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14
113장. 미대에 간 법대생 (3)
“하아! X발!”
헐! 신선이 욕도 한다.
“미안하다. 그래도 욕 좀 하고 살자. 신선 됐어도 욕하다 걸리면 과태료 포인트가 부과된다.”
취화선 삼촌은 사방 눈치를 봤다.
“니미 내가 왕실도 싫다고 뛰쳐나왔는데 괜히 신선 돼서 해마다 개고생이다.”
아무도 없자 니미라고 욕을 퍼부었다.
이제야 취화선답다.
하층민의 삶을 살았던 장승업에게 규정되어진 삶은 벅찰 거다.
욕도 그 연장선상이다.
“계약직 신선은 뭡니까?”
“처음 들어보냐?”
“네. 다들 그런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내가 만났던 신선들 중에 계약직은 없었다.
“여기 인간 세상하고 똑같다고 말했지?”
“네…….”
“신선 세계도 마찬가지야. 능력 없고 빽 없으면 참 살기 벅찬 곳이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쉬는 화선 삼촌.
그 고통이 뭔지 모르지만 상당하다는 걸 느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최고다.”
“그래도 개똥은 아니지 않습니까?”
“똥 많이 싸면 거름 생산했다고 포인트가 쏠쏠하다.”
헐! 이건 뭔 개소리야.
“개가 똥 싸면 땅에 거름 되고, 그거 분해하면서 그 밑에 먹고 사는 보이지 않는 미물들에게 보너스 받는다. 그게 정해진 이치다. 보잘 것 없지만 싸다 보면 적금 형식으로 월말 결산된다. 개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이치가 다 그런 이유에서다. 몸까지 보신용으로 주고 오잖아. 그게 또 포인트가 제법이다.”
“다음 생에 개가 되면 꼭 밭에다 싸야겠군요.”
“그렇지!”
이 선신 뭐라는 거야!
농담으로 던진 질문에 고개를 왜 끄덕여!
“그런데 비정규직 신선은 뭡니까?”
“말 그대로야. 신선으로 뽑기는 그렇고 놀리기는 아까운 그런 존재?”
“귀에 쏙 들어옵니다.”
정규직으로 뽑기에는 부족하지만 막 부려 먹기 좋은 비정규직 같은 신선 같았다.
“나 살았을 때 그림 좀 그렸잖냐. 너도 알지?”
“그럼요! 취화선하면 지금도 알아줍니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과 동급이다.
호취도, 웅시팔황도를 비롯해 10폭 병풍 영모도, 12첩 병풍의 노안도 등으로 유명했다.
국사 심화 문제에도 출제됐다.
“조카야, 너 혹시 신선도 들어봤냐?”
“8폭 병풍 신선도요?”
“그게……, 신선 취업 시험이었다.”
“아!”
“X도 꿈속에서 신선이 나와 그림 한 번 그려 보거라 해서 그렸다. 나중에 죽고 보니 그게 신선 비정규직 인사평가였다. 그럴 줄 알았다면 더 잘 그렸지! 지들 꼴리는 대로 시험보고 지랄이야! 정규직이면 다야! 썅!”
쌓인 게 많은 것 같다.
“왜 정규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면서 왜 묻냐. 성질 더러운 신선 봤냐?”
“네…….”
지금도 그렇게 성질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포인트를 저축했을 리가 없다.
돈을 많이 벌어 술 마시고 기생들과 놀기 바빴을 것이리라.
“태산아. 삼촌 한 번 살려줘라.”
“급하세요? 사채 썼어요?”
하도 신선 세계가 인간 세상과 비슷해서 물었다.
“악신계에는 많다만 여기는 없다.”
놀랍다.
신계에도 사채가 있다니!
“그런데 왜요?”
“이번에 옥황상제 10,000수 재직 기념으로 대규모 정규직 전환이 예정됐다. 비정규직 상당수가 정규직이 될 수 있다.”
“그래요? 정말 좋은 기회를 잡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좀 땡겨줘라.”
“뭘요?”
“뭐긴 뭐야! 정규직 선발관에게 괜찮은 신선주라도 한 병 찔러줘야 할 거 아냐!”
“아!!!”
진짜 신선 세계 별일 다 있다.
인간 세상이 개판된 게 인간들 탓이 아닌 것 같다.
신선들 물이 깨끗해야 인간 세상 물도 깨끗할 것 아닌가.
“장금이 누나 아신다면서요? 누나에게 좀 빌리시죠?”
“최근 식당 리모델링 들어가서 포인트가 없단다.”
“네에…….”
