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53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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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를 신경 쓸 것은 없네. 자네는 온전히 이 방으로 옮겨졌으니. 돌아갈 때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될 테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동안 자네는 안전할 걸세.”
노인의 목소리는 무겁지도 않았고 가볍지도 않아 적당했다.
“자, 앉게나.”
노인의 말에 따라, 나는 내 앞에 놓인 철제 의자에 앉았다.
“여긴 어딥니까?”
인사까지도 생략하고 불쑥 내민 내 물음에도, 노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카르마 마켓일세. 처음 말했듯.”
내 질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으나, 노인이 대답한 의도는 대충 읽혔다. 그 외의 정보를 내게 알려줄 마음은 없는 거겠지.
그래서 나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대신 다른 걸 묻기로 했다.
“여기선 뭘 팝니까?”
“매우 좋은 질문이로군. 첫 질문과 달리.”
노인의 태도와 목소리에는 여유가 느껴졌다.
“보통 처형자는 쫓기게 마련이지. 아무리 악인을 처형했다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건 그만한 리스크가 쫓아오는 법이니. 그러니 이 카르마 마켓에서는 그러한 처형자에게 필요할 법한 물건을 파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건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을 마치고, 잠시 생각하던 노인은 한쪽 눈썹만을 찡그렸다.
“자네는 이곳에 오는 것이 처음이니, 많은 것을 얻어갈 수는 없을게야. 카르마를 많이 갖진 않았을 테니. 그러나 내가 지금 자네에게 보여주는 건 아마도 당장 필요한 물건일 걸세.”
노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검은 테이블 위에 백금빛으로 반짝이는 코인 한 개가 나타났다.
“이게 뭐죠?”
“[1UP 코인]일세. 인벤토리에 넣어둔 상태로 자네가 사망을 맞이하면 10초 뒤에 자네를 부활시켜줄 걸세.”
노인이 말했던 대로, 확실히 내게 필요했던 물건이었다. 세상에 부활 코인이라니! 스킬도 아니고 그냥 아이템인데, 그것도 인벤토리에 넣고만 있어도 되살려준다고?
이건 사야해!
그것도 많이, 잔뜩!
“얼마죠?”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까지 묻자, 노인은 푸근히 웃으며 답했다.
“하나는 그냥 갖게. 자네가 살 수 있는 가격은 아니니. 세상의 악당을 세 명 줄여준 보답이라 생각하게나. 뭐, 이번만의 서비스일세.”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1UP 코인]을 집어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부활 수단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니 안심도 되고 든든했지만, 난 아직 만족 못했다.
“그래서, 얼마죠?”
아무리 비싸더라도 설마 5,000 카르마를 넘을까 싶어, 나는 다소 끈질기게 보일 것을 감수하면서 다시 물었다.
“욕심이 있는 친구로군. 그래, 목표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 끈질긴 질문에 노인은 왼쪽 눈썹을 찡그리더니, 잠깐 텀을 두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100카르마일세. 물론 포지티브로.”
“100······, 카르마? ······라고요?!”
싸잖아!
“1,000명을 살해한 살인마를 죽여야 얻을 수 있는 카르마지. 행운이 따라도 얻을 수 없는 카르마일세. 오히려 1천 명의 사람들이 불운한 죽음을 맞아야 다른 누군가가 그 카르마를 얻게 된다는 의미에서는 다른 이들의 불운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군.”
내가 놀라고 있는 사이에도 노인은 뭐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겐 잘 들리지 않았다. 추가 목숨이 고작 100카르마?
나는 다시 상태창을 열어 내 카르마 양을 확인했다.
– 이진혁 님의 총 포지티브 카르마 : 7,504점.
“후, 후후후후.”
나는 소릴 내어 웃고 말았다. 내 웃음소릴 들은 노인은 측은한 듯 날 바라보며 말했다.
“저런. 너무 비싼 가격에 넋을 잃은 모양이군. 1UP 코인을 더 살 생각은 말고 지금의 목숨을 소중히 하게나.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지.”
“주세요.”
“뭐?”
노인이 눈을 끔벅이며 되물었다.
“50개.”
75개를 사도 좋겠지만, 혹시 마켓에 다른 상품이 있을지도 모르니 50개로 아꼈다. 추가 목숨이 51개라면 어지간해선 다 쓸 일이 없을 것이란 계산도 서 있었고.
“뭐, 뭘?”
좀 답답하군. 그러나 나는 인내심을 갖고 대꾸해 주었다.
“[1UP 코인]이요.”
빛으로 가득 찬 작은 방에, 잠시 침묵이 떠다녔다.
드르륵.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게 허리를 굽혔다.
깊숙하게.
“죄송합니다, 고객님. 당 마켓에는 그만한 재고가 없습니다.”
동전을 뒤집은 것 같이 판이하게 달라진 태도였다.
***
결국 내가 카르마 마켓에서 얻을 수 있었던 [1UP 코인]은 세 개뿐이었다.
하나는 공짜로 받은 거니 실제로 카르마를 지불하고 산 건 두 개뿐. 다시 말해, 카르마 마켓의 재고가 그것뿐이었다는 소리다.
별로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여벌 목숨이 세 개 더 생겼다고는 하지만, 50개보다는 많이 적으니까.
“세상의 거악을 처치해 주신 처형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코인 두 개를 내어주면서, 노인은 다시 한번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태도가 너무 바뀌어서 적응이 안 된다. 그보다 이 노인, 지나치게 속물적인 게 아닐까? 내게 카르마가 잔뜩 있다는 걸 알자마자 이렇게 태도를 바꾸다니.
