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12
111장. 미대에 간 법대생 (1)
“안아 그룹의 주가가 연일 폭락하고 있습니다. ㈜안아의 미국 현지 법인이 연방 국세청에 탈세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해 40프로가 넘게 그룹 전반에 걸쳐 주식이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증권 전문가들은 안아생명을 비롯해 대웅조선 인수와 같은 무리한 계열사 확장으로 재무비율에 대해 투자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는 전망을 내놨습니다. 세계적 금융위기 조짐이 보이고 있는 가운데 국내 10대 그룹의 부실 경영문제가 불거지는 사태에 대해 정부는…….”
“후후.”
차에서 듣는 깨소금 뉴스는 요 며칠 동안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해시태그라도 개발해서 쫙 뿌리고 싶었다.
로버트가 단단히 노렸다.
로비 실력을 확실히 발휘하며 미국 국세청까지 이용했다.
미국 주재 해외 법인 탈세 혐의야 조금만 캐면 다 나오는 내용이다.
법인 세워서 돈 버는 것보다 자금세탁이 대기업의 본래 목적이다.
다들 알고 있지만 피라미 같아 놔두고 있을 뿐이다.
그걸 이용해 로버트는 여론몰이를 시작했다.
한국 언론들 몇 개가 달라붙었다.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
여론몰이가 시작되자 그렇지 않아도 안아 그룹에 심정이 좋지 않던 전투 네티즌들이 달라붙었다.
안아 그룹 회장과 아들들의 만행이 다시 까발려졌다.
회장과 아들의 갑질에 대한 분노가 상상 이상이다.
기회도 매우 좋았다.
나의 기억에도 없던 미국발 악재가 연속 터졌다.
안아 그룹의 무리한 기업 확장도 문제가 됐다.
아직까지 금융당국은 외국계 자본의 공매도를 문제 삼지 못했다.
정권 교체 시기라 기관들의 손발이 맞지 않았다.
민주정권 10년 동안 근무했던 고위 공무원과 보수 점령군 권력 간에 보이지 않는 대립이 발생됐다.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는 사이 안아 그룹 상장 계열사 주식들이 모두 폭락했다.
망할지 모른다는 심리에 투매가 일었다.
외국 자본과 개미들의 투매에 안아 그룹은 대책을 포기했다.
국민연금 자본도 발을 뺐다.
은행에서 압박을 가했다는 소식도 조 변호사님을 통해 들었다.
나에 대한 도발은 멈췄다.
“정신 차릴 때쯤이면 죽고 싶을 것이다. 꼭 살아남아 죗값을 다 받고 가라.”
안아 그룹뿐만 아니라 그룹들 상당수가 편법과 불법의 울타리 안에서 성장했다.
다음 차례는 그들이다.
부우우우 붕.
매끄러운 라인을 자랑하는 차가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렸다.
2008년 3월 3일 월요일.
개강 첫날 출퇴근 러시아워가 끝난 도로 위는 한적했다.
1교시 아침 강의는 모두 뺐다.
다시 시작하는 대학 생활인만큼 널널하게 강의를 잡았다.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스펙을 쌓거나 고시 준비에 목숨 걸 필요가 없다.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스피커에서 과거 내가 좋아했던 아재 감성 팝송이 흘러나왔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명곡.
3월의 구름 낀 아침 날씨와 묘하게 어울렸다.
내 오랜 친구, 어둠이여라는 뜻이 마음에 들었다.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당신과 이야기하려 또 왔다는 가사가 특히 가슴에 박혔다.
이래서 명곡은 오래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이제 시원하게 느껴지는 봄바람을 열린 차창으로 만끽했다.
그 사이 학교 정문이 보였다.
입학식 때문인지 몰라도 차들이 많이 보였다.
“훗, 한국대도 똑같네.”
개강 첫날 모든 대학교 정문은 가장 먼저 봄이 찾아온다.
긴 방학을 끝낸 여학생들의 짧은 치마가 교정을 채웠다.
한껏 멋을 낸 그녀들의 옷차림이 칙칙한 남학생들과 대비됐다.
싱그러운 봄기운과 하모니를 이뤘다.
과거에 괴물 같던 한국대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얼굴에는 새 학기에 대한 설렘이 보였다.
고등학교 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차를 몰고 주차 게이트를 지나갔다.
학부생은 정기주차권을 구할 수 없다.
이곳도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벌어졌다.
주차요금에 신경 쓰지 않는 고급차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하루에 4만 원까지 나오는 주차요금을 지불 불가능한 학부생들은 걷거나 버스를 탔다.
고액 알바 전문가들인 한국대생이라고 모두 돈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가 지랄같이 넓어 버스가 오갔다.
천천히 법학관 주차장에 차를 파킹했다.
개강 첫날이라 자리가 많이 비었다.
학생처럼 청바지에 체크셔츠, 스웨터를 입었다.
심플한 백팩을 메고 차에서 내렸다.
“좋네.”
기분이 참 새롭다.
