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25
124장. 성전기사단
“공대 여자들이란…….”
성차별은 아니다.
확실히 인문대나 예술대 여자들하고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내 몇 마디에 정신 회로가 꼬였다.
남자인 척하며 쿨하게 행동하던 온시은도 여자라는 걸 깨달았다.
인생 책임지겠다는 소리에 얼굴이 빨개져서 숨도 못 쉴 정도였다.
청혼으로 착각한 것 같다.
아니 세상에 어떤 남자가 이제 만난 지 몇 시간 밖에 안 된 여자에게 청혼을 하겠나.
온시은의 상상력이 남달랐다.
우직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공대생답게 생각이 단순했다.
난 그녀가 필요했다.
온시은 또한 배신과는 관계가 없는 관상이다.
이것저것 질문에 답하는 모습도 괜찮았다.
블라드미르의 지식을 흡수한 내 질문에 잘도 답했다.
한국대 컴공과가 잘나가는 이유가 있다.
회사가 확장되면 보안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내가 항상 붙어 있을 수 없으니 보조자가 필요했다.
“데이트가 먼저 아니냐고? 하하하.”
온시은의 반응이 정말 웃겼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뒤에 나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갑작스런 청혼보다 데이트가 먼저 아니냐고 물어왔다.
눈빛이 얼마나 순수한지 인간이 침범하지 못한 청정 툰드라 지역의 새끼 사슴인 줄 알았다.
나도 당황했다.
내가 앞뒤 문맥 자르고 말을 던졌지만 거기까지 확장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공대녀와의 데이트라…….”
그 표정에 아니라고 말을 못했다.
순수한 동심을 파괴하는 가짜 산타 같을 수가 없었다.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이것저것 계산하더니 토요일 오전부터 시간이 빈다고 부끄럽게 말하는 그녀 온시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 있는 곳에 가서 차 한 잔 마시며 얘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대학교 들어와 미팅 한 번 못해봤다고 조잘거리는 여자인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카르마 포인트는 왜 주는데?”
온시은이 처녀귀신도 아니고 데이트 약속에 카르마 포인트가 획득됐다.
온시은이 얼마나 갈망했던 일인지 하늘이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저으며 교내 길을 걸었다.
오후 강의가 대부분 끝난 하굣길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걸음을 재촉했다.
아직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이라 서로 대화를 하며 걷는 이들이 많았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로 사라질 풍경이다.
물질이 주는 편리함이 순수한 인간관계까지 침탈한다.
불과 10년 후 세상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걸 알지 못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미래를 살다 와서 느껴지는 괴리감 같았다.
몸은 2008년을 살고 있지만 가끔 2020년의 환영이 보였다.
“그래도 사람들의 따뜻한 심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정치에 눈을 뜬 민중의 힘은 위대했지.”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10년 뒤에도 메이저 언론에 의해 휘둘릴 뻔한 대중이다.
스스로 정보를 찾아내 기레기들의 자판질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승리했다.
낡은 기득권과 썩어빠진 수십 년 정치 암흑기를 단박에 날렸다.
촛불로 일궈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난 보고 왔다.
그렇기에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하는 법이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같이 숨 쉬는 게 이치다.
그 중심에 청춘들이 존재했다.
꿈을 위해 달려가는 저들로 인해 10년 후 미래는 바뀐다.
“태산아!”
길을 쭉 걷다 법대 주차장에 접어든 순간 갑자기 누군가 날 불렀다.
“준식아.”
10조 동기이자 아린 선배와 같이 술잔을 기울였던 친구다.
“너 어디 가냐?”
“강의 끝나서 집에.”
“강의실에서 못 봤는데?”
“다른 과 수업이야.”
“너 법학개론 수업 안 들어?”
“어.”
“1학년 필수잖아.”
“그렇게 됐다. 배우고 싶은 게 따로 있다.”
“헐.”
“대학은 큰 학문을 배우는 곳이다. 준식이 너도 법학에 함몰되지 마라. 그거 인간성에 그렇게 좋은 공부는 아니다.”
“됐다. 법학도가 그러면 안 되지. 난 오늘을 위해 유치원 때부터 살아왔다.”
“대법관이 꿈이냐?”
“대법관까지는 몰라도 판사는 꼭 될 거다.”
“그래, 그 꿈 응원하마.”
“넌 아닌 것처럼 말한다.”
