨타와 새티스루카, 프랑시안을 비롯한 네가티브 카르마를 잔뜩 쌓은 인퀴지터들은 네가티브 카르마를 다 녹일 때까지는 이 변경을 떠날 수 없다. 관리자라는 칭호는 허울 좋은 감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정말 잘 알고 있었다.
이 작은 방에 유폐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카드게임이나 하고 있었던 건 그들이 실제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죄인인 우린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면 안 돼. 애써 마련한······,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마련한 의자마저 빼앗길지 모르니까!”
탕!
베르지에르는 새티스루카가 앉아 있던 의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아샨타는 움찔 놀랐다. 소리에 놀란 탓이 아니다. 베르지에르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베르지에르. 어쩌라는 거야?”
뒤늦게 당당함을 되찾아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샨타는 되도록 강한 어투로 스스로를 가장했다. 그러나 베르지에르는 그런 아샨타의 반항 아닌 반항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여전히 갓 벼려낸 칼끝 같은 시선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놈들을 죽여.”
“뭐?!”
“이단 놈들을 쓸어버려.”
아무리 그래도 베르지에르의 말은 도가 지나쳤다. 아샨타로서도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랬다간 네가티브 카르마가 더 쌓이잖아!”
안 그래도 아샨타는 높은 수치의 네가티브 카르마를 쌓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네가티브 카르마를 더 쌓았다간 평생을 이 아무것도 없는 변경에서 썩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베르지에르의 이어진 말은 아샨타의 입을 다물어지게 했다.
“그럼 파문이라도 당하고 싶은 거야?”
파문.
그 두 글자에 아샨타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우린 이미 교단 소속이야. 그런데 파문을 당해봐. 어떻게 되는지 알아? 모르지 않겠지만 다시 한번 설명해주지. 시스템을 빼앗기고, 레벨을 빼앗기고, 스킬을 빼앗기고······.”
“그만해.”
아샨타의 눈동자에도 서늘한 예기가 깃들었다. 그러나 베르지에르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모습을 연기했다.
“역시 잘 아는군. 그렇다면······.”
“하지만 베르지에르. 나 혼자 모든 걸 뒤집어쓰는 건 사양이야.”
아샨타의 선언에 베르지에르는 순간적으로 이를 드러냈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알았어. 이단 사냥에는 나도 참여하지.”
그런 베르지에르의 반응에 아샨타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하긴 사안이 사안이지.’
아샨타는 그렇게 납득했지만, 사실 납득해서는 안 됐다.
거기서 납득해 버렸기에, 아샨타는 베르지에르의 은밀한 속내를 알아챌 수 없었으니까
***
딱히 필드 보스를 찾아 모르는 지역을 헤맬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 지역의 필드 보스가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흡혈 나무들을 베어내다가 발견한 거대한 나무. 그 나무가 필드 보스란 건 이미 퀘스트를 받아 알고 있었다.
[퀘스트] – 의뢰인 : 크리스티나– 종류 : 토벌
– 난이도 : 매우 위험!
– 임무 내용 : 숲의 폭군 흡혈 나무 군주를 처치하라!
– 보상 : 금화 2000개(+100%), 기여도 2000(+100%), 직업 경험치 2000(+100%)
사실은 퀘스트를 받기 전에도 직감했다. 그 흡혈 나무 군주를 보자마자 알아챘다. 이 침엽수림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 거대한 존재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주변에 흩뿌리고 있었으니까.
세계수.
내가 보자마자 떠올린 단어가 그것일 정도였다. 실상은 세계수가 아니라 주변의 생명체들 전부의 피와 기운을 빨아들여 자신의 몸체만을 거대하게 키운 이기적인 괴물이었지만, 어쨌든 외견만 보자면 그랬다.
흡혈 나무 군주를 보자마자 처치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원하는 적절한 시기에 인퀴지터를 불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적절한 시기였다.
침엽수림의 흡혈 나무는 대부분 처치했고, 이 지역의 인류 종족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 손 털고 나갈 시기지. 그렇다고 메인 디쉬도 안 먹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슬슬 인퀴지터 쪽을 메인 디쉬라고 여겨도 되겠지?”
링링으로부터 능력치 부스터 앰플도 미리 구매해 놨고, 진리활화와 진리불사도 쿨이 다 돌았다. 신화급 스킬도 새로 두 개나 배웠다. 지난번에 나대지 않기로 마음을 다져먹긴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인퀴지터를 피해 다닐 필요도 없는 상황이다.
“한 놈 상대로는 확실하게 이길 수 있어.”
그런 자신감이 붙었으니까.
“그럼 그 전에 에피타이저를 맛볼까?”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짜잔! 그랜드 마스터 셰프의 5성 요리 시식권!!”
버프 타임이다!
입안에 침이 절로 고인다. 나라고 맛있는 걸 싫어할 리 없다. 그럼에도 상점의 고급 요리를 맛보지 않는 건 그저 금화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먹어야 할 이유가 있고, 먹을 필요가 있다. 그러니 먹는다.
먹을 수 있다!
“맛봐주마, 인류 연맹 최고위 요리사의 실력이라는 것을!”
나는 시식권을 사용했다. 그러자 바로 내 앞에 테이블이 펼쳐지더니, 음식들이 좌르르륵 나타나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갓 요리한 음식들에선 아직도 김이 펄펄 피어오르고 있으며, 정말 맛좋은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