겨우내 얼었던 주차장 바닥에 봄의 생명력 같은 물기가 묻어났다.
아스팔트 길이지만 개강 첫날 첫걸음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사실 오늘 입학식에 부모님이 오신다는 걸 말렸다.
봄 농사철이라 아버지는 바빴다.
엄마도 그동안 밀렸던 창작에 집중했다.
애도 아니고 입학식이 대수일 리가 없다.
차를 주차하자 법학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학생들이 쳐다봤다.
“저 자식 누구야? 뭔데 차 자랑이야?”
“신입생 같은데…….”
“햐아, 요즘 어린 것들은 별짓을 다한다. 선배들이 물로 보이나.”
선배들의 질시 어린 말들이 바람을 타고 들렸다.
오티 때도 그렇게 질투하더니 달라진 게 없다.
잘난 사람들은 언제가 이렇게 질시를 먹고 산다.
어차피 안고 가야 할 숙명이다.
못 듣는 척했다.
“쟤가 걔야.”
“누구?”
“핫캔디.”
“뭐? 저 자식이 핫캔디라고?”
“핫캔디가 뭔데?”
“오만둥이 몰라? 그 자식이 핫캔디야.”
수군거리는 선배들이 내 별명에 관심을 보였다.
다른 과와 달리 독자주의 노선이 강한 법대였기에 선배라고 딱히 대접할 생각은 없다.
“회사에 들러 유 팀장님 커피 한 잔 들고 올 걸 잘못했네.”
유세라 팀장의 커피 내리는 솜씨가 대단했다.
아낌없는 지원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좋은 원두에 수준급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원두커피 향에 중독이 됐다.
“장태산!”
법학관 로비에 있는 자판기에서 아쉬운 대로 캔커피를 뽑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학교에서 이렇게 내 이름을 막 부를 여자는 딱 한 명이다.
“아린 선배.”
“와아아……, 너 진짜 대단하다. 버스 안에서 그렇게 날 개쪽 줬으면 사과로 맛있는 밥이라도 사줘야 할 거 아냐. 그런데 전화 한 통 없어?”
아린 선배도 여자다.
개강 첫날이라 옷과 헤어스타일에 잔뜩 힘을 줬다.
귀여운 얼굴과 어울렸다.
아무리 3학년이라고 무게 잡아도 내 눈에는 사회초년생으로 보였다.
“선배. 오늘 스타일 괜찮네요.”
가벼운 시선으로 치마를 입은 선배를 스윽 훑었다.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눈빛으로.
“…….”
여자 입 다물게 만드는 법이 요즘 자연스럽다.
노바 형님의 연애 스킬은 전천후다.
“날씨가 풀려도 차갑네요. 자, 마셔요.”
뽑았던 캔커피를 아린 선배에게 건넸다.
친절하게 캔 뚜껑도 따줬다.
사소한 행동 하나가 여성의 호감지수를 올리는 법이다.
아린 선배가 큰 눈동자를 껌벅이며 날 봤다.
그렇게 감동할 것까지 없는데.
작업은 아니다.
아린 선배는 학생회 일에도 관여하고 있다.
이 정도 친분을 유지하면 학교에서 꽤 도움이 될 거다.
아린 선배가 날 대하는 모습도 나쁘지 않다.
“어? 어.”
커피 한 잔과 말 몇 마디에 아린 선배가 입을 다물었다.
캔커피를 하나 더 뽑았다.
“개강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다 들떠 있는 것 같습니다. 선배는 어때요?”
“……, 태산아. 그런 건 선배인 내가 물어야 정상 아니냐?”
“뭐 어때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 간에 느낌 표현에 선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말투는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장태산! 넌 이제 파릇파릇한 신입생이야!”
아린 선배의 이런 점은 좋은 장점이다.
막 이름 부르고 거친 상여자처럼 행동하는 점이 매력이다.
“다음에 밥 한 번 사겠습니다.”
“너 어디가? 입학식 안 가?”
“전공강의가 있습니다.”
“신입생은 오늘 강의 안 들어도 돼. 그리고 월요일에는 법학과 1학년 전공과목은 없잖아?”
아린 선배가 의문에 찬 눈으로 날 봤다.
“저에게는 있습니다.”
“뭔데?”
“타과 전공 수업입니다.”
“타과 전공? 장태산, 너 인생 막 사는 거 아니지? 내년까지 합격 안 해도 돼. 이번 경영대 애들 코를 확 눌러줘서 교수님들이 너 괜찮게 볼 거야. 부담 갖지 말고 고시 준비 천천히 해.”
아린 선배가 위안을 줬다.
그런데 난 진작 관심 끊었다.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법학과 전공과목이 아니다.
오랜만에 획득한 신들의 능력.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
“하아아…….”
손유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자기 분야를 찾기 위해 2학년까지 전공 때와는 달리 3학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준프로의 세계로 들어간다.
방학 때 쉬지 않고 준비했지만 미진했다.