“난 법조인이 꿈은 아니다.”
“뭐야? 그런데 왜 들어왔어? 교수님들께 선전포고까지 했잖아?”
“심심하잖아. 그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미친!”
1학년 동기라고 욕도 해준다.
정겹다.
“어디 가냐?”
“애들하고 술 한잔하기로 했다. 같이 가자.”
스스럼없이 친구로 다가왔다.
“선약이 있다.”
“선약? 누구랑?”
“저기 기다리시잖아.”
내 눈을 따라 준식이의 시선이 옮겨졌다.
“아!”
준식이도 그때 같이 만났던 그녀.
손유리가 내 차 앞에서 빈이 형님 캔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오후 햇살 받아가며 서 있는 그림 같은 손유리.
청바지에 재킷만 걸쳐도 화보다.
한 폭의 미인도다.
“저 선배랑 사귀냐?”
준식이가 조용히 속삭이며 물어왔다.
목소리에 사심이 가득 담겼다.
“관심 꺼라. 판사님 될 때까지 연애는 금물이다.”
“칫. 나쁜 놈.”
“적당히 마셔. 정신줄 놓을 때까지 마시면 안 되는 거 알지?”
“네가 타주던 그 악마의 소맥 칵테일만 아니면 된다. 가서 데이트나 즐겨.”
“고맙다. 친구. 다음에 한잔 마시자.”
“흐흐. 둘이서 말고 저기 미대 선배 후배들 불러주면 좋고.”
“봐서.”
“태산아, 나 너 좋아하는 거 알지?”
고등학교와는 확실히 스케일이 달랐다.
먹을 것 앞에 우정을 팔던 고삐리와 달리 대학교 친구들은 이성을 원했다.
“나 미녀들의 천국 음대 수업도 듣는다.”
“태산아!”
“수고.”
“앞으로 진짜 친하게 지내자. 친구!”
준식이에게 손을 흔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기다렸어요?”
“오늘은 어떤 과를 뒤집고 왔어요?”
“제가 깡팹니까. 과를 왜 뒤집어요.”
“알면서 시치미는 왜 떼죠?”
“알면서 묻는 건 뭐죠?”
“피! 피!”
손유리는 혀를 짧게 내밀었다.
1학년 앞에서 이런 짓 하면 욕먹겠지만 손유리라 괜찮았다.
미녀는 어떤 짓을 해도 보호를 받는다는 고금의 진리는 여기서도 통용됐다.
“무슨 일 있습니까?”
“밥 사줘요.”
“밥이요?”
“그때 홍대에서 사라졌잖아요.”
서련이 일로 화급히 데이트가 종료되었던 그날.
“타요.”
“나 아무 남자 차 막 타는 그런 여자 아닌 거 알죠?”
“네. 아무 집에나 가서 주무시지도 않죠. 제 집 빼고.”
“……. 나빴어.”
그녀의 아킬레스건을 살짝 건드렸다.
본의 아니게 술에 취해 내 집에서 두 번이나 잠을 잔 손유리였다.
말만 나빴다고 그러지 얼굴은 홍조가 가득했다.
좌우지간 여자들의 마음이란…….
삐빅.
차 문을 열었다.
“차 안 가져왔어요?”
미대생들이나 음대생들은 소지품이 많아 대부분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었다.
비싼 과외비를 감당하며 한국대에 진학한 만큼 대부분 있는 집 자식들이다.
“집에 갈 때는 택시 탈 거예요.”
뭐지? 이 분위기는?
택시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술을 마시고 싶은 것 같다.
“데이트 못한 이자라고 생각하세요.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않겠어요?”
손유리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타면서 웃는다.
오늘 보니 살짝 보조개가 패었다.
그런 손유리가 싫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양심이 살짝 찔렸다.
방금 전까지 공대 누나의 마음에 분홍 바람을 불어넣었는데 지금은 미대 누나다.
다행히 아직 이런 행동으로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는 받지 않았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정도가 된다면 어둠의 카르마가 쌓일 건 확실했다.
부우우우웅.
시동을 걸고 경쾌하게 드라이빙을 시작했다.
“음악 들어도 되죠?”
허락하기도 전에 손유리는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그때 마침 흘러나온 노래 한 곡.
브라운 걸스의 신곡 LOVE.
– 이상야릇한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
들리니? 난 네가 필요해.
이런 나를 어서 가져가 줘. I need you~♪.
