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007
1016장. 파격 제안(3).
“허허허ⵈⵈ.”
성경호 회장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손님은 돌아갔다.
세상에 단 한 명 날도둑놈이 있다면 장태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란 생각까지 했다.
살아온 연륜을 떠나 장태산을 인정했기에 조언을 구했다.
언제 어느 때건 집단을 이끄는 보스의 선택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잘못 판단한 지시 하나에 기업 일부나 혹은 그룹 전체가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특히 기업 총수의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랏데그룹 소속 직원들 수십만 명의 생사가 달려 있는 문제였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문제인 만큼 골치가 많이 아팠던 성경호 회장.
자신이 두 아들 중 누구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었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잠시 흔들렸던 이성을 다시 움켜잡았다.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허락했던 많은 특혜가 결국 아들을 병들게 했다.
재생은 불가능했다.
이미 굳어버린 아들의 사상과 몸에 밴 경영 습관은 고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확인했다.
“무서운 녀석이야.”
성경호 회장은 다시금 장태산을 떠올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꿀꺽 꿀꺽.
오랜만에 즐겨 마셨던 일본 맥주로 입을 축였다.
목이 탔다.
비축해 놨던 기를 모두 소진한 듯 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를 만나는 시간 동안 잠시 과거 팔팔했던 자신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맛봤다.
그룹 미래를 놓고 매 순간 승부를 즐기던 그 시절.
장태산을 마주하고 있을 때 미증유의 힘을 느꼈다.
잠시 그 맛에 취해 없는 힘까지 짜냈다.
결과는ⵈⵈ.
“유언장이라.”
과거 어느 시점에 유언장을 작성했다.
사후에 개봉될 내용들을 담고 있기에 그룹 법무팀과 조율해 작성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유언장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든 바꿀 수 있다.
오늘 장태산은 투자자가 아닌 변호사의 신분으로 만났다. 기존의 유언장을 아우르는 자필 유언장을 작성하도록 도움을 구했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실력이 깔끔했다.
무효가 될 만한 내용은 모두 짚어 내 제거했다.
자필 서명에 지장과 도장까지 찍었다.
필적만 감정해 봐도 100% 성경호 회장의 사인이 확실했다.
그 유언장에 기재된 최종 후계자.
장태산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듯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진작 알아봤어야 했건만ⵈⵈ.”
못내 아쉬웠다.
자신보다 먼저 몸져누워 버렸지만 임성철 회장은 역시 똑똑했다.
이것저것 재다가 기회를 놓칠 게 빤하다고 생각한 엘자의 고자룡만도 못했다.
내세울 게 없는 연대 전문구 회장도 장태산과 모종의 딜을 한 것이 확실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기업 총수들이 장태산과 인연 맺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륜과 자존심을 핑계로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성경호 회장.
시선이 창밖으로 옮겨졌다.
어느새 창밖은 불야성으로 변했다.
과거에는 바빠서 창밖을 내다볼 여유도 없었지만 지금은 나이가 드니 남는 게 시간밖에 없었다.
명예 회장으로 물러난 뒤 알게 모르게 가신들도 하나둘 그룹을 떠났다.
젊은 시절 꿈꾸던 제국은 완성됐지만 아직도 뭔가 아쉬웠다.
하지만 모든 게 희망에 불과할 뿐 이제 다시는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세월의 강물을 타고 모든 것들이 흘러갔고 본인 역시 그랬다.
성경호 회장도 자신이 곧 죽음의 강을 건너게 될 걸 알았다.
마음은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장 집무실로 임원들을 불러 열띤 토론을 하고 싶지만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총기가 머무는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한때 뜨거운 욕망으로 품었던 여인들도 이제는 다 귀찮았다.
말귀 알아듣는 비서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게 차라리 더 편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지난 세월을 추억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지금도 살아서는 다 쓰고 가지 못할 만큼의 재산이 사방에 널렸다.
그것만을 탐내는 자식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수중에 넣고 보면 별것 아니라는 걸 그들은 아직 몰랐다.
누릴 권리보다 책임져야 할 의무가 더 많은 자리가 그룹을 경영하는 회장 자리였다.
“난놈이야ⵈⵈ. 허허.”
장태산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다시 헛웃음이 나왔다.
나이도 어린 청년이 자신보다 더 세상을 넓고 깊게 봤다.
예리한 통찰력 또한 높이 살 만했다.
아쉬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최상의 패마저도 하찮게 봤다.
“그런데 변호사 수임료가 뭐 그렇게 비싸? 고얀 놈.”
말은 고약하다고 말했지만 장태산을 생각하며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짓는 성경호 회장.
이제는 누구를 미워하거나 질투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손자 재롱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넉넉하고 흐뭇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먹을 것을 주고 싶은 그 녀석ⵈⵈ. 알아서 잘 챙겨 먹겠지?”
어렵게 만난 장태산을 오늘 그냥 그렇게 보내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적당히 시간을 끌었으니 필요로 하는 각자에게 정보가 들어갔을 것이다.
이때 장태산과 인연을 맺어 놓은 쪽이 행운을 움켜쥘 게 확실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 어딘가에 두꺼비 같은 녀석이 웅크리고 앉아 장태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가르쳐 놓았으니 말이다.
***
“거저먹으려 하면 안 되죠. 후훗.”
유언장 작성 및 보관료를 빌미로 짭짤하게 뜯었다.
그것도 현찰로 받았다.