내가 보니 리모델링은 핑계고 못 믿어 안 빌려주시는 것 같다.
“황진이 누나 아는데 소개시켜줘요? 누나 포인트 제법 많은 것 같은데?”
“……, 얼마 전에 술 취해서 난동 부리다 인연 끊겼다.”
“아, 안타깝군요.”
이러니 신선은 정규직이 될 수 없는 거다.
신계에 와서도 인간 버릇 못 버리면 어떡하란 말인가.
“여기 벽화 그리면 포인트 벌지 않나요? 그걸로 구입하세요.”
나도 그리 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림 재능이야 다른 신선 부르면 된다.
“태산아. 소개비에 밑에 애들 떼 주고 나면 남는 거 별로 없어.”
“밑에 애들이요? 비정규직 밑에 또 뭐가 있어요?”
“일당직.”
“!!!”
설마 내가 아는 그 노가다 잡부?
“걔들은 나보다 더해. 하루 벌어서 하루 버티는 애들이 많아. 난 그래도 계약기간이라도 있지. 일당직은 그냥 포인트 떨어지면 바로 지옥이나 축생계로 떨어진다.”
“저, 정말 냉정하네요.”
“돈에 눈이 없는 것처럼 포인트도 그래. 신선들 포인트 떨어지면 누가 옆에 가지도 않는다. 윤회의 사자가 다가오면 좋은 냄새가 사라지고 악취가 난다.”
“그래요?”
“신도 불생불멸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 세상과 다른 육신의 제약이 없을 뿐 희로애락은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신선계에서 다들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야.”
신선들과 대화하면서 어느 정도 감지했던 내용이다.
“정규직 되면 뭐가 좋아요?”
“좋지! 일단 사대보험 포인트 다 들어주지. 기본 정년 보장도 된다.”
정규직 얘기만으로도 화선 삼촌 눈빛에 희망이 감돌았다.
같은 비정규직 인생을 살아봤던 나였기에 그 느낌 잘 안다.
마음이 흔들렸다.
“살아서 별 욕심 없지 않았습니까?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풍류남이셨던 걸로 아는데…….”
“그때는 그거고 여기는 여기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세상에서 잘나갔다고 죽어서 잘나간다는 보장은 없다.
화선이 삼촌 말에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인간으로 살 때나 죽어서 신선이 될 때나 기똥차게 한 번 살기로 말이다.
“태산아…….”
다시 한 번 날 부르는 간절한 취화선 삼촌.
“에휴……, 알았어요. 정 그렇게 원하신다니까 떼어드리겠습니다.”
“으아아아아아아! 고맙다! 내가 정규직 되면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으마!!!”
취화선 삼촌이 꽉 껴안았다.
인간 세상이었다면 만나기 어려웠을 희대의 천재가 카르마 포인트에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역시 살아서 뭐든 잘 벌어놔야 했다.
“십장님~.”
그때 회랑 끝 쪽에서 누가 알랑방귀 가득 담긴 목소리를 풍기며 다가왔다.
아니 보인다 싶은 순간 세 명의 신선이 다가왔다.
그런데 몰골이…….
“왜 이제 왔어! 여기 다 채우려면 한참 걸려! 너희들 이런 식으로 하면 바로 지옥 간다!”
“십장님, 오늘따라 왜 그러십니까. 이런 것쯤 후딱 해치울 수 있습니다. 충성!”
“내가 니들 불쌍해서 봐주는 줄 알아라. 얼마 전에 다른 팀 포인트 떨어져서 한꺼번에 축생계로 떨어진 거 알지?”
“피카소 팀요?”
“그래 피카소. 걔들 의뢰 끊겨서 아웃 됐잖아.”
“그 팀 그럴 줄 알았습니다. 모더니즘파 애들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지들만 세상 살았습니까? 그림이 난해하면 누가 알아줍니까? 그림은 직관적인 게 최고죠! 잘난 체하다가 아주 잘 됐습니다.”
말을 뻔질나게 잘 하시는 분이다.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세상에 내가 아는 그 피카소를 대놓고 깠다.
도대체 얼마나 잘난 분이란 말인가.
“삼촌, 이분들 누구세요?”
세 명의 범상치 않은 외국 일당 형님들 정체가 궁금했다.
“얘들? 별로 유명하진 않아서 너 알라나 모르겠다.”
취화선이 코딱지를 후비며 세 명을 무시했다.
그래도 세 외국 일당 신선들은 꿋꿋했다.
“조카세요? 반가워요. 난 고갱이요.”
“네? 누, 누구요?”
