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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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거대 사자는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아니, 행복했던 건 나뿐인가? 뭐 그거야 어쨌든.
나는 충분히 스킬을 뜯어낸 후 거대 사자의 지배를 풀어주었다. 지배에서 풀려난 거대 사자는 어리둥절해하더니 나를 내려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귀인께서 이 아르슬란에게 걸려 있던 저주를 풀어주셨소?”
뭐야, 사자 주제에. 목소리가 너무 중후하고 멋있다.
“그렇다. 그대를 속박하고 있던 지배의 힘은 내가 끊어내었다. 그대는 이제 자유다.”
나는 대충 사자의 말투에 맞춰 읊어주었다. 그러자 사자는 눈에서 이채를 발하더니 마치 사람처럼 그 자리에 엎드려 내게 감사를 표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으나, 우선은 감사의 마음부터 전하오. 고맙소. 이 아르슬란은 악독한 자들의 술수에 걸려 원하지도 않던 학살을 반복하고 말았으나, 은인께서 그 죄의 연쇄에서 나를 풀어주셨소.”
몸을 일으킨 사자, 아르슬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르슬란의 그런 탄식의 말은 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직감이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강렬한 위험신호였다. 말그대로, 내 목숨에 관계될 정도로!
“안젤라! 숨어!!”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역시 나였다. 안젤라는 영문을 모르겠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어쨌든 내 말에는 따라 케찰코아틀을 감싸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특기인 [인지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것이다.
“피해라, 아르슬란!”
“뭣?!”
아르슬란은 의문의 감탄사를 미처 다 토해내지도 못했다.
그 순간, 막대한 에너지의 응집체가 사자의 거대한 몸을 꿰뚫고 삼켜 버렸다.
다음 순간, 아르슬란은 그냥 없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내가 생각하여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직감이 먼저 내게 알려주었다.
아르슬란의 몸을 꿰뚫은 광선의 정체는 최소한 신화급의 스킬이라고.
그 거체를 집어삼켜 완전히 소멸시켰음에도 지면에는 조금 탄 자국 밖에 남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위력의 스킬이 오로지 아르슬란만을 표적으로 작렬했다는 방증이었다. 굳이 직감의 도움이 없이도, 이 스킬이 신화급에 달할 위력을 지녔음은 쉬이 추측해낼 수 있었다.
신화급의 스킬은 신성 없이는 사용할 수 없다. 나 또한 신성을 갖추기 전에는 신화급 스킬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니 내려질 결론은 매우 명확했다.
지금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적은 최소한 신성을 지닌 존재다.
어쩌면 신일지도 모르고.
아무래도 내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전력 차가 크게 벌어지는 상대가 내 앞에 출현할 줄이야. 강적을 원하긴 했어도 이런 이빨도 안 박힐 정도의 최종 보스급을 원하지는 않았다.
젠장, 나도 그냥 안젤라랑 같이 숨을 걸 그랬나.
그런 뒤늦은 후회를 마치기도 전에, 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이런. 큰일 날 뻔했네요. 괜찮으십니까?”
천사같이 생긴 금발의 소년이 내게 정말로 걱정스러운 듯 그렇게 물었다. 내가 그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금발의 잘생긴 소년은 안도의 미소를 띠며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이런 변방에 길들여지지 않은 마수가 풀려나면 어떤 참사가 일어났을지······. 그래도 사전에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이게 무슨 개수작이지?
하마터면 실제로 이렇게 말할 뻔했다.
이 천사같이 귀엽고 아름다운 금발의 소년은 진짜 적이 아니다. 기껏해야 적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거나 더미, 혹은 부비트랩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 직감은 소년이 아니라 그 뒤의 존재를 향해 요란하게 경고음을 울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끔찍한 악령과도 같은 존재가 지독한 악의를 풍겨대며 도사리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현묘한 간파]를 켜고 그 존재의 전모를 확인하고 싶지만, 나는 그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놈은 나보다 강하다. 전투 상황을 맞이하면 목숨 하나는 확실하게 내줘야 한다. 그리고 한 번 죽는다고 상황이 개선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다. 그 끝에는 확실한 죽음, 오직 그것만이 놓이리라.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날아왔지?
인퀴지터도, 인스펙터도, 쥬디케이터도 내게 이렇게까지 진한 죽음의 내음을 풍기지는 않았다. 인퀴지터와 처음 조우했을 때도 막막했지만, 나보다 한 차원 높은 존재와 두세 차원 이상 더 높은 존재가 주는 압박감은 말 그대로 차원이 달랐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 소년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저 악령이 마각을 드러내기 전에.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죽음을 뒤로 미루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위였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해야 했다.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키르드. 키르드 하워드라고 합니다. 편하게 키르드라고 불러주십시오.”
소년은 천사와 같이 방긋 웃었다.
“나는······.”
목소리가 갈라졌기에, 나는 한 번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했다.
“나는 이진혁이다.”
높임말을 쓸까 했지만, 그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반말을 했다.
“이진혁 씨로군요. 반갑습니다!”
소년은 해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자는 걸까? 이 상황에서? 식은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셨고, 손도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바지에다 대충 손을 닦고 소년과 손을 맞잡아 흔들었다.
“그래, 키르드. 키르드라 부르라니 키르드라 부르도록 하지.”
당황해서 이상한 소릴 했지만 소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서글서글한 대답을 돌려줄 뿐이었다.
