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43
142장. 의리의 오만둥이
“…… 뭔가 당한 것 같은데…… 나 이러다 박수무당 되는 거야?”
피아노를 연주할 때 정신줄이 살짝 나갔다.
연주하던 내가, 내가 아니었다.
쇼팽 형님이 나에게 빙의된 것처럼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미친 듯이 달렸다.
확실히 차원이 달랐다.
쇼팽에게 갯값으로 후려쳐 구입한 소나타 하나를 풀었다.
천상비애라는 제목은 내가 달았다.
원래 곡명은 ‘제목 없음 77번’이다.
창작은 했지만 팔아먹지도 못할 작품이라 쇼팽 기억의 한구석에 처박아 놨던 소나타였다.
창밖으로 내리는 봄비가 오늘따라 슬픈 맛이 났다.
예술대에서 놀다 보니 어느새 나도 공감각적 영역이 발달했다.
보이는 것에서도 맛과 향이 느껴졌다.
냄새만으로도 그림이 그려졌다.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인생을 살아도 될 정도다.
아니 이미 습득한 능력이라면 미술계와 클래식 음악계는 다 내 것이었다.
한 달에 한 작품씩 발표해도 죽을 때까지 풀지 못할 악보들이 쌓였다.
그 어렵고 난해하다던 교향곡만 수백 곡이다.
그런 재능(?) 중 이제 몇 개 풀었다.
난리가 났다.
어린 중생들이 쇼팽이 천상에서 느꼈던 생생한 감정이 담긴 피아노 작품에 눈물 콧물 쏟았다.
차신우 교수도 마찬가지다.
새빨개진 눈으로 다가와…… 왜 나를 껴안냐고!
그 정도로 오늘 쇼팽의 피아노는 완벽했다.
내 몸을 빌려 쇼팽이 강림했음을 느꼈다.
쇼팽만이 해석하고 펼쳐낼 수 있는 천상의 슬픔이 건반을 타고 펼쳐졌다.
연주하는 동안에 나도 울고 싶었다.
거지꼴 신선들이 느끼는 신계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비정하고 냉혹했으며 고독한 장소였다.
노량진 쪽방이 생각났다.
창문 하나 없던 그 방에서 느꼈던 감정과 얼추 비슷했다.
쇼팽이 강림하면서 그의 과거 감정을 온전히 느꼈다.
신이 되었어도 가진 것 없는 신은 신도 아니었다.
세상에서의 명성은 다 헛것이었다.
신들 중에서도 최하급 떠돌이 딴따라가 됐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비롯해 유명한 음악가들도 같은 처지였다.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 모든 감정들이 천상비애 작품에 녹아났다.
죽어 신이 되었을 때 느꼈던 날아갈 것 같던 환희가 1악장이다.
2악장은 신도 개털이면 거지꼴을 면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 느꼈던 충격과 공포로 구성됐다.
그 이후로 감당했던 공허함과 고독함으로 3악장이 채워졌다.
마지막 4악장은 그래도 언젠가 포인트 모아 신다운 신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는 감정이 담겼다.
내가 보기에는 개꿈 같지만, 쇼팽은 위기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슬프고 슬픈 천생 하층민 신들의 세계.
쇼팽도 울고 과거가 생각났던 나도 울었다.
그렇게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77번 천상비애는 완성이 됐다.
“포인트 반띵? 와아…… 신종 보이스 피싱도 아니고…….”
바이올린 연주 때와 달리 이번 쇼팽 강림에서는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다.
– 카르마 포인트가 신과 반띵으로 나뉘어 지불되었습니다.
이게 말이 돼?
“재주는 내가 부리고 포인트는 신이 먹네. 허허헛.”
헛웃음이 났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불쌍한 신들 저작권을 후려친 대가라 생각했다.
“쇼팽 형님. 다음부터는 그렇게 마음대로 빙의되시면 안 됩니다~. 알아들으셨죠?”
하늘을 향해 조용히 경고를 날렸다.
일방적인 빙의는 기분이 찝찝했다.
능력의 맞교환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워낙 한이 쌓인 게 많은 쇼팽 신이라 이번에만 봐줬다.
“내공까지 뽑아서 사용하다니…… 신은 신이야.”
빙의가 된 상태에서 내가 운용하는 능력까지 차용했다.
기를 피아노에 담았다.
쇼팽의 과거 기억을 보니 피아노 연주자치고는 손가락 힘이 약했다.
그런 그가 내 몸과 기를 사용하니 피아노 소나타가…….
쩔었다.
짠맛, 단맛, 신맛, 쇠 맛, 그리고 쌉싸름한 음악의 찬 맛을 쇼팽 형님이 인간들에게 허락했다.
그 덕에 다들 울고 난리가 났다.
예술, 특히 음악은 연주자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는 특징이 있다.
“포인트도 벌고 학점은 패스! 흐흐. 무조건 남는 장사다.”
차신우 교수가 내 창작곡이냐고 물었다.
당연히 쓸데없는 양심 후딱 버리고 예스라 말했다.
쇼팽을 평소 좋아했다고 양념을 뿌렸다.
얼마 전 갑자기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연주하다 악상이 떠올랐다고 사기를 쳤다.
난 신들을 만나기 전까지 예술과는 전혀 연이 없는 남고 문과 출신이다.
차신우 교수는 그 말에 유레카를 외쳤다.
“뮤즈의 여신이 임했다고? 착각은 자유셨어.”
뮤즈가 아니라 천생 진흙수저 음악의 신들을 만났을 뿐이다.
학점 A+를 확보했다.
교수는 더 가르칠 게 없다고 선언했다.
다만 악보를 보고 싶다고 간절히 원했다.
“가르칠 게 아니라 형님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야죠. 후훗.”
