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15
114장. 뜨거운 신호
“하아아아…….”
한국대 미대 교수 심철수는 아직도 강의실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강의시간도 끝나고 수강생들은 돌아갔다.
점심시간도 진작 끝났다.
오후 시간도 한참 흘렀다.
그러나 심철수는 떠나지 못했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멍하니 선 채로 해바라기 그림만 봤다.
그림을 그리는 자라면 결코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해바라기가 심철수를 빨아들였다.
수없는 화가들이 도전했지만 그 누구도 고흐를 완벽하게 재현해 내지 못했다.
고흐만이 풍길 수 있는 색채의 광기.
별이 빛나는 밤에서 그려냈던 몽환.
자살하기 직전 15개월 동안 쏟아냈던 200여 점의 작품도 오늘 이 그림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화가의 붓질 한 번은 그의 영혼을 담는다.
심철수는 법대생이 보였던 붓질을 되새김질했다.
번거롭고 건조가 더뎌 대중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유화다.
그러나 화가의 의도가 충분히 표현될 수 있으며 깊고 광택 있는 색감 표현은 큰 장점이다.
그렇기에 모든 대가들이 대부분 유화 작품을 선호했다.
깊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유화만 한 재료가 없었다.
“나보다 더 정확하게 테레빈유와 린시드유를 사용했어. 모든 것들이 거칠고 투박했지만 그것 또한 계획적이었다. 모든 게…….”
법대생은 튜브에서 물감을 짜 테레빈유 통에 살짝 담가 물감을 희석했다.
완벽한 농도 계산이 없다면 불가능한 사용법이다.
후반부에 사용되는 린시드유도 마찬가지다.
수천 번은 유화를 그려낸 거장의 솜씨다.
한국미술계에서는 인정받는 중견작가이자 한국대 교수인 심철수는 자괴감을 심하게 맛봤다.
고흐의 방식 같았지만 철저하게 ‘팻 오버린’의 법칙에 따랐다.
겹쳐 칠하는 물감일수록 오일 함량이 높아야 한다는 유화의 기본 원칙이다.
말이 쉽지 수없는 경험의 반복을 통해서 체득되는 기초이자 고급 기술이다.
“어떻게 노란색으로 이런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대상을 표현할 때 한 가지 색감으로만 사용해서 그린 그림은 대부분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 그 기초이론이 깨졌다.
고흐 같은 대가만이 그려낼 수 있는 단색 표현법.
아직 심철수도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유화를 아크릴처럼 사용했다. 철저한 계산 아래! 아니 그건……, 직감이다!”
블렌딩, 점묘, 나이프 페인팅, 임파스토 같은 기법뿐만 아니라 물감이 건조된 뒤에 사용하는 글레이징이나 바림 기법 같은 걸 아크릴 기법으로 표현했다.
그렇기에 3시간 만에 이런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으으으으음.”
그림에 빠져들면 들수록 신음만 나왔다.
네덜란드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받았던 충격이 다시 살아났다.
청년 시절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며칠 동안 밥맛을 잃어버렸다.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대가 그림은 거대한 절벽 같았다.
그런데 오늘 다시 심철수는 잃어버렸던 충격과 공포를 마주했다.
당장 이 그림을 명가들에게 감정 맡긴다면 고흐의 작품이라고 모두 외칠 것이다.
다만 화풍이 바뀌었다.
고뇌와 절망, 광기를 먹이 삼아 뱉어내던 고흐의 세계관과 달랐다.
눈앞의 해바라기는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따뜻한 햇살 아래 온 생기를 담아 하늘을 향해 꽃줄기를 뻗었다.
광기 대신 평화, 몽환 대신 아름다운 현실을 담았다.
파르르.
심철수 교수 몸이 떨렸다.
교수가 되고 명성을 얻어가자 창작 욕구가 무뎌졌다.
절실함이 사라진 자리에 테크닉만 남았다.
매너리즘이라 불리는 벽에 막혀 창작의 열기가 사라졌다.
그런데 오늘 열화와 같은 욕망이 계속 꿈틀거렸다.
“심 교수! 여기 있었군!”
그때 다급한 목소리로 한 남자가 강의실에 들어왔다.
미대 동기인 차동한 동양화과 교수였다.
“차 교수. 무슨 일이야?”
동양화과 교수답게 평소 행동이 무겁기로 소문난 차 교수다.
그런 그가 잔뜩 흥분한 얼굴이었다.
조심스럽게 손에 화선지 한 장을 들고 말이다.
“세상에, 방금 내가 누굴 만나고 온 줄 아나?”
“누구?”
“화선(畵仙)을 영접했어!”
서양화 쪽에서는 화신이라 불렀고, 동양화 쪽에서는 화선이라 칭했다.
“화선?”
“이 그림을 봐!”
심철수가 보고 있던 그림을 보지 않은 채 차동한은 한 장의 화선지를 조심스럽게 폈다.
세상 귀중한 보물을 내놓는 것처럼 소중하게 다뤘다.
“헛!”
“봤지? 세상에……, 맹호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지? 이 눈빛 봐!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진짜 같지?”
차동한은 맹호도를 감평하며 눈물까지 흘리려 했다.
‘엄청난 실력이다!’
심철수 교수가 서양화 전문이지만 일정 경지가 되면 동서양을 초월하게 된다.
한눈에 봐도 대단한 맹호도(猛虎圖)가 심철수 교수 눈에 보였다.
절벽 위에서 포효하고 있는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
굵은 먹선에 힘이 가득 담겼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기와 매서운 눈빛.
당당하게 뻗어 내린 굳건한 다리.
으르렁거리는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다.
당장 튀어나와 목을 물어뜯어 버릴 것 같은 강맹함이 뿜어졌다.
