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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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트롤의 우호도 500을 확보하고, 그 우호도가 신앙으로 승화되면서 내게도 그 대가가 신성이라는 지표로 되돌아왔다. 단순히 식량을 나누는 것만으로 우호도가 400이나 오를 리 없으니, 내가 말한 정의라는 단어가 트롤들의 뭔가를 찌른 모양이었다.
그래서 좀 물어보니, 트롤 수장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래 저희는 이 땅의 지배자이자 포식자이고 다른 누구보다도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저희의 정의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강한 자야말로 정의. 그것이 저희의 정의였습니다.”
그러나 트롤들은 ‘신’, 아마도 이 지역의 관리를 떠맡은 인퀴지터와 조우하고 그에게서 벌레보다 못한 것들 취급을 받게 된다.
이 지역에서 가장 강하기에 가장 정의로웠을 터인 트롤들이 약자, 트롤들의 표현으로는 ‘악’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신’이 찾아온 후, 이 땅의 가장 사악한 존재, 그러니까 가장 약한 벌레들이 커져서 트롤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거대 모기들이 그것이다.
불과 며칠도 안 될 짧은 시간동안, 이 지역의 패자로서 오랜 시간 군림해 오던 트롤들이 믿던 정의는 그들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 돌아와 버리고 만 셈이다.
“저희는 저희가 믿던 정의가 틀렸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상황이 바뀌니 손바닥을 뒤집는 트롤들의 태도는 그야말로 비겁하다 할 만했으나, 자신들의 생존을 부정하는 정의를 계속 믿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 습지에서 가장 약한 존재로 전락했다. 그것은 숨 쉬는 것마저도 허락받지 못할 악이자 불의였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마저 허락받지 못했다.
다른 지역의 ‘멸균작업’에는 꽤나 공을 들이던 관리자들이다. 형평성을 따지자면 트롤들도 전멸해야 정상이었으나, 이렇게 많은 트롤들이 살아남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트롤의 피가 유익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용당하는 트롤 본인들은 자신들의 피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수장이 주워듣기로는 피부에 바르면 미용에 좋다고 피를 뽑아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가나안 계획으로 인해 이곳에 찾아올 지구 인류에게 트롤들은 딱 좋은 ‘사냥감’이 될 운명이었으리라. 어쩌면 ‘특산물’이 될 수도 있었을 테고.
이상하게 습지대에만 필드 보스가 없던 이유도 이걸로 밝혀진 셈이다. 필드 보스는 인퀴지터들이 ‘살균병기’라 지칭하기도 하던데, 이 지역은 ‘살균’할 필요가 없으니 배치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무리 트롤들의 피가 유익하다 한들 수가 너무 많이 불어나면 곤란하다며, 모기들에 의해 떼 몰살을 당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트롤들은 스스로 산아제한을 하면서 되도록 관리자들이 나서지 않게 노력했다고도 말했다.
어쨌든 트롤들은 그렇게 관리자들에 의해 개체 수 조절을 당하며 무기력하게 생을 이어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벌레와 같이 살던 저희에게, 이진혁 님께서 새로운 정의를 가져다주셨습니다.”
트롤들 스스로는 그들 자신의 정의를 바꿀 수 없었기에,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필요로 했다. 트롤 수장이 직접적으로 그렇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내가 볼 땐 분명 그랬다.
바로 그때 찾아온 게 나였다.
트롤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정의관으로 볼 때, 그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롤들의 정의를 부정하는 자.
트롤들의 존재 이유를 긍정해 주고, 그들이 새롭게 믿을 정의를 가져다준 선지자.
어쩌다 보니 내가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귀하디귀한 신성을 손에 넣었고, 트롤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아진 나는 트롤에게 깨끗한 물과 식량을 나누며 베풀었다. 이미 우호도는 한계돌파해 더 이상 뭔가 나눠줄 필요도 없지만 기분이다!
“오늘은 연회다! 마음껏 먹고 마셔라!!”
