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289
1309장. 댓잎에 가벼이 내리는 말씀
시?
장태산 회장의 뜬금없는 말에 양우석은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두 번째 만남 역시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첫 번째 만남에서도 오늘처럼 난수표 같은 말들이 오갔다.
오늘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복잡한 의미의 담은 듯 은유와 비유가 뒤섞인 말들이 장태산 회장의 입에서 연신 흘러나왔다.
그 의미를 다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재 대표.
두 사람 모두 존경스러웠다.
고언을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격려의 말이었고, 격려라 단언하는 순간 바로 뼈 아픈 충고가 이어졌다.
급기야 이제는 시를 통해 세 번째 고언을 하겠다고 말하는 장태산 회장.
왠지 모를 비장함이 그의 말 전반에 깔렸다.
그의 진지한 표정에 마음까지 엄숙해졌다.
귀를 열고 눈은 장태산 회장의 입을 향했다.
그리고 이어진 어느 여류시인의 시.
“‘댓잎에 가벼이 내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제목이다.
하지만 뭔가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사뿐하게 귀를 자극하며 시작했지만 결코 가벼울 것 같지 않다.
척추를 반듯하게 세우고 허리를 곧게 폈다.
장태산 회장의 눈빛이 더없이 부드럽게 두 사람을 바라봤다.
마치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노인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다.
대신 신기하게도 마음은 더없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 사람들 모다 별에서 왔니라 그 말 믿으라…….
속삭이듯 부드럽게 귓속을 파고드는 장태산 회장의 음성.
울컥.
첫 구절부터 괜히 심장이 짜르르 울렸다.
역시 사투리가 섞여 있는 시는 구수한 할머니표 호박 된장국 같았다.
– 믿고 살면 손해 볼 일 없니라 별처럼만 살면 되니라.
모단 사람 다시 별로 돌아가니라 길을 잃지만 않으면
그 말 믿으라 작자를 만나 사람다움만 지키고 산다면
니도 내도 다 하늘에서 온 별님인 것을 눈치채니라.
“크음.”
양우석은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을 짓누르는 신음을 흘렸다.
짜르르 인간 본연의 심성을 아주 섬세하게 자극하는 시였다.
별에서 와서 별로 간다는 구절은 방황하는 인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성신(星辰)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인간들은 모두 다 우주에서 온 별이라는 걸 깨닫고 별처럼 살라는 당부의 말.
진정 가벼이 전해지고 있는 말이지만 결코 그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생과 죽음의 지독한 비밀이 장태산이 읊어내는 시에 담겨 있었다.
한편으로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진정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작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친구와 가족, 인연자들 모두 아울러 말함이리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도 사람다움만 지키고 살면 된다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무척 쉬운 일이지만 막상 닥치면 어려운 일이다.
– 모다 별로 가니라, 저 봐라, 먼저 간 니들
밤마다 별 헤는 눈들, 고향이 그리워 그러니라.
“…….”
장태산 회장이 고작 몇 구절을 읊었을 뿐인데 김현재의 눈가는 이미 빨갛게 달아올랐다.
울컥 목구멍을 치고 올라온 서러움에 피가 뜨거워졌다.
친구가 말도 없이 가버린 그날 이후 김현재는 세상이 반쯤 무너지는 심정을 느꼈다.
아내 이외에 마음을 유일하게 터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그의 부재가 남긴 아픔은 생각보다 깊었다.
부서지고 상처로 뒤덮인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봤을 때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아무도 모르게 두 무릎을 꿇고 피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허름한 식당 들러 막걸리 잔을 나누며 진심을 다해 걱정했던 대한민국의 진정한 민주화.
기필코 이루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았다.
뿌리 깊은 토착왜구들과 독재세력, 기득권층의 동맹은 쇠심줄보다 질기고 단단했다.
친구 역시 대통령이 되면 그 뿌리를 뽑고 가지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순진한 착각이었다.
믿었던 이들마저 욕망에 사로잡혀 친구와 민주주의를 헌신짝처럼 팔아먹었다.
돈 몇 푼에 당장 눈앞의 이득과 하잘것없는 권력 몇 줌에 서슴없이 등을 돌렸던 이들.
지금도 사방에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쳤다.
권력의 단맛을 한 번 본 자는 욕망을 좇는 기생충들이 된다.
김현재는 눈을 부릅뜨고 살피고 분류해 내고 있었다.
허허하며 소탈한 얼굴로 웃었지만 속으로는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기회를 탐하는 자들과도 기꺼이 손을 잡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병법을 실행해 옮겼다.
그러다 보니 더욱 외로웠다.
밤마다 올려다본 고향 하늘의 별만이 그런 김현재를 위로했다.
살아생전 환하게 웃어주던 친구의 얼굴처럼 빛나는 별.
