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48
048
————– 48/169 ————–
작은 방에서 나온 두 인퀴지터, 아샨타와 베르지에르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바로 E-20지역, 그러니까 이단이 발생한 곳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두 남자가 도착한 곳은 E-20지역이 아니었을 뿐더러, E지역조차 아니었다. 그곳은 C지역. 즉, 베르지에르의 영역이었다.
포탈을 연 것은 베르지에르다. 그러니 아샨타는 베르지에르에게 물었다.
“베르지에르. 여기는······.”
E지역이 아닌데? 라고 끝까지 말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아샨타는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곧장 직감에 따랐다.
[자동회피 (Auto Dodge)] – 등급 : 희귀(Rare)– 숙련도 : A랭크
– 효과 : 적의 공격을 자동적으로 피한다. [자동회피]는 고작 레어 스킬에 불과하지만, 아샨타는 이 스킬을 배운 것을 후회한 적이 지금까지도 없다. 스킬 포인트를 낭비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방금도 회피 스킬 덕에 목숨을 건졌으니, 이 스킬의 유용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무려 인퀴지터의 스킬을 무의식적으로 피해 버릴 정도였으니까.
인퀴지터 베르지에르의 공격을.
파슷!
빗나간 빔이 아샨타의 뒤쪽으로 날아가 언덕 하나를 소리 없이 소멸시켰다.
베르지에르가 쏜 빔이었다. 만약 피하지 못하고 직격 당했다면 아무리 아샨타라 하더라도 즉사를 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본래 아군이자 동료일 터인 베르지에르에게 공격당했다는 것을 회피한 후에나 깨달았음에도, 아샨타는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배신당했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아샨타의 뇌는 생각이나 감정 따위에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곧장 그를 전투 모드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러한 뇌의 판단은 당연히 옳았다.
[긴급탈출 (Chicken Switch)] – 등급 : 희귀(Rare)– 숙련도 : A랭크
– 효과 : 적으로 지정한 대상으로부터 1km 거리를 둔다.
피슝!
아샨타의 몸이 곧장 뒤로 1km나 날았다. 아니, 날았다는 표현은 조금 적절치 않다. 그것은 차라리 순간 이동에 가까웠으니.
“치잇! 더러운 혼혈 놈이!!”
허를 찔린 베르지에르가 욕설을 퍼부으며 아샨타를 뒤따라왔다.
아샨타의 특기가 이것이다.
특정 직업의 플레이어가 지닌 스킬은 빤하다. 직업을 알고 있는 상대에게는 자신의 수를 읽히기 쉽지만, 아샨타는 그 경우에 포함되지 않는다.
등급이 좀 낮더라도 유용한 스킬을 찾아내 얻어두면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낮은 등급의 스킬은 랭크 업에 필요한 포인트가 적다 보니 여러 스킬을 동시에 높은 랭크로 만들어 유지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샨타의 스킬 셋은 상대의 예상을 불허하고 허를 찌르는데 능했다.
단순 전력으로 보자면 분명 약하다. 등급이 낮은 스킬은 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대가 플레이어라면 다르다. 상대의 허를 찔러 기습하거나 빈틈을 보아 암습하는 방식으로, 일단 한 번 적으로 규정한 상대는 다 죽였다.
아샨타가 교단의 인퀴지터에 이른 비결이 이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아샨타의 입장에서 볼 때, 상대가 먼저 자신에게 달려든 경우는 그다지 없었고, 그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실력인 경우는 더욱 희귀했으므로.
아샨타로서도 의표를 찔린 셈이다.
당연하지만 도망만 다닌다고 싸움에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망을 치는 데도 체력이든 마력이든 스킬 쿨이든 뭐든 소모하게 마련이고, 그럴수록 반격과 공격에 쓸 자원도 줄어드는 셈이니까.
그렇다고 아샨타가 대책 없이 도망만 치는 것은 아니었다.
‘B지역으로 가야 해,’
아샨타의 뇌는 다른 생각을 하기보다 먼저 판단했다.
‘살균 병기가 약하긴 하지만, 비슷한 실력의 적을 상대할 때는 변수 하나라도 더 가지고 있는 게 도움이 될 테니.’
아샨타도 관리자다. 자기가 관리하는 지역에 배치된 살균 병기에 대한 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병기가 그의 소유물인 건 아니기에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릴 순 없었지만, 관리자로서 병기의 특성과 장단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충분히 변수로써 활용할 수 있다.
베르지에르가 왜, 어째서,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지?