“네, 이진혁 씨!”
이 녀석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나야 시간을 끌겠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지만, 이 소년의 목적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이러면서 호의를 보이기까지.
“그래, 그렇군. 그럼 질문을 하나 하도록 하지.”
어쨌든 대화를 이어나가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언 발에 오줌 누기 같은 짓거리였지만 지금의 내겐 다른 대책 같은 건 없었다.
“키르드, 너는 교단 소속인가?”
덤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고.
“네? 어떤 교단이요?”
그런 내 질문에, 키르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깜박거렸다. 그 모습은 대단히 귀여웠으나, 내게는 그 귀여움을 순수하게 즐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 교단이라고 물으면 내가 할 말은 없군. 내가 아는 건 그 단체가 ‘교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다. 다른 호칭은 모른다.”
나는 분명 모른다고 대답했는데, 키르드는 그 답에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아, 유일교단 말씀이신가요?”
“유일교단?”
“이진혁 씨가 교단이라고 부르시는 그 단체 말이에요!”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혼자 끄덕인 후, 키르드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대답부터 해드리는 게 맞을 것 같군요. 전 유일교단 소속이 아니에요.”
그 대답은 의외였다.
“교단 소속이 아니라고?”
“네. 정확히는 그렇죠. 왜냐하면 저희는 하청이라서요.”
“하청?”
“갑을 관계로 따지자면 ‘정’ 정도 되겠군요.”
갑을병정의 정인가. 모르긴 몰라도 3차 하청 정도 되면 꽤나 삶이 팍팍할 것 같은데. 이 소년의 해맑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뭐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어쨌든 교단의 편이라는 소리겠군.”
“뭐, 그렇게 되겠죠?”
내 말을 들은 키르드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갑을 관계답게 교단에 유감은 있지만 어쨌든 일거리를 받아서 해야 하는 입장이라 저러는 건지. 뭐 모르겠다.
“도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유일 교단에 뭐가 필요하시다고 말씀드려도 제가 뭘 어떻게 해드릴 순 없어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그냥 하청이라서요. 발언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건 안타까운 일이로군.”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를 받을 일은 아니지.”
나는 키르드의 말에 대충 대꾸해 주면서 ‘악령’의 눈치를 보았다. 키르드와는 대비되는 그 강렬한 악의는 여전히 거둬지지 않은 채였다. 하긴 시간을 끈다고 어딜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모습을 드러내지도 덤벼들지도 않는다니. 저 악령은 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래도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오직 이 연약하고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귀엽고 천사 같은 소년 키르드만이 의욕적으로 내게 들이대고 있을 따름이었다.
뭘 자꾸 도와준다는 거야?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줄 건가?
그렇다고 진짜로 살려달라고 빌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로서도 뾰쪽한 수가 없이 어색한 침묵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
귀엽고 천사 같은 소년, 키르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왜 날 공격 안 해? 내가 적인 걸 모르나?’
키르드라고 공격당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맞는 건 아프고, 죽는 건 무섭다. 그러나 이 또한 ‘로드Lord’를 위함이니. 키르드는 다 참을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싫은 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쓰임당하지 못하는 것, 버려지는 것이었다.
‘네 고귀한 희생은 반드시 보답 받을 거란다.’
‘로드’께서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키르드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자리에 섰다.
키르드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적에게 공격당해 죽는 것.
매우 심플한 임무였다. 그리고 쉬운 임무였다고도 믿었다.
그런데 정작 실전에 들어와 보니 어떤가. 적, 그러니까 이진혁은 똥이라도 마려운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자신을 공격할 생각 따위는 없어보였다.
키르드는 분명히 이진혁의 적이고, 그보다 자신이 한 수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일부러 이진혁을 자극해서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드는 방법도 쓸 수 없다. ‘로드’께서 권능을 휘두르려면, 공격당하는 키르드는 어디까지나 무고한 소년이어야 했다.
그런데 키르드가 이진혁을 자극하면, 그렇게 해서 ‘정당방위’를 성립시키면 그는 더 이상 무고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절대로 먼저 이진혁을 자극할 수는 없었다.
‘어쩌지. 이런 경우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교육받은 적은 없는데······.’
어색한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임무에 실패하게 된다. 키르드의 속은 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뾰쪽한 수가 생각나는 것도 아니었다.
***
‘······저놈은 뭘 하는 거야?’
이진혁을 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의 이름은 로제펠트 합트크누플. 무고한 소년, 키르드의 등 뒤에 도사린 악령의 정체였다. 실제로는 악령이 아니고, 피와 살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지만 말이다.
로제펠트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신화급 스킬 때문에 지금은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을 터였다.
[사자의 베일(Veil of the Dead)] – 등급 : 신화(Myth)– 숙련도 : A랭크
– 효과 :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은 사자의 베일 속에 감춰진 사후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사자의 베일을 들어 올리는 순간, 생자는 사자가 되어버릴 것이니.
신성을 지닌 존재라 하더라도 아직 필멸자의 범주에 속해 있는 한, 사자의 베일 뒤를 관측할 수는 없으리라. 적어도 로제펠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런 확신을 품게 된 건 세 자릿수에 달하는 과거 사례가 근거로 존재했다.
실제로는 로제펠트가 경험하는 ‘첫’ 예외가 눈앞에 존재했지만, 로제펠트는 아직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그렇기에 로제펠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왜 놈은 제물을 죽이지 않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