교교하게 떠 있는 달빛까지 운치를 더했다.
그것도 오로지 먹물로 명암을 표현해 낸 대작이었다.
“자네 작품? 대단해! 진짜 화선을 영접했네!”
절친인 차동한의 심득을 심철수는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학창시절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금상을 차지했던 친구다.
이 정도 그림이면 요 근래 동양화 쪽에서는 최고 작품이다.
화랑에 전시하면 바로 구매자들이 달려들 극최상이었다.
“……, 내 작품이 아니야.”
차동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학원생?”
“아니.”
“그럼 누구?”
“학부생.”
“오오! 동양화과에 천재가 등장했어?”
학과를 떠나 학교를 빛낼 위인의 등장에 심철수는 반색했다.
오전 수업에 자신도 찾아냈다.
두 명의 천재 학부 제자라면 단박에 홍인대를 누르고 한국대가 최고 자리에 오를 것이다.
“어?”
그때 심철수는 그림의 낙관을 봤다.
한쪽 구석에 멋들어지게 쓰여 있는 한자.
“태산(太山)?”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심철수는 급히 고개를 들어 이젤에 걸려있는 그림을 봤다.
“어? 이 그림은 뭐야? 이, 이거 고흐 작품이었어?”
차동한이 깜짝 놀랐다.
한눈에 봐도 유화 그림은 고흐 작품이라 여겨질 정도다.
고흐만의 강렬한 특색이 완벽하게 재현됐다.
하지만 이곳은 미대 실기실.
최소 수십억에서 수백억씩 나가는 고흐 작품이 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고흐가 창작한 12개 해바라기 작품과는 달랐다.
화풍은 비슷했지만 풍기는 이미지와 기운은 아니다.
“T.S!”
차동한은 해바라기 그림 한편에 있는 태산의 약자를 확인했다.
“차 교수.”
“어? 심 교수.”
차동한도 해바라기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고 놀라며 답했다.
오직 고흐만이 흉내 낼 수 있는 해바라기 유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혹시 오후 강의에 타대생이 들어왔어?”
“어! 맞아!”
“법대생?”
“어, 어떻게 알았어?”
“!!!”
차동한의 대답에 심철수는 눈을 부릅떴다.
“장태산!”
“맞아! 장태산!”
***
“뭐죠?”
“뭐가 말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비전공자가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죠?”
“왜 법대생은 그림 그리면 안 됩니까?”
“그 말이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궁금합니까?”
“하아.”
손유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궁금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일 거다.
“한 잔 주세요.”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을 내밀었다.
“수업 끝나자마자 막걸리를 마셔요? 지금 두 단지 째예요.”
“땡겨서요.”
“네? 땡겨요?”
취화선 삼촌의 능력을 한껏 가져다 사용하자 목이 탔다.
톡 쏘면서 달짝지근한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다.
평소 즐겨 먹는 주종이 아닌데 맹호도를 그리는 내내 막걸리만 생각났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강의실 밖은 난리가 났다.
수십 명의 미대생들이 내가 나타나자 수군거렸다.
3시간 만에 고흐 화풍을 재현한 천재 화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오후 수업에서는 화선이라는 칭호를 획득했다.
내가 나온 강의실에서 환호성과 탄식이 터졌다.
시대를 풍미했던 취화선 삼촌의 심득을 그렸다.
빙의가 뭔지 제대로 경험했다.
오후 강의 3학점도 미술 과목이다.
동양화 실기수업에서도 교수와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나의 완승으로 끝났다.
미친 듯 화폭에 빠져 한 마리 맹호를 소환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으르렁거리는 맹호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선이 내렸나며 교수가 나를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손유리가 따라왔다.
그리고 학교 앞 막걸리 주점에 갔다.
큰 뚝배기 막걸리에 파전을 주문했다.
순식간에 그녀와 한 단지를 비웠다.
“손 선배와 막걸리 마시니까 좋습니다.”
“네?”
취화선의 빙의에서 아직 덜 깬 것 같다.
남자의 호기라고나 할까?
절세미녀 기녀들과 술잔을 나누며 그림을 그렸던 취화선 삼촌 심정을 제대로 느꼈다.
아리따운 손유리에게 거침없이 잔을 내밀었다.
그녀는 막걸리를 잔에 채웠다.
꿀꺽.
목젖을 열고 시원하게 막걸리를 입에 부었다.
“캬아!”
술이 몇 잔 위장에 담기자 그제야 숨이 턱하고 트였다.
열정을 불태운 예술가에게 시원한 술은 최고의 선물 같았다.
“신입생 신분인 거는 알죠? 개강 첫날부터 술은 아니잖아요?”
손유리가 상식의 질문을 던졌다.
손유리를 지그시 봤다.
미녀들은 눈빛도 맑았다.
그녀의 검은 수정체가 반짝였다.
막걸리 두 잔을 마신 그녀 눈빛이 촉촉했다.
“손 선배니까 같이 마시는 겁니다. 저 까다로운 남잡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예뻐요.”
“…….”
한 마디에 손유리 선배는 입을 다물었다.
내 눈빛도 뜨겁게 변했다.
취화선……, 이 삼촌 몹쓸 그림쟁이다.
그림 그리고 술 한 잔 들어가자 피가 활화산처럼 뜨거워졌다.
유명한 예술가들이 왜 난봉꾼인지 알 것 같다.
창작의 피로감을 이상한 곳에서 채우려 했다.
손유리 선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거 위험하다!
자꾸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시선이 말을 안 들었다.
이글거리는 뜨거움으로 손유리를 봤다.
화끈하게 보내는 신호.
손유리가 고개를 숙였다.
다 알 것 아는 나이다.
아! 나 오늘 사고 칠 것 같다.
“어! 태산아!”
그때 옆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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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