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23
122장. 공대에서 (2)
이건 뭐지?
제법 큰 강의실이다.
컴퓨터 60여 대가 둥그렇게 원을 그려 5층 정도의 나선형 계단식으로 배열됐다.
독특한 강의실이었다.
순간 내 커피를 빼앗아가는 나쁜 손의 주인공.
딸깍.
허락도 없이 캔커피를 따서 꿀꺽꿀꺽 시원하게도 넘겼다.
“크으으. 카페인 충전 완료!”
여자다.
대충 고무줄로 머리칼을 질끈 묶은 채 내 커피를 단박에 원샷했다.
키는 크지 않았다.
잘해야 163센티미터 정도?
봄기운이 만발한 캠퍼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정색 패딩으로 몸을 감쌌다.
유행 떨어지는 두툼한 뿔테 안경을 꼈다.
패션은 엉망인데…….
‘공대에도 이런 여자가?’
컴퓨터공학부는 타 공과대보다 여학생이 많았다.
그래 봤자 공대녀다.
그런데 원석 같은 여학생이 나타났다.
꾸미지 않았지만 내면의 광채가 바깥으로 발현됐다.
눈빛이 산초알처럼 까맣고 또 유리알처럼 빛났다.
블랙홀에서 홀로 살아남은 별 같은 느낌이다.
이마는 반듯했다.
얼굴 윤곽은 갸름했고 콧날은 오뚝했다.
투박한 안경으로 미모를 감추고자 했지만 더 도드라졌다.
깜짝 놀랄 정도로 얼굴이 오밀조밀 완벽했다.
“신입생 맞지?”
“네.”
“억울해하지 마. 누나는 4학년 온시은이라고 한다. 반갑다. 신입.”
커피를 빼앗고도 거침없이 당당한 그녀.
온 씨라는 특이한 성을 가졌다.
그녀가 서슴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딱 잡았다.
따뜻했다.
“조공이라고 생각해. 진짜 카페인 훅 떨어졌는데 네가 구원해줬다. 앞으로 누나만 믿어라. 누나가 실력이 끝내준다.”
“뭐가요?”
말투가 좀 특이했다.
톡톡 튀는 음색은 귀여웠다.
“3년 전에 교수님에게 들이받아 패스를 못 했다만 그 교수님 학교 떠났다. 그냥 누나 밑에 붙어 있으면 최소 A0다.”
갑자기 만난 4학년 여자 선배 온시은.
날 자기 과 후배로 착각하고 있다.
묻지도 않았는데 과거까지 줄줄이 읊었다.
“저기…….”
“고맙지? 쟤들 봐라. 다들 부러워하잖아.”
입구에서 실랑이하는 우리 두 사람을 강의실에 앉아 있던 컴공과 신입생들이 벙찐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수요일 오후 수업은 컴공과 1학년 전공 필수인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이해 과목이다.
컴공과 학생들은 내가 누군지 궁금한 눈빛이다.
3학년 전공과목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 과목은 간단하게 듣고 싶었다.
교수가 마음에 들었다.
라훌이라는 성을 사용하는 인도 국적의 남자 교수다.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보에 의하면 칼텍이라 불리는 캘리포니아 공대 박사다.
졸업생과 교수들이 무려 32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대단한 학교다.
칼텍은 학생과 교수의 비율이 3대 1이다.
세계에서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하는 대학 서열 1위에 올랐다.
그곳 출신의 박사 학위자들은 각국에서 알아서 모셔갈 정도다.
놀랍게도 한국대 컴공과에 그 학교 출신의 교수가 재임 중이었다.
알고리즘 분야에서 엄청난 논문을 쏟아내는 천재 교수로도 유명했다.
라훌 교수를 만나고 싶었다.
블라드미르에게서 흡수한 프로그래밍 기술에 대해 토론해 보고 싶었다.
특히 수학적 사고력이 엄청나게 요구되는 알고리즘 분야에 요즘 관심이 많았다.
노바 형님의 주특기 중 하나가 바로 수학이기도 했다.
멍청한 바람둥이는 없었다.
세계적 명성을 소유한 노바 형님은 박학다식의 끝판왕 같았다.
블라드미르가 넘긴 수학적 능력도 탁월했다.
녀석이 조국을 잘 만났다면 그 나라는 엄청난 인재를 획득했을 것이다.
“이름이?”
“장태산입니다.”
“이름도 얼굴처럼 듬직하네. 가자. 내 옆자리에 앉아.”
공대생이라 그런지 컴공과 여대생 온시은은 행동도 거침없었다.
초면인 신입생 캔커피를 빼앗아 마실 정도로 간도 컸다.
그녀의 하는 짓이 보면 볼수록 귀여웠다.
피식 웃으며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자리는 교수 바로 코밑이다.
어차피 모르는 사람보다 안면을 튼 여학생이 나았다.
그것도 미녀.
절대 손해 볼 스토리는 아니다.
“저 선배 4학년이야?”
“그런가 봐!”