3학년 때부터 전공 수업 학점을 받기 위해서는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학교 실기실에서 숨 쉬는 날이 많았다.
그게 싫어 미리 커리큘럼에 나와 있는 그림 몇 점을 포트폴리오로 준비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들보다 더 치열하게 그림에 매진했지만 영감이 부족했다.
요즘 고민이 많은 손유리였다.
타과도 마찬가지겠지만 미대도 2학년 때까지만 놀 수 있다.
넘치는 과제 때문에 외로움을 애인 삼는 게 전통이다.
그래서 미대는 타과보다 커플이 많았다.
야간작업하다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눈이 맞았다.
‘벌써부터 숨 막히네. 하아.’
한국대 3학년 미술 전공 3학점 수업은 철저하게 스튜디오 방식으로 진행됐다.
편한 강의실에서 수업받는 건 끝났다.
필수 전공만 3학점짜리로 네 개다.
교수의 감시 하에 수업이 진행된다.
교수의 인정을 받기까지 수많은 창작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했다.
‘치이, 장태산 나빴어!’
갑자기 훅 들어와 진한 아쉬움만 남긴 남자 장태산.
지금쯤이면 입학식에서 새파란 새내기들과 미래를 설계하고 있을 것이다.
홍대 데이트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사업가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매일 바빴다.
문자와 전화 몇 번 주고받았다.
“하아아아아.”
다시 한 번 길게 손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땅 꺼지겠다. 왜 남친에게 차였어?”
손유리 곁으로 동기 안혜란이 다가왔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에 학원도 같아 절친이었다.
“숨 막혀. 앞으로 2년 동안 그림만 그릴 생각하니까 죽을 것 같아.”
“됐어. 지지배야. 2년 동안 과탑이 그런 소리가 나오냐? 집안 빵빵하겠다 이 성적 유지하다 유학 한 번 땡기고 교수나 하셔. 그것도 아니면 나처럼 선이나 보던가~.”
“헤엑! 서, 선? 너 선 봤어?”
“3학년이면 학교에서 폐계 취급받는 나이다. 몸값 좋을 때 시집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림도 별로인 내가 뭘 하겠냐? 학벌과 미모 하나면 끝장나지. 호호호.”
안혜란이 마녀처럼 웃었다.
손유리보다는 못했지만 안혜란도 집안이 좋았다.
성형수술을 잘 받아 미녀 소리도 들었다.
스르륵.
그때 강의실 앞문이 열렸다.
이번 학기 수업을 받는 15명의 학생들도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맨 앞자리에 앉은 손유리는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심철수 교수.
한국대 출신에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한 인재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시간 강사를 거쳐 교수로 임명됐다.
이마가 훤칠하고 체격이 좋았다.
쉬지 않고 열정을 불태우는 작가로 한국대를 떠나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극한의 창의력을 요구하기로 유명했다.
학생이 가진 재능의 200프로를 뽑아내 졸업시키는 일이 전문이다.
그가 웃었다.
“모르는 얼굴도 몇몇 보이네. 개강 첫날인데 출석이나 한 번 불러볼까? 어차피 오늘 이후로 출석 부를 일은 없는 거 다들 알지? 그림쟁이는 수업이 아니라 그림으로만 말하면 돼. 각종 미술대전에서 장려상 이상 입상하면 바로 수업 면제. 학점 보장이야. 그리고 내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창작하면……, 내 전공 수업 모두 패스! 어때? 끝내주지?”
심철수 교수가 웃었지만 아무도 같이 웃지 못했다.
지옥의 108 코스라 불리는 심철수 교수의 수업은 한국대 미대의 전설이었다.
별명이 지옥부처다.
그런 교수 마음에 들 작품은 세계명작밖에 없다.
“최대철.”
“네.”
“조소과 학생이 뚝심 있네. 좋았어. 기대해 볼게.”
서양화과 말고도 미대 다른 과에서도 듣는 경우가 많았다.
심철수는 천천히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익혔다.
“손유리.”
“네.”
“작년에 내 수업 들었지?”
“네. 교수님.”
“올해도 기대할게.”
“네…….”
손유리는 교수의 기대라는 말에 힘없이 답했다.
작년 그렇게 날뛰어도 겨우 A0를 맞았다.
그게 그 수업 최고 학점이었다.
“이한철.”
“넵!”
“복학생이지? 목소리가 딱 군바리네.”
심철수 교수는 출석을 부르며 학생들과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어라? 뭐야? 법대생이 여기 왜 있어?”
“???”
“버, 법대생?”
갑자기 놀라는 교수와 학생들.
1학년에 개설된 미술의 이해 따위 교양과목이 아니라 3학년 전공필수로 개설된 강의다.
절대 미대생이 아니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장태산!”
심철수 교수가 출석부를 보며 학생 이름을 불렀다.
“네에엡!”
힘차게 답하는 법대생.
“자, 장태산!”
손유리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고개를 번개처럼 뒤로 돌렸다.
# 112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