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17
116장. 돌았다. 그 남자
고갱만의 독특한 화풍이 확실했다.
글을 쓰는 작가에게는 그만의 필적이 묻어나고, 미술가는 화풍이 지문처럼 남는다.
바다와 야자수, 그리고 이국적인 소녀가 화폭에 담겼다.
고갱이 1890년에 타히티에서 그려냈던 독특한 디자인 감각과 대담한 평면성, 단순하면서도 의미 있는 형태, 강렬한 색채의 주제 의식이 그대로 나타났다.
타히티 여인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환상처럼 묻어났다.
고갱만이 창조할 수 있는 정신적이며 에로스적인 염원이 투영됐다.
고갱 특별전에서 봤던 충격이 그대로 손유리를 덮쳤다.
서양화를 그리는 미술학도라면 담고 싶은 대가의 화풍.
자연을 보지만 영감의 원천은 늘 내면에 있다고 주장하던 고갱의 정신이 작품에 그대로 묻어났다.
손유리는 시간을 잊고 그림에 푹 빠졌다.
누가 봐도 고갱의 그림이다.
모작의 천재도 이렇게 그려낼 수 없다.
작가 특유의 화풍과 물감, 붓터치, 담겨 있는 정신세계는 모방 불가다.
그렇기에 대 화가들의 작품이 유명한 이유다.
아무나 따라할 수 없기에 대작인 것이다.
미 발표작이 확실했다.
프로 그림 작가라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림 괜찮아요?”
장태산이 어느새 다가왔다.
“네? 네!”
손유리는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마음에 들면 가져요.”
“네! 이, 이 걸요!”
손유리는 혼이 나가기 일보 직전이다.
고갱의 역작을 그냥 가지라니!
이걸 팔면 상상 불가능한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화판에도 몇 개 더 있어요.”
장태산의 손이 화판을 가리켰다.
마법 주문에 걸린 것처럼 손유리는 화판을 꺼내 살폈다.
대충 던져 놓아 폐기품처럼 보였던 화판.
그곳에 모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헛!”
비명이 튀어나왔다.
손유리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학교에서 봤던 고흐의 또 다른 그림이 보였다.
이것도 고흐 작품이 확실했다.
고갱 작품도 몇 개 보였다.
그만이 그려낼 수 있는 독특한 화풍들이었다.
그리고.
“폴…… 세잔!”
바구니가 있는 정물화다!
그것도 본 적 없는 작품.
그뿐만이 아니라 세잔 작품의 완벽한 특징을 보여주는 사과와 오렌지의 다른 버전도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한없는 감동, 그리고 놀라움, 마지막에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고갱과 고흐, 세잔의 작품이 아니라는 게 확인됐다.
하지만 동시에 이 그림들은 고갱과 고흐, 세잔의 작품이었다.
‘이 그림들 다 태산 씨가?’
손유리는 별 관심 없는 장태산을 봤다.
그의 몸 주위로 아우라가 흐르는 착각을 느꼈다.
장태산이 달라 보였다.
아니 모작이라고 말하기에는 이 작품들이 품고 있는 대 화가들의 화풍에 대한 모욕이었다.
‘천재…… 태산 씨는 신이 내린 천재야!’
손유리는 장태산을 인정해 버렸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한없는 존경심이 솟아났다.
이런 그림들은 교수들도 그려내지 못했다.
오직 세상에서 장태산만 가능했다.
후기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의 화풍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인간 세상에 없을 화가.
손유리는 장태산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화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그림을 잘 그리는 이보다 멋진 이는 없었다.
“그런데 방금 들었던 피아노 연주 어땠어요?”
갑자기 피아노 연주에 대해 묻는 장태산.
“완벽했어요, 라흐마니노프가 살아와도 그렇게 정확하고 명료하게 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특히 맑게 퍼지는 청량한 소리는……, 처음 들어요.”
대한민국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손유리의 평가는 정확했다.
엄마 따라서 세계적 연주가들의 내한공연을 즐겨 들었다.
그들과 비교해도 손색을 따질 정도가 아니라 더 뛰어난 솜씨다.
“그럼 다행입니다.”
“콩쿠르 준비하는 거예요?”
당연한 질문이었다.
이 정도 실력을 사장시킨다는 건 클래식계의 엄청난 손해였다.
“아니요.”
장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오늘 오후 음대 피아노과 강의 신청용입니다.”
“피, 피아노과요? 설마……, 3학년 전공은 아니죠?”
손유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예술대학이 같이 붙어 있어 손유리는 음대 3학년 수업을 대충 안다.
친구들도 몇몇 있었다.
오로지 실기 위주의 3학년 수업.
음대 또한 3학년 실기지도부터는 교수들이 가차 없이 학생들을 지옥으로 추방하기 일쑤였다.
“한국대는 교양과목 들어가기가 왜 이렇게 복잡합니까? 좀 늦었다고 강의를 신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널널한 과목을 신청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하는 저 남자.
“아…….”
차마 손유리는 미친이라는 소리를 뱉지 못했다.
이론수업도 아니고 타과, 그것도 미대와 음대 같은 실기가 중심인 전공 선택 과목을 교양과목으로 신청한 남자.
저 남자……. 돌았다.
그것도 완전!
***
“여기도 곧 떠나야 하나?”
한국대학교 음대 부교수 야울 라이헤르트는 봄이 오는 교정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여러 번 차지한 실력파 피아니스트였다.
깊이 있고 지성적인 해석가로 알려진 그였지만 요즘 매너리즘에 빠졌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흥미를 잃어갔다.