어차피 [오병이어] 덕에 내가 쓸 돈은 금화 한 개분도 안 됐다. 금화 단 하나로 이들 전부를 배불리 먹일 수 있다면야 아끼는 게 구두쇠지! 물론 난 구두쇠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지자시여!”
이 와중에도 우호도가 추가로 오르기도 했다. 그게 유의미한 양은 아니라 신성이 추가로 불어나진 않았지만 뭐 어떤가.
“그러고 보니 호수 지역에 세이렌들이 돌아왔더군.”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는 와중에, 나는 잡담처럼 세이렌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 말에 트롤 수장은 눈을 빛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들은 우리의 오랜 적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약하기 때문이었겠지?”
“! ······그렇습니다.”
트롤들의 이야기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기존의 트롤들에게 있어 세이렌은 ‘악’이었으리라. 그러나 새로운 정의를 믿게 된 그들은 더 이상 세이렌을 악이라 여겨선 안 된다.
“강요는 않겠지만 그들에게도 내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도 좋을 터. 그들에게 내 이름을 밝히면 그들도 무조건 적대시하지는 않을 테니.”
“······새겨듣겠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시도다. 내가 처음 조우했던 드워프와 오크들은 [이진혁교]를 믿으며 내게 신앙을 생성해 주고 있는데, 그 조건이 신도의 숫자가 세 자릿수에 이르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 트롤들과 호수의 세이렌들도 합쳐서 세 자릿수에 이르면 내게 신앙을 생성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흑심이 가득 담긴 제안이었다.
뭐, 되면 좋고 안 되면 마는 거지만. 다행히 트롤 수장은 내 제안을 새겨듣는 자세다.
“자, 그럼 나는 이만 떠나겠네. 이 습지대는 이제 자네들의 것이니 부디 번성하게.”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것은 간단하네.”
나는 마지막까지 허세를 가득 모아 말했다.
“정의를 실천하게.”
새로운 정의를.
***
트롤들 영역에서 충분히 멀어지자, 그동안 조용히 있던 안젤라가 입을 열었다.
“저기, 선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어쨌든 너 퀘스트는 깼지?”
“네. 접촉 퀘스트요.”
우호도 퀘스트는 뜨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나도 드워프 불 피워주고 우호도 먼저 받고 퀘스트는 나중에 받았지.
“그럼 됐지, 뭐.”
“그런가요?”
“그래.”
“그런가보네요.”
안젤라는 납득한 듯 포기한 듯 애매한 태도로 대꾸했다.
“저기, 선배.”
“응?”
“저도 빵 좀 나눠주세요.”
묘하게 입술을 삐죽 내민 게, 자기만 빵을 나눠주지 않았다고 조금 삐친 것 같았다.
“하핫, 그래.”
이러다 정 들면 안 되는데. 정 들겠다.
***
습지대를 벗어나자, 그곳은 정글이었다.
몇 달 전에는 눈이 그치지 않은 설산에 있었는데 말이다.
하긴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에도 만년설은 쌓였지.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정글은 좋다. 열대우림의 빽빽하게 솟아오른 나무는 하늘에서의 정찰을 방해하기 딱 좋은 지형지물이니까.
“정글 안으로 들어가자.”
내 지시를 들은 안젤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정말로요?”
“그래. 정글은 숨기 좋은 곳이잖아. 나는 몰라도, 너는 도망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네······.”
그런데 안젤라는 정글로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하긴 그런가. 정글은 벌레도 많고 그러니까. 여자애가 좋아할 만한 환경은 아니지. 아무리 병이나 독에 강한 플레이어라도 취향이란 건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안젤라의 소극적인 불만 표출을 무시했다. 그녀에게 호의를 산다고 내가 뭘 얻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정글 행은 그녀를 위한 것이니.
아니, 이건 솔직하지 않은 생각이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정글에 적당한 퀘스트 대상이 있을까 싶어서 들어가는 거다. 퀘스트를 확보하고 해결해서 금화도 벌고 기여도도 벌고, 혹시 살아남은 인류종족이 있으면 겸사겸사 신성도 확보하고.