아샨타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다. 베르지에르는 그에게 있어 이미 적이었고, 그러므로 살해해야 했다.
아샨타의 뇌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한편, 베르지에르는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아샨타와는 적이 되지 않는 편이 좋아.’
프랑시안이 남긴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프랑시안은 베르지에르의 형 같은 존재였고, 베르지에르도 그를 따랐다. 사실 베르지에르에게 있어 프랑시안은 다소 어려운 상대였다.
‘그놈은 전투에 돌입하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거든.’
그러나 아무리 프랑시안의 말이더라도, 그 소릴 진지하게 믿을 수는 없었다. 베르지에르에게 있어서 아샨타는 더러운 혼혈이자 잡종, 짓밟고 무시해야 마땅한 존재였으니.
물론 프랑시안이나 새티스루카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았지만, 마치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개가 자신보다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그러듯 베르지에르는 아샨타를 하찮게 여기고 가혹하게 상대했다.
지금에 와서 그런 옛날 일을 떠올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치잇!”
베르지에르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쉽게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판단이 빠르고 행동이 단호하다.
‘원자분해 광선을 피하다니!’
[원자분해 광선(Disintegrate Beam)]은 베르지에르가 시전 시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 중 하나였다. 빠른 발동 덕에 그야말로 기습에 가장 적절한 스킬로, 이 스킬 하나만으로 그는 수없이 많은 플레이어를 소멸시켜왔다.이 스킬을 피하고 반격을 해온 적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들 중에 강적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아샨타가 손가락 하나를 접게 만들었다.
어쩌면 놈을 처치하는 건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베르지에르 쪽이었다. 빨리 죽이고, 빨리 도망가서, 빨리 만마전에 투항해야 했다. 파문당한 인퀴지터를 반길 만마전이 아니었다.
파문당하면 교단 덕에 얻은 모든 직업 레벨과 스킬을 잃게 되니까.
인퀴지터 식으로 말하자면 벌레가 된다.
‘하급 악마의 간식거리가 되는 게 고작이겠지.’
그러니 교단에서 자신의 배신을 알아채고 파문하기 전에 빨리 행동해야 하는데, 아샨타가 저렇게 도망 다니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차라리 반격이라도 해오면 빈틈을 찾아 찌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그렇다고 이미 손을 쓴 이상 아샨타를 두고 그냥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놈에게 상부에 보고할 시간을 주면 그걸로 끝이니까. 만마전과 교섭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다.
‘다음 일격으로 놈을 반드시 죽이겠다!’
[터보제트 (Turbojet)] – 등급 : 고유(Unique)– 숙련도 : A랭크
– 효과 : 마력을 고속 분사해 추진력을 얻는다.
베르지에르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고유 스킬의 힘이 그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마력이 스킬에 의해 변환되어, 추진력으로 바뀌었다.
피융!
곧바로 그의 몸이 고속으로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
그어어어어.
마치 입처럼 보이는 커다란 옹이구멍으로 단말마를 토해내며, 흡혈 나무 군주가 쓰러졌다.
흡혈 나무 군주를 처치함으로써, 나는 전리품으로 [최고급 흡혈 나무 수액]과 [훌륭한 흡혈 나무 열매] 몇 개를 손에 넣었다. 둘 다 최고급 요리 재료로, 그냥 먹을 수도 있지만 조리를 거쳐 더 훌륭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링링을 통해 적당한 요리사를 수배해 조리를 부탁했다. 링링의 말에 의하면 두 전리품 모두 꽤 비싸게 팔리는 모양이지만, 내겐 금화보다 경험치가 더 중요했다. 새로운 특성인 [미식의 길]을 얻어 요리를 경험치로 전환할 수단이 생겼으니 파는 것보단 먹는 게 낫다.
흡혈 나무 군주로부터 얻은 것은 이게 전부는 아니다.
– 숙련도 : 연습 랭크
– 효과 : 뿌리로 매우 세게 때린다.
[주의!] 선행 스킬 [뿌리 움직이기] 필요
흡혈 나무 군주로부터 스킬을 하나 뜯어내긴 했다. 그것도 무려 슈퍼레어 스킬을.
그러나 등급만 높을 뿐, 내게 쓸모 있는 스킬은 아니다. 내겐 뿌리가 없고, 뿌리 움직이기 스킬도 없으니까.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랬어야 했다.
– 동일 계열 스킬을 3개 이상 소유하고 있습니다.
– [초절강타], [뿌리 초강타], [뿌리 강타]
– 스킬 융합이 가능합니다. 융합하시겠습니까?
