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54
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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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객님께서 종족 변경권을 사용하신다면 지구인이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말 겁니다. 그렇다고 손해 보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냥 두고 보기 아까워서 이렇게 말씀드리게 됐습니다.”
“아뇨,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머릿속에서 혼란이 완전히 빠져나가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럼 혹시 지구는 아직 안 망한 겁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이상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지구가 망했든 말았든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뱉어버린 질문은 다시 삼킬 수 없다.
그런 내게, 노인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제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카르마 마켓에서 다루는 상품에 대한 것뿐입니다. 그저 통계로 보아 고객님께서 마지막 지구인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을 뿐이지요. 지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구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곧장 후회했다. 하느니만 못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술에 취해서 전여친의 SNS에 들어갔다가 덧글을 하나 남기고 잠들었다가, 술에 깨서 무진장 후회하며 그 덧글을 지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난 그랬던 적 없지만 말이다.
“저기 혹시, 그럼 다른 사람이 종족 변경권을 사용해서 지구인이 되면 제 전설적 유일급 지위도 사라지게 되는 건가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나는 다른 질문을 생각해내어 노인에게 물었다.
아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인데 의외로 내게 중요한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가진 어드밴티지가 사라질 수도 있는지에 대한 여부가 달린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노인의 대답에 집중했다.
“아뇨,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고객님은 운이 좋으셨던 겁니다. 지금 만약 다른 고객님께서 지구인으로의 종족 변경을 감행한다면 그냥 전설급 종족으로 남겠지요. 그것과는 상관없이 고객님께선 여전히 전설적 유일급 종족 지위를 유지하실 수 있습니다.”
오, 다행이다.
그런데 노인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 상태에서 고객님께서 종족 변경권을 사용하시면······.”
“그 사람에게 전설적 유일급 타이틀이 달리겠군요.”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노인은 미소 지었다.
“그러니 가능하시다면 종족 변경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추천해드리는 바입니다.”
“이해했습니다.”
나도 미소 지었다.
마지막 지구인으로서 전설이 되어버린 느낌은 뭐 크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좋았다. 그 덕에 이렇게 종족 특성이 업그레이드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상태창을 켜고 다시 내 종족 특성을 하나씩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자동 통역 기능을 지닌 모든 인류의 뿌리 특성······. 응? 모든 인류의 뿌리? 뭔가 의미심장한데. 어쨌든 직접적인 전투 능력엔 상관없는 특성이니 그냥 넘어가자. 그리고 가장 원초에 가까운 인류. ······이것도 좀 의미심장한데. 어쨌든 직감의 효율이 올라가는 건 좋은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게 가장 아쉽다. 지구인의 습득력.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절반이라니!
“진작 업데이트 됐더라면 레벨 업이 더 편해졌을 텐데······.”
나는 약간의 불만을 담아 그렇게 툴툴거렸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고객님. 고객님께선 정보 갱신만 안 되었을 뿐, 마지막 지구인이 되셨을 시점에 이미 모든 특성이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인류 종족을 만난 적이 없으십니까?”
노인이 말하는 건 모든 인류의 뿌리 특성에 대한 걸 거다. 말이 통했느냐고 묻는 걸 테니. 그리고 물론 통했다. 드워프도, 오크도, 엘프도, 코볼트도. 나와는 다 의사소통이 됐고, 나는 그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시스템이 자동으로 통역해 주는 줄 알았는데요.”
왜냐하면 튜토리얼 세계에선 처음부터 말이 통했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내 추측을 노인은 부정했다.
“튜토리얼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그랬던 건가. 자동 통역 서비스는 튜토리얼 세계 한정이었던 건가. 여기 이 세계에 와서 다른 NPC 종족들과 말이 통했던 건 모든 인류의 뿌리 특성 덕이었던 거고.
“그럼 다른 특성들도 이미 활성화가 되어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가장 원초에 가까운 인류나 지구인의 습득력은 이미 적용된 상태일 겁니다. 지구인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알려진 것도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니까요.”
오래전의 일이라는 단어가 내 머리를 한 차례 두들겼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보다 99레벨 시절에 블랙 드래곤을 죽일 때마다 0.2%의 경험치를 얻었던 건 지구인의 습득력 덕이었단 말인가!
가슴이 철렁했다.
이 종족 특성이 없었다면 레벨 업에 두 배의 시간이 필요할 뻔했으니. 튜토리얼 세계에 천 년 이상도 갇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데 왜 이제까지 몰랐지?”
레벨 업 경험치가 반으로 깎이는 건 결코 경시할 수 없는 큰 변화다. 그럼에도 내가 알아채지 못한 건 이상하다.
“아, 그렇군.”
튜토리얼 세계에 혼자 남았다는 걸 깨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놓고 지낸 적이 있다. 폐인이 되어 레벨 업도 포기하고 튜토리얼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닌 모양이다.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희미하니 별수 없다.
아마 그 시절에 내가 마지막 지구인이 된 거겠지. 그거라면 내가 종족 특성에 변화가 있다는 걸 못 알아챌 만도 하다.
노인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노인을 앞에 두고 열심히 혼잣말을 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크흠, 그럼 세 상품 모두 제게 필요가 없는 셈이 되는데. 다른 상품은 없어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는 그렇게 물었다.
“물론 존재합니다, 고객님.”
노인은 술병을 하나 꺼내놓았다.
“만전의 술. 300 카르마입니다. 생명력, 체력, 마력, 내공 등 모든 소모된 값을 최대로 채워줍니다.”
“줘요!”