그 먼 고향에 먼저 친구가 가 있다는 시의 내용에 애써 억눌러왔던 아픔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밤하늘의 뜬 별이 고향이어서 그렇게 매일 사무치게 올려다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 아가, 니는 시로 숨 쉬는 사람
모단 사람보다 어둔 밤 별처럼 더 빛나야 하니라
시는 별이니, 아가 너는 곧장 별로 오니라…….
장태산이 김현재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조용히 시를 읊어나갔다.
“크으…….”
아가라는 말에 김현재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참았던 신음을 토했다.
할머니다.
어릴 적 어린 손주의 손과 머리카락을 쓸어 만져주시던 할머니.
그 할머니의 거칠고 따뜻했던 손길이 순식간에 느껴졌다.
앞으로 살아가야 갈 세상의 파고를 알기에 근심과 걱정, 위로를 담아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할머니의 애타는 마음이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는 곧 맑은 마음이라 했다.
마음이 맑아지면 눈앞의 온 세상이 극락이고 오염되면 불평불만이 지배하는 지옥이 된다는 불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가 곧장 별로 오라는 할머니의 당부였다.
“크으으으……. 크읍…….”
신음이 절제하지 못할 만큼 사정없이 터져나왔다.
심장이 거칠게 울부짖고 어깨가 요동쳤다.
주르르륵.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인생의 버팀목 같았던 친구를 떠나보내고 헛헛해졌던 마음에 위로를 건넸다.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진심으로 위로가 돼 주지 못했다.
조국의 민주화와 평범한 이들의 행복을 위해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우직한 소처럼 걸어왔지만 어깨에 진 멍에는 점점 더 무거워만 졌다.
김현재도 보통 사람이었다.
변호사 신분이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보다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꾸릴 수도 있었다.
가진 자들과 타협하면 돈은 원 없이 쥘 수 있었고 권력 또한 막강하게 누리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일말의 양심이 그 삶을 허락지 않았다.
수많은 밤을 고뇌에 찬 뜬눈으로 보내기 일쑤였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유혹이 그의 삶을 흔들었다.
민주화 운동 시절부터 시작된 유혹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대선을 포기하면 100억대가 넘는 돈을 주겠다고 했다.
자신들과 손잡고 한배를 타면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다는 기득권층의 회유도 끊이지 않았다.
자식과 가까운 주변 사람들을 볼모로 협박도 심심치 않게 해왔다.
그때마다 두렵고 괴로웠다.
반려인 아내의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 없었다면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버티고 있다.
먼저 간 친구들과 민주화 선배들을 위해 이번 생은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희생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때마다 올려다보았던 밤하늘의 별.
……고향이었다.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의 한 생이 저물고 몸뚱이를 벗어던지고 난 뒤 훨훨 날아가 쉴 수 있는 곳.
선배들과 친구들을 만나 술 한 잔 나눌 수 있는 진정한 고향.
그 고향이 저 먼 곳 머리 위였고 그곳에서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태산이 읊어준 시를 통해 이제는 분명히 알았다.
도리없이 흐느끼며 울음을 토하고 나니 답답했던 울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명확하게 깨달아버린 마음의 고향.
– 꿈결처럼 내리는…….
댓잎에 바람이 전하는 말씀.
다독다독
어깨를 두드리네…….
시를 다 읊은 듯 장태산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손길이 되어 김현재의 어깨를 다독다독 두들기며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힘내라고!
걸어야 할 길이 험하지만 그 길의 끝은 있다고!
꿈결처럼 장태산의 입을 통해 전해져오는 위로의 말들은 마친 신이 김현재를 위로하는 듯 들렸다.
“크으으으으으 아아…….”
급기야 김현재는 통곡했다.
상처 입은 사자가 홀로 흐느끼며 그 무게를 견뎠다.
적어도 두 번 다시 오늘처럼 통곡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도 피눈물을 삼키며 속울음을 토했지만 결코 이처럼 통곡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잠시나마 장태산이 전하는 시를 통해 위로받고 쉬고 싶었다.
백척간두에 놓인 대한민국.
아무리 무거운 멍에가 더해진다 해도 그 짐을 지고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다.
하늘의 별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고향에서 기다릴 친구와 한민족을 지켜내 주고 있는 조상님들과 선배님들.
주룩주룩.
김현재는 스스로 쏟아내는 눈물로 위로받으며 용기를 얻었다.
댓잎에 가벼이 내리는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죽어 곧장 별로 가야 그분들을 볼 수 있다.
가다 삐끗하더라도 고비마다 밤하늘의 별을 봐야 한다.
그곳은 김현재와 이 땅에서 살다간 모든 선한 자들의 고향이니.
***
– 이게…… 뭡니까? 시가 이런 겁니까? 음유시인들이 중얼거리는 서사시와 왜 느낌이 다른 겁니까…….