차 안에 사랑에 빠진 여자의 치명적인 유혹의 언어들이 가득 찼다.
그리고 나와 손유리는 조용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 * *
“기사단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화강암의 돌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성의 망루 회의실.
돌로 깎아 만든 원탁과 의자에 열 명의 인물들이 앉았다.
모두들 짙은 회색의 로브를 착용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로브의 가슴에는 붉은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었다.
“10년 만에 이렇게 다들 모였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형제님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중앙 상석에 앉아 있던 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단장님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묵직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깨진 창문으로 차가운 바닷바람이 스며들었다.
모두들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 경호원들이 삼엄하게 대기 중이다.
창문 너머로 로도스 섬의 웅장한 성벽과 고풍스러운 시내가 보였다.
“성을 빼앗겼던 치욕의 날이 올해로 486년입니다.”
단장의 입에서 과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1912년 이교도의 손에서 섬을 되찾았지만 아직도 치욕의 세월들은 우리 기사단 형제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모두 잊지 말아야 합니다.”
“피의 원한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단장의 말에 기사단원들이 힘차게 외쳤다.
성지 예루살렘을 놓고 벌였던 십자군 원정의 또 다른 중심지 로도스 섬.
성지를 빼앗기고도 오스만 제국의 턱밑에서 독이 바짝 오른 뱀처럼 200년을 버텼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힘의 열세로 무력하게 빼앗겼던 기사단의 성지.
잊지 않기 위해서 기사단은 이곳에서 정기회의를 개최해 왔다.
“이렇게 급히 회의를 주선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루틴 경. 발언하십시오.”
단장이 기사단의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기사를 호명했다.
기사라 불렸지만 그의 신분은 대단했다.
유럽 각국 정보국이 그의 손에 들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근 동양 쪽에서 심상치 않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차분한 루틴 경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천지회와 뱀의 숭배자들이 무언가를 찾고자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물건인가요?”
단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워낙 비밀스럽게 움직임을 보여 정확한 목표물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최근 획득한 정보에 의하면 사람을 찾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라면?”
“중국과 한국, 일본 삼국에 얽힌 전설의 후계자가 태어난 것 같습니다.”
“아!”
루틴의 말에 단장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럼 쇠탈의 후예를 말하는 것입니까?”
“흐음…….”
“시끄러울 만합니다.”
침묵하던 기사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한, 중, 일 간의 투쟁은 신을 섬기는 사이에서 유명했다.
근접한 국가들 간에는 친구가 없다는 게 역사의 정설이다.
땅을 빼앗고 죽이고 파괴하는 운명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특히 한, 중, 일은 심했다.
유일하게 타국을 침범하지 않는 한국이 피해가 컸다.
신화시대에 일찍 유린된 쇠탈이라 불렸던 한국의 수호신.
전장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용맹했던 그가 사라진 후 한국은 수없는 침탈을 당했다.
수호신의 도움이 사라지면 후예들의 힘은 대폭 감소되는 게 이치였다.
그렇기에 쇠탈을 섬기는 후예들도 전란을 많이 당했다.
그런데 그 신의 기운을 받은 후예가 태어났다.
중국과 일본의 수호신을 섬기는 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동요하지 마십시오.”
기사단장의 조용한 목소리가 울렸다.
기사들은 바로 침묵했다.
기사단장의 권위는 과거부터 컸다.
“우리의 1차 목표는 아사신의 후예들을 박멸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잊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 우리가 기울인 노력으로 성배를 섬기는 일족들을 모아 연합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성전기사단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성실한 보호입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버려진 자식들의 후예들인 차일드가 놈들이 경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연합을 무너트리려는 그들의 음모를 분쇄해야 합니다.”
기사단장의 목소리는 은은한 분노를 담았다.
“일단 과거처럼 천지회와 손을 잡겠습니다. 동맹의 약속을 다시 혼인으로 갱신할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뜻은 어떠합니까?”
“동의합니다!”
“그럼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장성한 아들을……. 천지회 지단의 단주의 여식과 결혼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동의합니다!”
기사단장의 선언에 모두 따랐다.
“성배를 위하여!”
외쳐지는 기사단장의 우렁찬 목소리.
“성배를 위하여!!”
뒤를 이어 성배를 수호하는 성전기사단의 기사들이 공간이 떠나가라 뜨겁게 외쳤다.
# 125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