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42
141장. 천상비애 (2)
오늘따라 짙은 구름이 햇살을 가렸다.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는 한국대 교정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신입생들로 생기 넘치던 학교도 빗소리에 잠시 숨을 죽였다.
티딩~♫ 팅팅 티리리링~♬.
예술대 음악관 2층 작곡과 3학년 전공 강의실에서 피아노 선율이 열린 창문으로 퍼져나갔다.
차음이 완벽한 연습실이 아닌 전공 강의실에서 울리는 피아노 소나타에는 시린 고음이 실렸다.
“뭐야?”
“…… 분위기 쩐다.”
“교수님 연주 중인가?”
“우리 듣고 가자.”
우산을 들고 지나가던 예술대 학생들이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처음 듣는 곡이지만 정확한 음계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화음은 귀를 행복하게 했다.
창작자들은 언제나 영감에 목말랐다.
소울을 자극하는 피아노 소리가 영혼을 잡아끌었다.
비 오는 날의 감미로운 피아노 소나타.
감상 허영을 300프로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띠리리리링 팅~♪ 티리리리리리리리리링링~♬.
천사들의 합창 같은 밝고 경쾌한 음률이 귀를 자극하자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환상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천생 꽃밭에서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듯 경쾌한 상상이 절로 그려졌다.
피아노 소리가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얽매임이나 속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상의 피로가 싹 날아가는 개운함이 귓속을 파고들어 전신으로 퍼졌다.
예술이 마음을 치료한다는 걸 알고 있는 예술대생들이다.
개강과 동시에 받았던 학업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었다.
감각과 정서가 오픈돼 있어 느끼는 감동이 다른 과 학생들보다 더했다.
눈을 감고 활짝 마음을 열고 이 순간을 즐겼다.
타라라랑!!! 티링! 타라라라아앙! 타리리리리링~♪.
그때 갑자기 곡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갑자기 찾아온 혼란과 방황, 그리고 위기감이 고조된 기운이 피아노 선율에 가득 담겼다.
“!!!”
청음 중이던 이들이 몸을 떨었다.
낯선 곳에서 잠들었다 깨어난 듯한 충격이 휘몰아쳤다.
모두 말을 잃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은 기기묘묘한 상상력이 발동됐다.
몸이 떨리고 피부가 움츠러들었다.
차가운 빗소리가 더욱더 스산한 기운을 만들었다.
꽃밭이 갑작스럽게 눈발 가득한 삭풍에 모조리 얼어붙는 것 같은 풍경이 뇌리에 그려졌다.
발걸음도 얼어붙었다.
짜자자자장 창! 차랑! 창! 타다다랑♩!
건반을 두드리는 격정의 멜로디에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화려한 축제가 갑자기 끝났다.
술에 취해 깨어보니 텅 빈 벌판에 홀로였다.
난 어디로 가야 할까?
난 도대체 왜 이곳에 왔는가?
난……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가!
놀랍게도 소나타를 듣는 이들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동시에 새겨졌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단지 길을 가다 듣게 된 피아노 선율에 홀렸다.
음공의 절대 고수에게 혼을 빼앗긴 것과 흡사했다.
팅…… 티링…… 팅♬.
그리고 찾아온 짙은 허무.
한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린 방랑자가 되었다.
정처 없이 무릎까지 빠지는 설원을 홀로 걷는 처절한 외로움이 덮쳤다.
피아노를 듣고 있던 이들 모두 몸을 웅크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매서운 한풍과 끝없는 눈길만 보였다.
건반 하나가 전진할 때마다 숨이 턱하고 끊겼다.
이보다 세상에 두려운 게 없었다.
나 혼자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다.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하지 못했다.
겨울 호수 같은 차가움을 품고 살았던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3악장 장송행진곡처럼 강렬하고 낮게 울리는 건반들의 춤사위.
“…….”
몸과 마음을 지배당한 청중들은 깊은숨을 삼켰다.