샨트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이계 대륙에도 시가 존재했다.
대부분 영웅들의 일대기를 찬양하는 서사시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읊은 시는 달랐다.
나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한 권의 시집 속에 담겨 있는 시편 하나하나가 다 그랬다.
그중에서 오늘 김현재 대표를 위해서 염두해 둔 시가 ‘댓잎에 가벼이 내리는 말씀’이었다.
천기의 비밀이 담겨져 있었다.
길을 잃지만 않으면 고향이었던 별로 다시 돌아간다는 얘기였다.
착하고 선한 이들은 다시 별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거운 욕망에 물들어 한 생을 살면 끝없이 반복되는 육도윤회를 통해 쌓은 업장을 녹여내야 한다.
가히 신들이 내려와 시를 빌어 생사윤회의 비밀을 슬쩍 귀띔해주고 있는 것이다.
– ……드래곤들 중에서도 신이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르케우스가 왜…… 나를 멸하고 중간계를 수호하려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나쁜 놈이 이런 비밀을 알고 자신만 별로 돌아갔습니다!
샨트리아도 확실히 깨달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 늦지 않아요? 그 말씀은…….
작자를 잘 만나면 된다는 조건이 제시돼 있다.
샨트리아 잘해라.
내가…… 그 작자니라.
– 믿습니다! 저를 반드시 별로 보내주십시오!!!
샨트리아가 내게 굴복한 이유는 신이 되고 싶어서다.
파아앗.
그때 빛이 터졌다.
“!!!”
정말 깜짝 놀랐다.
김현재 대표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아직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양우석 의원도 한마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때 등장한 이들.
– 이 신들은 누구십니까?
샨트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의 세 분이다.
한 분은 김현재 대표의 병실에서 만났던 주무형 대통령.
그리고 나머지 두 분은.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묵묵히 희생하며 전진해 왔던 두 분의 대통령이다.
역사적 과오가 존재하지만 민주주의를 위해 누구보다 헌신했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기득권들과 싸우며 이 땅에 민주주의의 뿌리를 심어 놓으셨던 분들.
– 저 녀석이 보기보다 눈물이 많아. 쯧쯧.
가장 먼저 독재를 끊고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었던 분이 혀를 찼다.
– 마음이 약하지 않나. 그걸 감추고 살아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 쉬운 길이 아니지 않습니까. 평탄했다면 형님이나 저나 살아서 생고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나서야 민주주의의 참맛을 제대로 아는 겁니다. 그렇지 셋째야?
주무형 대통령을 향해 묻는 전직 대통령 중 한 분.
서열이 둘째인 듯했다.
– 제가 뭐 잘난 게 있어야죠……. 저 친구에게 다 떠넘기고 온 죄인이라 마음 아플 뿐입니다.
주무형 대통령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김현재 대표를 바라봤다.
눈빛에 한가득 담겨 있는 측은지심.
– ……너를 제물로 바쳤잖아.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형님 그렇죠?
– 살신성인이었지. 셋째가 그렇게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했을 거야.
– 맞습니다. 그래서 막내가 불쌍합니다. 우리 셋이 좀 더 똑똑하고 용감했으면 저 녀석 가는 길이 평탄했을 것인데…….
– 친일파들이 이리 많을 줄 누가 알았겠나. 내 측근에도 그렇게 많이 섞여 있을 줄이야…….
– 그 새끼들 죽을 때 꼭 찾아갈 겁니다. 지옥문까지 따라가 엉덩이를 걷어차 줄 겁니다!
서열 둘째인 전 대통령이 이를 갈았다.
그런데 세 분이 갑자기 왜…….
– 몸 좀 빌리자.
둘째 되시는 분이 대뜸 말을 건넸다.
몸요?
갑자기 왜…….
– 사용료 줄게.
말이 끝나게 무섭게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오는 세 분.
저기…… 잠시만…….
– 다음에 내가 금강산에서 막걸리 한 잔 대접하겠네.
주무형 대통령이 하회탈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스르륵.
세 분이 동시에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몸이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손을 배 앞으로 공손히 모았다.
그리고.
스윽.
천천히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김현재 대표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
눈물을 흘리다 말고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김현재 대표.
스윽.
그사이 두 번째 큰절이 이어졌다.
내 몸을 내가 통제할 수 없었다.
몸뚱이를 차지한 세 분 전 대통령의 경건한 자세의 의식만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장 회장님…….”
양우석 의원이 크게 당황해 놀라서 날 불렀다.
그사이 이어지는 세 번째 절.
신들에게나 올리는 삼배였다.
마지막 절을 마치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이 목구멍을 태울 것처럼 목소리에 섞여 새어나왔다.
“막둥아…… 미안하다……. 염치없지만…… 조국과 민족을 잘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