독주회를 비롯해 수많은 협연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 이름값으로 한국에서 첫 번째 가는 대학의 교수직을 맡았다.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미국, 일본, 남아프리카, 이스라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주립대학 부교수직을 맡기도 했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방랑벽이 도졌다.
한 곳에 정착하기에는 그의 피가 용서치 않았다.
흥미를 잃어버리면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났다.
음악과 결혼했기에 아내와 자식도 없었다.
세계적 피아니스트는 주변에 언제나 매력적인 여인이 맴돌았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는 피아니스트라는 직업과 함께 먹혔다.
한국에서도 그의 연애사업은 활발했다.
그러나 머문 지 4년이 되자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마침 뮌헨 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부교수직으로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떠돌다 보니 고향이 그리웠다.
어느새 40대 중반의 나이를 훌쩍 넘었다.
“그래도 이번 학기 강의를 끝마쳐야겠지.”
캠퍼스의 봄이 주는 낭만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제자들에 대한 미련은 많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고라는 한국예술고등학교 출신들이 대부분 입학했다.
그들은 오로지 대학 합격을 위해 기계적으로 피아노를 쳤다.
콩쿠르는 꿈도 꾸지 않았다.
좋은 학벌과 명예를 얻기 위한 학생들이다.
가르칠 맛이 점점 떨어졌다.
악기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그 근본을 잃어버린 학생들의 피아노 연주는 정확했지만 단조로웠다.
깊은 산골의 달짝지근한 샘물이 아니라 완벽하게 걸러진 최신형 정수 물과 같았다.
음계가 틀려도 감정이 숨 쉬듯 살아야 함을 그들은 몰랐다.
몇 년째 가르쳤지만 발전이 없었다.
정형화된 심장은 이미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디딩 띵띵 띠딩~♫. 띠디 띠디딩~♬.
그때 실기지도실로 향하던 라이헤르트의 귀에 낯익은 음률이 파고들었다.
단박에 알았다.
얼마 전 타코마 심포니와 협연 시 연주했던 피아노 소나타다.
라이헤르트가 가장 좋아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라이헤르트 얼굴에 놀람이 번졌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는 감정선이 유독 발달된 피아노 주법이다.
쇼팽의 겨울 같은 차가움으로는 표현 불가능했다.
모차르트의 낭만 가득하고 풍부한 음계도 어울리지 않았다.
베토벤의 광기와 힘으로 엮어낸 강렬한 감정도 안 됐다.
아름답지만 슬프고, 차갑지만 따뜻하며, 부드럽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할 수 있는 자만 오로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선율을 그려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라이헤르트는 충격을 받았다.
빠른 걸음으로 강의가 배정된 실기지도실 앞에 섰다.
20명의 피아노 전공자 중 이번 학기 라이헤르트가 가르칠 네 명의 남녀 학생이 멍하니 서 있었다.
열린 실기지도실에 등이 넓은 한 남자가 보였다.
건반을 칠 때마다 남자의 몸과 근육들이 춤을 췄다.
물 흐르듯 매끄럽기 그지없는 주법.
막귀가 아니라면 지금 엄청난 연주가 펼쳐지는 걸 알았다.
라이헤르트는 숨을 죽였다.
어느새 피아노 소나타는 3악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힘과 기교가 대단했다.
눈을 감고 감상하는 라이헤르트는 가슴을 파고드는 선율에 짜릿함을 느꼈다.
이런 감정을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지 몰랐다.
정확한 터치와 하모니를 이루는 아름다운 선율.
라이헤르트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구경하는 학생들도 귀를 열고 소리에 집중했다.
낡고 오래된 실기지도실의 피아노로 펼쳐지는 소나타의 향연은 그 자체가 음악이었다.
띠잉~♬.
그리고 끝나는 긴 여정.
짝짝짝짝짝짝!
라이헤르트 교수를 비롯해 학부생들 모두 힘껏 박수를 쳤다.
라흐마니노프가 생전에 녹음해 놨던 피아노보다 더 감정 해석이 뛰어났다.
해석을 넘어 건반 하나의 음률들이 심장을 울렸다.
기억에 지워지지 않았다.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라이헤르트도 실현해 낼 수 없었다.
원작자를 넘어선 위대한 연주.
라이헤르트와 학부생들은 명연주자를 보기 위해 실기지도실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에서 초청한 외부 연주자거나 최소한 유학파 대학원생이 분명했다.
학기가 바뀌는 때면 이렇게 모교에 찾아와 과거를 회상하는 이들이 있었다.
기대에 찬 시선으로 안으로 들어서던 그들.
천천히 피아노를 치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큰 키에 날렵한 몸을 자랑했다.
키가 큰 라이헤르트 교수와 비슷했다.
“브라보! 실로 대단한 연주였습니다!”
라이헤르트 교수는 급한 나머지 독일어로 칭찬했다.
피아노 연주자는 피아노로 증명하는 법.
라이헤르트는 자기보다 뛰어난 실력자에게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당장 세계적 필하모니와 합주를 해도 될 실력이었다.
남자가 등을 돌렸다.
“어!”
학부생들이 나이 어린 얼굴에 당황했다.
“!!!”
라이헤르트도 놀랐다.
딱 봐도 너무 나이가 어렸다.
학부생, 그것도 신입생 티가 나는 남학생이었다.
“부끄러운 실력입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고 웃으며 유려한 독일어로 답하는 남자.
절도 있게 짧게 고개를 숙였다.
“누구…….”
라이헤르트가 물었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 강의를 신청한 법학과 1학년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소속과 이름을 밝히는 신입생.
“…….”
그리고 실기지도실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경악을 넘어선 공포가 엄습했다.
갑자기 음대에 찾아온 이방인.
허리케인처럼 3학년 강의실을 휩쓸어버렸다.
# 117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