꿀떡꿀떡 마른침을 삼켰다.
띵…… 티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링. 트리리리리리리리~♫.
그리고 이어지는 음계.
신비로운 감정의 대표주자 쇼팽의 녹턴과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화음들이 연속 터져 나왔다.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서정성과 고급스러움이 가미됐다.
고독과 허무함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희망이 담기기 시작했다.
우울하면서 깊이감이 남달랐다.
섬세한 표현력이 극대화되어 도저히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모두 피아노 선율 마법에 사로잡혔다.
더 깊이 우울해지고 있었지만 괜찮았다.
마음이 춥고 시리지만 영롱하면서 유혹적이었다.
묘한 이중성의 극치가 피아노 선율로 모조리 재생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화음들이 영상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이미지로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것이었다.
피아노 소나타가 아니라 협주곡을 능가하는 기교와 스토리가 담겼다.
티리리리리 티리리…… 링…… 팅~♬.
마법이 어느 순간 풀렸다.
외로움과 고독도 버텨내니 일상이 됐다.
홀로 견디던 어느 날…….
그 어느 날 다시 품을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가 심장에 담겼다.
하지만 소나타에 관통되는 선율의 주제는 한 가지였다.
비애(悲哀).
슬프고 슬펐다.
“하아아…….”
“후우우우우.”
속박에서 벗어난 청중들의 길고 긴 한숨이 사방에서 터졌다.
또로로록.
그리고 그들 모두 자신도 모르게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눈물을 흘렸다.
마음 깊이 숨겨져 있던 감정의 선들이 사정없이 자극받아 터져버렸다.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토독 토도독.
봄비가 우산을 두들겼다.
이제 깨어나라고.
“우, 우리 커피 마시기로 하지 않았어?”
“마, 맞아.”
“갑자기 따뜻한 커피가 엄청 생각난다.”
“그렇지?”
“응.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마시자.”
앙코르를 외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듣는다 해도 감당할 자신들이 없었다.
서둘러 청중들은 자리를 떠났다.
다시 피아노 소나타의 마법에 걸릴까 봐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떠나는 그들과 달리 강의실에서 직접 감상하던 이들은 비애의 환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흐으으윽.”
“크으으…….”
“훌쩍…….”
음대 작곡과 3학년 강의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한 음대생들이었다.
밖에서 듣는 것보다 더 완벽하게 심장에 꽂히는 화음의 비수에 저격당했다.
천상에서 지옥, 그리고 고독의 설원을 이들은 직접 밟고 겪었다.
아직도 환영처럼 머릿속에 흐르고 있는 소나타의 저주에 걸려 신음했다.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힌 채 허우적거렸다.
“으음…….”
조용히 강의실 뒤편에 서 있던 교수 차신우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디플롬을 받고 런던대학교와 서식스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차신우는 한국대학교 음대에서 유명했다.
인문학과 종교적 음악을 주제로 발표한 창작곡들이 음악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로열필하모니협회 작곡 콩쿠르를 비롯해 가우데아무스 국제 작곡 콩쿠르 같은 대회에서 여러 번 입선했다.
그런 그가 눈물을 흘렸다.
2000년부터 한국대 교수가 됐던 그는 지금껏 이런 소나타를 들어보지 못했다.
‘쇼팽! 쇼팽이었어! 쇼팽이 분명해!!!’
차신우는 지금 격한 감동과 환희에 빠졌다.
연주회 문제로 지난주 결강했던 차신우는 미안함에 오늘은 일찍 강의실에 나타났다.
그때 때마침 들려온 피아노 소나타의 음률.
낯설었다.
재학생들이 방학 때 새로 창작한 작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몇 소절이 흐르자 차신우는 벼락에 맞아 관통되는 충격을 받았다.
조용히 강의실 뒤편으로 들어왔다.
차신우는 보았다.