[주의!] 융합에 사용한 스킬은 다시 얻을 수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초절강타]와 흡혈 나무로부터 미리 얻어둔 레어 스킬, [뿌리 강타]가 없었다면 말이다.
“융합 재료로는 매우 쓸모 있지.”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이 스킬들을 융합시킬 생각은 없었다. 레어 스킬 교환권을 이용해 강타 계열 스킬을 하나 더 구해 초융합을 시켜도 되고, 더 나중을 바라봐도 되니까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이런 걸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지역의 필드 보스인 흡혈 나무 군주를 죽였으니, 곧 인퀴지터가 찾아올 것이다.
“손님맞이 준비를 해야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미리 능력치 부스터 앰플을 꺼내들고 언제든 진리활화를 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채 인퀴지터를 기다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와? 올 때가 다 됐는데.”
중국집 배달을 기다리는 굶주린 주문자의 심정으로,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유성을 발견했다.
“오.”
나는 이빨을 드러내어 보이며 웃었다.
“왜 늦나 했더니, 곱빼기 서비스라 그랬군.”
두 개의 유성은 사실 별빛의 궤적이 아니었다. 둘 모두 물리법칙을 무시하며 불규칙적으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저런 유성이 있겠는가? 아니, 없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건 내가 아는 한 하나밖에 없었다.
스킬, 그리고 스킬을 사용하는 플레이어.
둘 다 그냥 선량한 플레이어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교단의 영역에서 빛의 날개를 펴고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아하니 적어도 교단 소속일 건 확실했다.
그리고 매우 높은 확률로 둘 다 인퀴지터다.
사실은 인퀴지터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피해야 한다. 아무리 내가 강해졌다고는 해도, 인퀴지터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까지 손에 넣은 건 아니니까.
그러나 내가 곱빼기라 한 이유는 따로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두 인퀴지터는 서로 싸우고 있었다.
“2:1이라면 힘들었겠지만 1:1:1은 좀 낫지.”
나는 두 인퀴지터의 대립을 침엽수림에서 숨죽여 지켜보았다. 당장 끼어들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서로 대립하느라 힘이 빠지길 기다리는 것도 있지만, 먼저 누굴 치느냐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방어력이 약한 쪽을 기습해 단번에 무력화시키면서 끼어드는 상황이 내게 가장 유리할 터였다. 가능하다면 막타를 내가 치는 게 더 좋을 거고.
굳이 오래 지켜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답은 금방 나왔으니까.
‘한 놈은 내 난입을 기다리고 있군.’
다른 한 놈은 조급하게 공격을 퍼붓고 있고.
이 지역의 관리자인 인퀴지터는 누군가가 필드 보스, 저들의 표현으로는 살균 병기를 파괴했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사례를 들어보자. 필드 보스가 파괴되었을 때마다 인퀴지터가 찾아왔다. 어떤 방법으로든 필드 보스의 파괴에 알람 같은 것이 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리란 건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 알람을 받은 인퀴지터는 필드 보스가 위치한 이 지역에 교단의 적, 즉 내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으리란 명제도 똑같이 도출해 낼 수 있다.
인퀴지터 쪽도 바보는 아니다. 교단의 적이 인퀴지터인 자신을 기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저쪽도 냈으리라.
그렇게 결론을 냈으니 저렇게 내 난입을 대비하고 있는 것일 터.
즉, 지금 방어를 굳히고 있는 쪽이 확실하게 이 지역의 관리자이자 인퀴지터다.
그렇다고 지금 공세를 퍼붓고 있는 쪽이 인퀴지터가 아니라는 억측을 내놓는 건 위험하다. 저 외견은 누가 봐도 인퀴지터니까.
물론 겉모습만 보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것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지만.
“적의 적이 항상 아군인 건 아니지.”
전술적으로는 공세를 퍼붓고 있는 쪽을 기습해 확실히 무력화시키는 게 옳은데, 그렇게 하면 이 지역의 관리자인 게 확실한 인퀴지터 편을 드는 셈이 되니 판단이 어렵다.
“아, 내가 왜 내 머리로 생각을 하고 있지?”
끙끙거리던 나는 곧 답을 찾았다.
“좋은 직감 놔두고?”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능력치 부스터 앰플을 허벅지에 콱 꽂았다.
“역시 이럴 땐 직감에 맡기는 게 제격이지!”
부스터로 인해 두 배가 된 직감이라면 날 분명 정답으로 인도해 줄 거다.
“생각하지 마라······, 느껴라!!”
나는 내 직감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