“비상금으로 제격이야.”
성경호 회장에게서 007 가방 하나를 받았다.
작성한 유언장을 현찰이 담긴 007 가방에 담았다.
그걸 그대로 받아들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띵.
바로 아래층에서 멈췄다.
회장 가족이나 고위 임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엘리베이터.
“잠시 시간을 내주십시오.”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 있던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저 말입니까?”
손가락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서 있는 적당한 체격의 중년 남자.
“네. 장태산 회장님.”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면 리더 자격이 없었다.
“가시지요.”
“감사합니다.”
비서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내를 하는 비서를 따라 이동했다.
호텔에 딸려 있는 또 다른 로얄 스위트룸.
스르릇.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비서는 따라 들어서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갔다.
성경호 회장이 머무는 공간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고목 냄새가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가 감지됐다.
그리고.
“어서 오십시오.”
약간 어눌하게 들리는 우리말이었다.
성경호 회장처럼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남자가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적의는 일체 없었다.
“이쪽으로.”
창가 자리에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여 있는 위스키와 간단한 안주.
어둠이 깔린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한잔하기에는 완벽한 공간이었다.
남자에게 다가갔다.
“장태산입니다.”
짧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성동민입니다.”
랏데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영광입니다.”
“제가 더 영광입니다.”
맞잡은 손이 뜨거웠다.
파바밧.
눈과 눈이 마주쳤다.
형과는 확실히 다른 인상이었다.
성경호 회장이 고심 끝에 랏데를 맡기려 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만나 보니 더 괜찮았다.
두꺼비 관상은 욕심을 품고 있었다.
그 정도 욕심은 사업가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리더의 덕목이었다.
가장 핵심은 눈빛이 혼탁하지 않다는 것.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랏데 가문 자식들 중에 가장 인상이 좋았다.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허락도 없이 조촐하게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습니다.”
“아버님과 대화하다 보면 긴장하게 마련이지요.”
아는 척 너스레 말하는 성동민 회장.
그 반대의 관계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쯤 성경호 회장은 술을 찾을 것이다.
나를 만나고 직후이니 갈증이 날 것이 확실했다.
“위스키 괜찮습니까?”
“좋습니다.”
중산층이면 평소 즐기는 적당한 수준의 위스키.
나와 성 회장 정도라면 허례허식을 굳이 보일 필요가 없었다.
부의 정점에 이른 만큼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편한 게 제일이었다.
평소 접해보지 못한 졸부들이나 타인들 시선을 의식하느라 연식 따지고 가격 따졌다.
“먼저 한 잔 받으시죠.”
“아닙니다. 제가 따르겠습니다.”
“손님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러시다면.”
점잖은 대화가 오고 갔다.
뭇 사람들 눈에는 평범한 일상의 대화 같겠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이다.
행동 하나하나가 지금 서로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서로에 대한 탐색 시간.
나와 성동민 회장은 서로 만족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그룹 총수를 마주했다.
길고 긴 세월 동안 아버지 성경호 회장으로부터 교육받은 효과 같았다.
자신의 성품과 결합하면서 최상의 시너지를 뽑아냈다.
또로록.
잔이 채워졌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식 예절 문화가 익숙한 듯 성동민 회장 몸짓에는 절도가 있었다.
나이 어린 내가 따르는 데도 두 손으로 정중하게 술을 받았다.
또로록.
스트레이트 잔에 채워지는 호박색 액체.
적당히 술이 채워졌다.
“장 회장님을 이제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멋진 분인 줄 알았다면 진작 찾아뵐 걸 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 심정입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얘기가 잘 통했다.
생각보다 랏데 회장은 통이 컸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다.
일본 지주회사 직원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밀어주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가장 인정받는 장수가 품어야 할 성품을 소유했다.
바로 인덕(人德).
2020년까지 비바람 속에서 랏데가 꿋꿋하게 버텼던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그룹에 몸담고 있는 직원들이 알아서 따라주니 조직이 안정된 것이다.
총수가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거나 덕이 모자라면 직원들은 동요하고 조직은 그만큼 쉽게 무너지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작업한 기업들이 대표적인 예다.
“오늘의 귀중한 만남을 위하여.”
“위하여.”
팅.
작은 잔이 부딪쳤다.
평범한 요식 행위지만 이 또한 오늘은 해석을 달리 할 필요가 있었다.
꿀꺽.
단숨에 입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술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성동민 회장도 잔을 다 비웠다.
술을 잘 못 마시는 눈치다.
한 잔 술에 얼굴이 금방 붉게 달아올랐다.
“제 낯빛이 술을 대신 마신다고 하더군요.”
자신도 지금의 얼굴 상태를 아는 듯 웃으며 치부를 밝혔다.
“건강한 얼굴색이십니다.”
“놀리시는 건 아니시죠?”
“하하. 아닙니다.”
담백한 대화가 이어졌다.
“한 잔 더 받으시죠.”
“이번에는 제가 먼저 올리겠습니다.”
병을 잡고 그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그도 나의 잔을 채웠다.
“ⵈⵈ.”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장 회장님.”
성동민 회장이 뜨거운 시선으로 날 봤다.
“네. 회장님.”
“ⵈⵈ예의가 아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제 아버님과 무슨 얘기를 나누셨는지요.”
극도의 예의를 갖춘 질문이다.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스윽.
그리고 난 테이블 밑에 놓았던 가방을 들어 그의 앞에 쓱 내밀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