“아뇨, 지금 고객님께선 만전의 상태신지라 이 만전의 술을 구매하시는 건 불가능합니다. 만전의 술은 이 공간에서 밖에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물건인지라. 필요하실 때 여기 오셔서 바로 마시고 나가시는 용도입니다.”
아쉽군. 나는 입맛을 다셨다.
“또 뭐 없어요?”
“귀환의 돌. 300 카르마입니다. 사전에 귀환지점을 설정해 두시고 이 돌을 만지면 바로 그 귀환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물건이죠.”
“줘요!”
“죄송합니다만 만지자마자 효과가 발동하는 물건이라서, 인벤토리에 넣으실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귀환지점을 설정하는 표를 드릴 테니, 다음에 오셔서 사용하시죠.”
내 시스템의 인터페이스에 귀환지정 설정이라는 아이콘이 하나 새로 생겼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타인의 시스템에 간섭하는 능력을 지닌 이 노인은 보통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나도 함부로 굴지 못하는 거고.
“고마워요. 그런데 또 다른 물건은 없나요?”
“체모 염색물약, 피부 염색물약, 눈동자 염색물약. 한 번 사용하면 영구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각각 200 카르마씩입니다.”
내게 크게 필요는 없는 물건들이다. 심드렁하니 그 물약들을 바라보던 나는 어떤 사실을 깨닫고 노인에게 질문했다.
“잠깐만요. 염색물약들이 왜 목숨보다 비싸죠?”
그러자 노인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목숨이 싼 겁니다.”
그 대답을 들은 나는 확신했다.
역시 이 노인, 보통 내기가 아니다.
***
나는 카르마 마켓을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소득이 적긴 했지만, 그래도 인벤토리 안에 자리를 차지한 [1UP 코인] 세 개를 바라보고는 웃었다.
이걸로 이제 두 번 정도는 무모한 짓을 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렇다고 무모한 짓을 나서서 하겠다는 건 아니다. 나대지 말자고 다짐한 게 어제도 아니고 오늘인데 그럴 순 없지.
그 외에 다른 소득은 없어 아쉬웠지만, 다음에는 더 다양한 상품을 준비하겠다는 노인의 말을 믿어야지.
“자, 그럼 [진리대주천]을 돌려볼까?”
카르마 마켓에서 이렇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줄은 몰랐다. 아니, 카르마 마켓이 뭔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니 당초 계산한 것보다 좀 늦어지긴 했지만, 나는 계획대로 대주천 타임을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잠깐 자릴 비울 건 이미 주리 리를 통해 알려두었다. 이젠 인류연맹에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이상한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이번 김에 아주 뿌리를 뽑을 기세로 대주천을 돌려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안전에 안전을 기하는 차원에서, 나는 요 주변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좋아, 직감은 조용하다. 내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바람도 조용해, 호수에 파문 하나 일지 않고 있었다. 맑은 호수임에도 물고기 한 마리 뛰어오르지 않는 건 다소 불길했지만, 교단의 힘이 미치는 이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럼 어디 한 번 시작해볼까?”
나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진리대주천]그러자 마력이 전신을 회전하기 시작했다. 대주천을 돌리는 것도 이제 겨우 두번째지만, 지난번에는 일주일 연속으로 했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는 어쩐지 마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 이미 내겐 [진리의 극]이 있다. 마력을 다루는 스킬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굳이 스킬에만 의존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천천히 [진리의 극]으로 마력을 움직여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리대주천] 스킬로 인해 움직이는 마력에 맞서지 않고, 천천히 가속시켜가는 느낌으로.
좋아, 순조롭다. 나는 마력의 움직임을 더욱 가속시켰고, 한꺼번에 더 많은 양의 마력을 운용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기분 탓인지 스킬의 효과도 더욱 좋아진 것 같다.
조금 더 해볼까? 용기를 얻고 약간 더 마력을 움직여보려고 했을 때였다.
쿵.
윽! 역시 안 되나?
[진리의 극]으로 움직인 마력과 [진리대주천]으로 움직이는 마력이 충돌하는 바람에, 단전에 길고 큰 바늘에 깊숙이 찔린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러다가 주화입마에 빠져드는 게 아닐까? 그런 위기감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느낌을 잡은 것 같다는 감각 또한 동시에 찾아왔다.
[진리의 극]으로 마력을 움직였기에 이런 것이다. 두 개의 스킬이 충돌했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스킬만을 운용하면 되는 일이다.나는 [진리의 극]을 껐다.
그리고 내가 직접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이런 게 가능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능력이다. 스킬이 아닌 능력, 나의 능력이다.
처음에는 천천히, 작게,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리고 내 의지로 움직이는 마력과 스킬이 움직이는 마력이 섞이기 시작했다.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속도를 맞춰서, 길게 마력을 뽑아내었다.
그것은 매우 세밀한 작업이었고, 극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점점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런 채로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마력의 운행이 느려지고 갑갑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킬이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 더 이상 [진리대주천]으로 마력을 쌓을 수 없습니다.
아니, 나는 더 할 수 있어. 나는 시스템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진리대주천은 한계에 부딪혀 멈췄지만, 나는 내 의지로 계속해서 마력을 운용했다. 언제부턴가 주도권은 내게 넘어와 있었다. 이미 스킬이 돌리는 마력보다 내가 직접 돌리는 마력양이 더 많았고, 흐름 또한 더 강력했다. 그러니 더 이상 스킬에 의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진리대주천]이 아닌, ‘대주천’을 계속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 한계돌파!
마력의 폭풍은 다시금 내 안에 몰아치기 시작했고, 무엇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묘한 깨달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