“웬일이니. 4학년이 1학년 전공필수 과목을 들어?”
“과락 맞았겠지. 이거 필수라 패스 못 하면 졸업장 안 나와.”
“완전 개쪽이네.”
“저 남자는 누구야?”
“우리 과 아니지?”
“타과생 같은데?”
“컴공 과목이 언제부터 만만한 호떡이 된 거야.”
뒤 여기저기서 컴공과 애들이 수군거렸다.
4학년 온시은을 신입생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뒷담화가 제법 강도 높았다.
“시은이 쟤 뭐냐? 영계 찍은 거야?”
“아무리 남자가 고파도 4학년이 1학년을 찍어? 공대 여신 이제 간판 내릴 때 됐네.”
“군대 갔다 온 사이에 시은이 많이 변했다. 술 한 잔 같이 먹자고 해도 쌩까더니…….”
“그래도 1학년 영계는 좀 그렇지?”
“그런데 저 새끼 뭐 저렇게 잘났냐? 오티에서 봤어?”
“우리 과는 아닌 것 같은데?”
뒷줄 구석의 예비역들의 툴툴거리는 소리도 똑똑히 들렸다.
발달한 오감은 쓸데없는 말을 걸러내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온시은 선배는 생글거리며 인터넷에 접속해 쇼핑몰을 둘러보고 있다.
“올해 유행은 어떨 것 같아?”
“뭐가요?”
“뭐긴 뭐야. 스타일 말이야. 날씨가 따뜻해지면 마지막 청춘을 힘껏 발산하고 말 거야. 지겨운 공대도 이제 1년 남았다. 푸흐흐.”
정신이 온전한 것 같지 않지만 관상은 좋았다.
외골수의 전형적인 전문가 관상이다.
인중의 기운이 강했다.
고집스러운 입매가 성격을 대변했다.
한 우물을 판다면 대성할 관상이다.
풍겨오는 기운도 맑고 시원시원했다.
악하게 살지 않았다는 증표 중의 하나다.
“헤어스타일은 샤기컷으로 시작해 베이비 펌이 여름에는 유행할 겁니다. 가을에는 혜교 단발이 대세입니다.”
“응? 뭐? 샤, 샤기컷? 혜교 단발?”
나름 전문적 용어에 공대 선배가 당황했다.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툭 던진 질문에 내가 너무 정확한 답변을 했다.
“구찌에서 올해 선도할 유행 코드로 찍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선배님 키가 좀 작지만,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몸매라 와이드 팬츠에 시폰 프린팅 블라우스도 괜찮을 것 같군요. 지난해부터 계속 유행하는 벨트 코드도 추천해봅니다.”
“…….”
공대 누나가 일본 만화 여주인공 같은 큰 눈으로 쳐다봤다.
노바 형님은 항상 유행의 선두주자였다.
과거 내가 열렬히 좋아했던 혜교 누나의 단발 스타일은 2008년도에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드라마를 타고 대유행을 했다.
빈이 형님은 이때도 잘 나갔다.
재수시절 여학생들이 뱉던 말들을 잊지 않았다.
옷 스타일은 인터넷 서핑하면서 찾아냈다.
노바 형님의 기능을 흡수하고 나서 이런 쪽에 관심도 많았다.
“너……. 누구냐?”
참으로 일찍 물어본다.
“신입입니다.”
“와아아. 요즘 신입생 진짜 무섭다. 너 혹시 그쪽 취향 아니지?”
“여자 엄청 좋아합니다.”
“그, 그렇지?”
여자 좋아한다 말하며 그윽하게 쳐다보자 당황하는 시은 선배.
“그럼요. 그러니까 선배 옆에 앉아 있는 겁니다. 이 강의실에서 가장 예쁘십니다.”
직설화법으로 확 스트라이크를 날렸다.
“!!!”
또다시 눈동자를 키우며 얼굴까지 붉히는 온시은.
얼굴에 활짝 열꽃이 일어났다.
대학교 4학년이라고 해봐야 내 눈에는 앳된 소녀다.
싱그럽게 웃으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앞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인도인 특유의 살짝 그을린 피부색의 남자다.
키는 175센티미터 정도에 알이 두툼한 안경을 꼈다.
딱 봐도 공부 엄청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이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번 학기 강의를 맡게 된 라훌 라오 사티라고 합니다. 앞으로 사티 교수라고 부르면 됩니다.”
활짝 웃으며 사티 교수가 영어로 수업을 시작했다.
“아우. 진짜 영어 수업이네.”
“폭망이다. 어떡하냐.”
한국대 학생이라고 모두 영어에 강한 건 아니다.
수능 영어와 강의용 영어는 차이가 많이 났다.
사방에서 곡소리에 가까운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어려워하지 마세요. 어차피 수업 내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의에서 가르칠 건 별로 없습니다.”
사티 교수는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이번 학기 제 수업 목표는 여러분들에게 최소한으로 능숙한 프로그래머의 갈 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겁니다. 아주 쉽죠?”