“폴 고갱이 나요.”
고, 고갱!
입이 떡 벌어졌다.
후기인상주의 대표적 화가 폴 고갱이 지금 일당직 신선이 돼서 내 앞에 나타났다.
이걸 알면 고갱을 아는 미술 학도들 다 입에 거품 물고 쓰러질 것 같다.
“아냐?”
“그, 그게…….”
취화선이 아느냐고 물었다.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 얘는 세잔.”
더 놀랄 것도 없다.
현대미술의 아버지이자 어머니로 불리는 고독한 선구자.
자신의 그림 인생이 모두 실패했다 생각하고 서명을 남기지 않았던 독특한 화가다.
전율과 절망을 화폭에 담아냈던 폴 세잔.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가 뻘쭘하게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십장 조카에게 잘 보이려는 아부 눈빛.
이거 실화냐?
그리고 마지막 맨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한 남자.
눈에 너무 익었다.
딱 봐도 누군지 짐작이 갔다.
왼쪽 귀를 커다란 붕대로 감고 있는 저 남자.
“고흐?”
***
스윽 스스스슥.
캔버스에 칠해지는 유화의 거친 붓 소리에 모두 숨을 죽였다.
단 한 번도 붓이 쉬지 않았다.
무려 3시간에 걸쳐 쉬지 않고 붓질은 계속 됐다.
거침이 없다.
거대한 대양을 헤쳐 나가는 범선처럼 파도를 갈랐다.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바위산의 산양처럼 오만했다.
‘도, 도대체 저 녀석은 뭐야!’
교수 심철수는 화폭 뒤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학생들 모두 마찬가지다.
4교시가 끝나고 점심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처음 시작은 교수와 타과생의 내기에 불과했다.
심철수 교수는 수강생들에게 자신 있는 자유주제로 그림을 그리라 말했다.
소묘부터 시작해 제한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수업 제안이었지만 3학년 미대생이 주저할 리가 없었다.
재료는 충분했다.
설치된 이젤에 자신들이 자신 있는 작품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평소 하던 수업 방식의 연장이었다.
가벼운 소묘를 대부분 택했다.
3시간 안에 법대생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방법으로는 최상이었다.
그때 법대생 장태산은 떡하니 유화 재료를 꺼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유화가 쉬운 미술 재료는 아니다.
그것도 딱 봐도 이제 구입한 것 같은 새 제품들을 꺼냈다.
미대생처럼 캔버스를 단단하게 이젤에 고정했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유화물감, 유화용 붓, 나이프, 팔레트, 기름통, 린시드유와 테레빈유와 천까지 모든 재료를 꺼냈다.
어이가 없는 와중에 법대생은 이젤을 지그시 쳐다봤다.
손에 붓 일곱 개를 잡았다.
대가들이나 붓을 그렇게 사용했다.
어이없는 시선으로 학생들 모두 법대생만 봤다.
그때 법대생이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미친!’
법대생은 미쳤다.
튜브에서 물감을 바로 짜서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에 도랑이 생길 정도로 두텁게 색이 발라졌다.
도저히 감 잡을 수 없는 외곽선들이 쭉쭉 자리를 잡았다.
초등학생이 그림을 그리듯 제약이 없었다.
색과 형태가 왜곡됐다.
밝고 진한 노란색들이 캔버스를 점령했다.
선보다는 색채를 중시하는 몽티셀리의 화풍처럼 보였다.
화병에 꽂혀 있는 해바라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 고흐!”
수업을 받던 학생 중 누군가 고흐라 외쳤다.
세잔과 고갱과 함께 후기인상파를 대표하던 천재 화가.
고흐라는 말이 던져지는 순간 모두들 전율을 맛봤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해버리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
노란 해바라기는 고흐의 상징적 작품이다.
강렬한 색채와 두꺼운 붓 터치로 완성되어가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질감표현!
아를의 노란 집에서 아침부터 황혼까지 해바라기를 그렸다는 고흐다.
덜덜덜.
심철수 교수의 손에서 시작한 떨림이 온몸으로 번졌다.
‘화신(畵神)이 오셨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환쟁이들은 알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어느 순간 무당들의 강신처럼 자신의 몸을 점령하고 물아일체 상태로 그려낼 때를 말이다.
화신의 재림!
그것도 고흐!
한국대 3학년 3월의 개강 첫날 벌어진 세상 놀랄 대사건.
화신에 점령당한 법대생이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어느새 완성된 그림 한 점.
노란 해바라기 열두 송이가 강의실에 활짝 피어 해맑게 웃고 있었다.
# 114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