그리고 사실 나도 좀 숨어서 시간을 끌 필요가 있다. 일단 트롤들의 신앙을 확보해 급한 불을 껐지만, 그간 강적들을 상대하느라 소모한 신성을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하는 김에 [응보의 때]의 수련치도 좀 쌓고 숙련도 랭크도 올리고 싶다. [위장 자폭]도 유용해 보이니 성장시켜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설령 합성 재료로 쓰게 된다 하더라도 미리 랭크 업을 달성해 두는 편이 더 유리하다.
딱히 쓸 데가 없어서 내버려 뒀던 [마안 : 파괴광선]은 어떻게 할까? S랭크를 달성해서 옵션을 달면 원래는 다른 계열로 따로 묶였던 스킬과도 합성 메시지가 뜰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어쩌면 성장시키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유니크급 스킬을 성장시키는 것보다는 같은 계열 레어 스킬을 성장시켜서 합성시키는 게 더 효율적이라 생각해 적당한 합성 재료가 생길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했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내 주력 공격 스킬들을 [진리명경]에 다 갈아 넣어 버린 탓에, 내겐 신성을 소모하지 않는 공격 스킬이 지금 당장 필요해졌다. 그리고 [마안 : 파괴광선]은 그 후보로 적합했다. 가능하면 레전더리 유니크 스킬이 딱 좋겠지만, 그런 스킬은 돈 주고도 못 사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돌아오면 카자크를 패퇴시킨 전공과 안젤라를 항장으로 받아들인 전공의 보상을 받고, 쥬디케이터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죽인 전공을 계산시키러 또 보내야 했다. 전공의 보상도 소화시켜야 하고. 그러고 보니 아직 남겨둔 5성 요리도 먹어야지.
이런 일련의 작업을 교단의 끄나풀이 돌아다닐지도 모르는 개활지에서 할 순 없다. 그러니 정글 행은 내게도 필요한 일이다. 이런 상황인데 안젤라의 어리광을 받아줄 수야 없지.
“웰컴 투 더 정글!”
“신나셨네요.”
“기분 탓이야!”
그렇게 우리는 정글 안으로 들어갔다.
***
나와 안젤라가 정글에서 시간을 보낸 것도 어느새 8일째다.
정글에는 식인 보아뱀으로 가득했지만, 다른 동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관리자들에 의해 구제되어 버린 것이리라. 아무래도 여기 살던 인류 종족도 그들에 의해 멸균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흔한 벌레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벌레가 없는 것을 안젤라는 다행스럽게 여겼지만 나는 실망했다. 내가 아는 정글은 이렇지 않으니까. 들어올 때만 해도 웰컴 투더 정글을 호기롭게 외쳤는데 말이지.
식인 보아뱀들은 토벌 퀘스트 대상이었지만 이것들을 싹 다 잡아 버릴 수는 없었다. 안젤라의 언급으로 이들을 잡으면 주변의 관리자에게 메시지가 날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금화랑 기여도 좀 벌자고 벌집을 들쑤실 순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정글에 숨어 있으려고 들어온 건데 그런 짓을 했다간 본말전도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 그 주변만 간단히 정리하고 머무르기로 했다. 동물이 하나도 없는 대신 식물들은 풍부했기에, 우리는 적당히 수풀을 자르고 나무를 쌓아 그럭저럭 괜찮은 주거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이 8일 전의 일이었다. 안젤라와의 공동생활을 시작한 지도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확실히 말해서 안젤라는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성적 기능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다.
게다가 여기는 정글,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오지. 여긴 나와 안젤라, 단둘뿐.
이런 상황이다. 당연히 남녀 사이의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안젤라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혀, 눈곱만큼도!
멀쩡하고 정상적인 남자가 어린아이를 상대로 발정하지 않듯, 비둘기나 참새를 상대로 욕정을 느끼지 않듯, 나는 안젤라를 그런 대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떤 저주나 디버프에 당한 게 아니니, 원인은 내게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내겐 안젤라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