최소한의 능숙한 프로그래머?
사티 교수는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를 말만 뱉었다.
한 마디로 열라 빡시게 공부시키겠다는 말이다.
“으으…….”
뒷줄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대 공대가 유명한 이유가 있다.
국책연구에서 한국대학교 공대가 전국 대학의 반절 이상을 따갔다.
공짜가 아니다.
결과를 내놓지 않으면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나랏돈이다.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증거다.
“프로그래머는 기본적으로 컴퓨터 언어에 능숙해야 합니다. 저급부터 고급언어까지 스펙트럼이 넓을수록 대접받습니다. 양산형 코더가 되기를 바란다면……. 전 여러분께 깊은 실망을 감추지 못할 겁니다.”
대충 거저먹지 말라는 경고를 장황하게도 한다.
“제 전공이 알고리즘인 건 아시죠?”
“네…….”
“알고리즘은 프로그래밍의 세포와 같습니다. 수학적 문제를 해결하고 프로세스를 완결하기 위한 규칙의 집합이 바로 알고리즘입니다.”
강의가 쏙쏙 귀에 들어왔다.
“동양적 표현으로 하자면 코딩은 외공이고 알고리즘은 내공입니다.”
“오오!”
바로 학생들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영어식으로는 그 표현이 미진한 부분이 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코딩 능력은 살에 새긴 타투와 같지만, 알고리즘은 뼈에 새겨져야 합니다. 알고리즘은 그 자체가 바로 프로그래머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알고리즘 교수답게 핵심을 짚어냈다.
“앞으로 IT 분야가 진화할수록 보안 개발자나 게임, 웹, 나아가 최근 발표된 아이펀 같은 핸드폰 이용자를 위한 모바일 개발자 등은 대단한 각광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다면 파격적으로 제 연구실에 초대할 수도 있습니다.”
“오오오!”
“여, 연구실…….”
여기 컴공과 학부생들의 최종 목표는 학위를 따서 취직하는 게 목적이 아닐 것이다.
교수 연구팀에 들어가 노하우를 획득해 자기만의 프로그램 개발을 원할 게 분명했다.
프로그램 하나 잘 만들면 대박은 기본이다.
교수가 떡밥 전문가 같았다.
“그 전에 여러분들은 능력을 보여야 합니다. 설마 제 수업에서 파이썬 강의 따위를 원하는 건 아니죠?”
“…….”
교수가 웃으며 농담처럼 던진 말에 아무도 대답 못 했다.
컴공과 미래가 좋다고 해 수능 치르고 들어온 애들이 태반이다.
대놓고 기초는 건너뛰겠다고 선언하는 사티 교수다.
“프로그램 코드를 볼 수 있고 테스트할 수준의 코더는 갈수록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전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이 학과를 졸업하는 시점에 자료구조와 알고리즘, 디자인 패턴 정도는 이해하고 자신이 창조한 프로그램의 문맥 튜닝 정도는 능숙하게 할 줄 알기를 원합니다. 제 꿈 정말 소소하죠?”
씨익 웃는 사티 교수의 모습이 악마로 보일 것이다.
저 정도 수준이면 프로 프로그래머다.
“강의는 간단합니다. 앞으로 수업 시간에 전 이 자리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강의 자료실에 올려놓은 제가 창조한 알고리즘으로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면 됩니다. 궁금하면 언제든 물어봐 주세요.”
알아서 공부하고 질문하라는 무식한 최강 강의법이다.
“과거 여러분들의 선배들이 구구단 계산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더군요……. 물론 그 선배들은 다시 저와 얼굴을 대면했습니다. 저를 정말 사랑하더군요. 피 같은 시간을 투자해서 지루한 제 수업을 두 번씩이나 듣다니……. 정말 비추입니다.”
학생들을 들었다 놨다 잘 가지고 놀 줄 아는 사티 교수.
“4학년 때 듣길 잘했네~. 하루면 끝나겠네. 그치 태산아? 이 누나만 믿어.”
반칙의 천재 같은 온시은 선배.
나를 보고 득의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시은.”
그때 사티 교수가 시은을 불렀다.
“네, 네!”
“4학년은 1학년과 좀 더 달라야 형평성에 맞겠죠?”
“…….”
시은 선배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옆에 앉아 있는 학생과 친한 것 같은데 한 조로 묶어줄게요.”
뭐야? 갑자기 난 왜?
“두 사람은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제가 아주 만족할 만한……. 앱 프로그램 하나 만들어 주세요.”
“애, 앱이요?”
시은 선배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제 아이펀이 세상에 나오고 2007년 10월 초기 안드로이드 프로그램을 구글에서 발표했다.
2010년에나 오정그룹에서 본격적으로 출시되는 갤루시 시리즈.
온시은 선배는 제대로 교수에게 똥을 선물 받았다.
사악하게 웃는 사티 교수.
나도 그를 향해 어둠 속에서 웃어줬다.
앱 개발?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지?
후후후.
# 123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