듬직한 체격의 남학생이 피아노 선율에 몸을 싣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차신우도 마법의 환상에 갇혀버렸다.
작곡가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서사 가득한 음악 환영 드라마를 보고 말았다.
세계적 거장들이나 창조할 수 있는 경지다.
감히 차신우조차도 따라갈 수 없는 천재들만의 세계였다.
그걸 지금 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버렸다.
‘존 필드의 단순한 반주와 세련되기 그지없는 선율로 A-B-A 가곡 형태를 따라가고 있다. 벨칸토적 A로 환상적 효과를 극대화하며 긴박한 표현과 밀도를 통해 극단으로 치닫는 감동을 준다. 그리고 마무리는 다시 A로 돌아와 공간에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을 주입시킨다……. 이건 완벽한 쇼팽이다!’
불협화음으로 시작하여 불협화음을 거쳐 또다시 불협화음으로 완벽하게 끝낼 수 있는 이는 쇼팽뿐이라며 로베르트 슈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쇼팽 작품 특유의 엄청난 에너지가 축복처럼 종잡을 수 없는 곳에서 터졌다.
쇼팽만의 사상과 드라마틱한 열기가 숨어서 듣는 이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자기 작품에 고정된 프로그램을 허락지 않는 쇼팽만의 고집이 확실히 느껴졌다.
이건 완벽한 쇼팽이었다.
파르르 파르르 차신우는 몸을 떨었다.
‘확실히! 완벽히!’
쇼팽만이 오선지에 욱여넣을 수 있는 음표였다.
후배들이 수없이 뒤따랐지만, 누구도 쇼팽을 앞서지 못했다.
그만의 향기는 그 어느 곳에서든 진한 체취를 남겼다.
“가, 감동이야.”
“천상비애라는 제목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곡이야. 이건…… 인간의 작품이 아니야.”
“다시 듣고 싶다…… 천상의 소나타야.”
울다 깨어난 작곡과 3학년 학생들은 아직 피아노 치는 자세로 등을 보이고 있는 장태산을 향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천상비애! 그래, 천상비애!’
제목과 완벽하게 매치되는 소나타였다.
마지막까지 심장을 쥐어짜던 슬픔의 정체가 제목으로 드러났다.
쇼팽은 아버지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던 마리아 보진스카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나의 비애’라는 제목을 붙여 보관했었다.
이 천상비애라는 곡 제목도 그와 유사했다.
Bb단조 소나타인 장송행진곡보다 더 깊고 슬펐다.
연인과의 이별보다 더 큰 괴로움을 맛보지 않고서는 완성할 수 없는 곡이다.
“저 학생 누군가? 우리 과 학생인가?”
“교, 교수님.”
“누군지 아나?”
차신우는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여학생에게 피아노를 연주한 학생에 대해 물었다.
“우리 과 학생 아닙니다.”
“그래? 그럼 누구?”
“법학과 08학번 신입생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버, 법학과 신입생?”
차신우는 소리치며 놀랐다.
그러자 학생들 모두 뒤를 돌아봤다.
담당 교수 차신우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장태산을 봤다.
그때 쇼팽의 화신이라 여겨도 무방할 법학과 신입생이 등을 돌렸다.
“!!!”
차신우는 2차 충격을 받았다.
한국대에서 아주 보기 드문 훈남이었다.
그것도 체대 학생이라 해도 될 만큼 체격도 좋았다.
무한한 공허를 선사하며 비통한 멜로디로 자신의 혼을 쏙 빼놓았던 장본인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해맑고 밝았다.
“교수님! 수업 전에 피아노를 마음대로 사용해 죄송합니다!”
차신우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장태산은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부터 했다.
“헛!”
그 순간 차신우는 보았다.
장태산과 둘인 듯 하나로 겹쳐 보이는 또 다른 그림자.
“쇼, 쇼팽!”
환영인 듯한 전설이 그를 향해 빙긋 웃고 있었다.
# 142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