“다른 물건들을 보여줘요.”
그렇다 보니 내 태도가 좀 심드렁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런 내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기껍게 말했다.
“물론이죠, 고객님. 자, 여길 보시죠.”
검은색 테이블 위에 세 장의 종이가 차례차례 펼쳐졌다.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이 이름 변경권, 중앙에 있는 것이 종족 변경권, 오른쪽에 있는 것이 성별 변경권입니다. 이름을 바꾸고, 종족을 바꾸고, 성별까지 바꾸면 추적자는 절대 고객님의 정체를 깨닫지 못할 겁니다. 시스템상에서 변경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추적용 스킬로부터도 안전해지죠.”
이름이나 성별을 바꿀 생각은 없다. 몇 백 년이나 이진혁이라는 남자로 살아왔는데, 지금 와서 그걸 바꾸면 위화감이 엄청날 테니까.
하지만 종족 변경에는 조금 관심이 간다. 인간보다 더 강력한 종족, 예를 들어 드래곤 같은 것으로 변경하면 당장의 전력 상승에 도움이 될 테니까.
“종족 변경권은 얼마죠?”
“1,000 카르마입니다.”
목숨 하나보다 비싸다니! 설마 목숨보다 비싸겠냐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봤는데, 내 예상보다 20배는 더 비싼 가격이다.
“하지만 고객님, 추적자를 피해 신원을 바꾸는 것은 이름부터 바꾸실 것을 권해 드리고 싶군요. 가장 효과적이거든요.”
“아뇨, 종족을 바꾸면 더 강해질까 싶어서요.”
나는 무심코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노인이 갑자기 침묵했다. 왜 이러지?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지구인 아니십니까?”
지구인.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내 몸이 굳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애쓰며 곧장 대답했다.
“맞아요.”
내 내면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신중한 목소리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종족 변경권을 쓰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쓰지 않는 편이 낫다고? 그건 의아한 조언이었다.
인퀴지터들 보면 빛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는데. 나는 하늘을 날려면 스킬을 써야하지만, 걔네들은 그냥 스킬도 안 쓰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속도도 상당히 빨랐다.
나는 그게 그들이 ‘천사’라는 종족이라서 그런 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슬쩍 새티스루카의 상태창을 일부나마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는데, 걔 종족이 천사였으니까.
그래서 나도 천사 같은 걸로, 아니면 더 좋은 종족이 있으면 그걸로 변경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거보다 인간, 그러니까 지구인이 더 낫다고?
“왜죠?”
너무 의아해서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욱 의아하게도, 노인은 내 되물음에 다소 당황한 듯 눈을 두 번 깜박인 다음에야 다시 입을 열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어······, 고객님. 괜찮으시다면 상태창의 종족 정보를 열람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공개로요.”
뭐가 있나 싶어서, 나는 잠깐 고민하다 노인이 원하는 대로 했다. 상태창을 열고, 종족 정보만 공개로 돌렸다.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 보통 타인에게 상태창을 보이는 건 금기에 가깝지만, 이 정도야 뭐 별 거 아니다.
이름 : 이진혁
종족 : 인간
세부 정보 : 인간 – 지구인.
등급 : 일반(Common)
종족 특성 : 특별히 없음.
특별히 뭐가 없으니까.
“오, 이런!”
그런데 노인은 내 상태 창을 보더니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릴 내질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고객님의 종족 정보가 갱신되지 않은지 오래됐군요.”
노인은 테이블 위에 띄워놓은 종족 정보창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정보창의 내용이 슥슥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뜰 차례였다.
이름 : 이진혁
종족 : 인간
세부 정보 : 인간 – 지구인.
등급 : 전설적 유일(Legendary Unique)
종족 특성 :
– 모든 인류의 뿌리 : 모든 인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음.
– 가장 원초에 가까운 인류 : 직감 능력치의 효율이 100% 상승
– 지구인의 습득력 :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절반
“지금 고객님께선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지구인입니다. 보이시죠? 전설적 유일. 이러한 메리트를 포기하시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닐 성 싶습니다. ······고객님?”
노인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키워드 몇 개는 들렸다.
단 한 명뿐.
전설적 유일.
“······하하.”
이상한 데서 이상한 걸 알게 되는군. 아니, 이제까지 적극적으로 모르려 들었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알게 되는 걸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유일이라는 말의 뜻이 가리키는 바는 대단히 심플하다.
뭐, 그렇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지구는 멸망했고, 살아남은 지구인은 나뿐인 건가······.”
나는 처참한 기분으로 독백했다.
“그건 좀 섣부른 판단 아닐까요?”
그런데 노인이 끼어들어 이상한 질문을 했다.
“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아니, 제가 마지막 지구인이라면서요?”
“맞습니다.”
맞다고? 그럼 역시 지구가 망한 게 맞는 거 아냐?
내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는 걸 본 노인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 제가 드린 말씀에 어폐가 있긴 했군요. 현재 고객님께서 전 차원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지구인이신 건 맞습니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존재시죠.”
“그럼 역시 지구인이 전멸한 게 맞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은 섣부른 판단 같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의문에 가득 찬 눈초리로 노인을 노려보자, 노인은 손을 내저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고객님께선 운이 좋으셨던 겁니다.”
“그게 무슨······.”
영문 모를 소리만 잔뜩 하는 노인에게 짜증이 날 무렵이었다.
“고객님을 제외한 지구인들은 모두 다른 종족으로 변경을 해버렸거든요. 그러는 바람에 고객님께서 마지막 지구인이 되신 거고, 그렇게 전설적 유일급 종족으로 남게 되신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구가 멸망했다는 것보다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