베토벤 형님의 엄청난 교향악곡은 전달도 안 됐다.
그걸 보면 차신우 교수는 날 신으로 추앙할 것이다.
띠링.
동기 최준식에게 문자가 왔다.
“뭐야? 비로 인해 법대 잔디밭에서 103호 대강의실로 장소가 변경됐다고?”
한국대 법대 대실망이다.
세상에 개강 모임을 학교 잔디밭이나 강의실에서 준비하는 학과가 어디 있나.
지난 생에 경험했던 지방대 법학과는 대자 뼈다귀탕을 돌렸다.
“그래 여기는 서울이니까.”
학교 앞이나 신림동에 100명씩 들어가는 식당이 없었다.
2000년대 초반 학부제가 완벽하게 정착되자 술집도 대형 공간이 필요 없어졌다.
신림동에서 공부할 때 한국대 법대생이 한 말이 있다.
개인주의적 사회 분위기와 어울리는 학부제로 인해 낭만이 사라졌다고 말이다.
“견적을 보아하니 강의실에서 과자에 맥주나 마실 것 같은데…….”
갈등이 일어났다.
비도 오고 추적거리는 학교에서 소주나 맥주를 새우깡에 먹는 낭만은 90년대나 어울리는 장면이다.
이런 날에는 파전에 동동주가 제격이다.
“쩝.”
입맛을 다셨다.
동동주를 생각하자 화선이 형님의 감정이 생성됐다.
“일단 가보자.”
교수님도 참석 예정인 개강 모임에 설마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독 토도독.
아침부터 내리는 봄비가 가슴에 스며들었다.
“세우낙주무(細雨落綢繆) 가랑비가 끊임없이 떨어지니,
전가골사유(磚街滑似油) 길바닥이 기름같이 미끄럽다네.
봉황질재지(鳳凰跌在地) 봉황이 땅에서 넘어지니,
소살일군우(笑殺一郡牛) 한 무리의 소가 비웃는구나!”
그때 입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시 한 수.
아주 멋들어진 시조……는 개뿔!
“진이 누님! 이런 감성만 앞선 조선급 유물 지식은 필요 없다니까요! 삐이이일! 삘이 없잖아요!”
신들의 현대지식 흡수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이런 시조 읊어댈 지식 전달자는 황진이 누님밖에 없다.
요즘 세상에 봄비하고 시조가 가당키나 하나?
소개팅에 나가서 분위기 좋다고 한 자락 읊었다가는 외계인 취급받는다.
“이런 분위기 개입 오지랖은 농경시대나 어울리는 법인데…… 쯧.”
혀를 차고 고개를 저으며 법대로 향했다.
번쩍!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갑자기 관악산에 내리꽂히는 번개 하나.
바위든 나무든 뭐가 맞아도 맞았겠다.
안 쫄렸다.
신들 벼락?
그런 건 안 죽어본 분들에게나 겁낼 쨉이다.
***
“한대성. 너 이것밖에 못해?”
“죄, 죄송합니다. 조교님.”
“교수님들도 참석 예정인데 잔디밭에서 강의실로? 아무리 신입생이라지만 세상 물정 너무 모르는 거 아냐? 대학교 1학년이면 이제 성인이다. 사회생활 이렇게 하고 싶어?”
한국대 법학과 조교 강혁주는 1학년 과대 한대성을 갈궜다.
오티에서부터 자발적으로 나섰던 한대성은 점수를 제법 땄다.
1학년 과대표로 무난하게 선출된 후 이것저것 강혁주를 도왔다.
‘동성이 녀석이 이런 건 잘했는데.’
강혁주는 재작년 1학기 과대표였던 오동성을 떠올렸다.
학교 앞이나 신림동 쪽에 대형 모임 장소가 없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걸 해결하는 게 과대표의 능력이다.
오동성은 강남 호텔에서 개강 모임을 열었다.
강혁주가 기억하는 최고의 개강 모임이었다.
작년에도 오동성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이 됐다.
“아무리 해도 장소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법학과 개강 모임 신청자도 많습니다.”
한대성이 변명을 시작했다.
억울했다.
개강 모임 장소를 알아보기 위해 며칠을 발로 뛰었다.
그러나 학교 앞과 신림동 일대는 만석이었다.
40석 정도 되는 장소들은 이미 다른 과가 선점했다.
개강 모임 날짜가 임박해 어쩔 수 없이 법대 잔디밭을 택했다.
그런데 하필 비가 왔다.
급히 조교를 찾아 강의실을 알아봤다.
조교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니까 과대표잖아!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일이 바로 과대표가 하는 일이야! 특히 우리 한국대 법학과에서는 지금껏 이런 참사가 한 번도 없었다고!”
강혁주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침까지 튀기며 한대성을 몰아붙였다.
“조교님, 흥분 가라앉히십시오. 회장인 제 잘못도 있습니다.”
급하게 불려온 법과대학 단대 학생회장 유학필이 가드를 쳤다.
“알면 됐어 임마! 학생회장이라는 놈이 신입생 일에 신경 좀 써야 하는 거 아냐? 고시 볼 실력도 없는 놈이 눈치껏 움직여야지!”
“…… 죄송합니다.”
유학필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동기들 중에 고시 합격 후 연수원에 들어간 애들도 몇몇 있었다.
유학필도 사법고시가 꿈이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군대에 늦게 갔다.
잘나가던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인생이 꼬였다.
하루아침에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고액 과외를 뛰어 월세와 생활비를 만들었다.
빚 때문에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세상에서 사라졌다.
공황에 빠진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군대에 갈 수 없었다.
겨우 생활비 얼마를 벌어놓고 입대했다.
지금도 얼마 되지 않는 수업료를 아끼기 위해 학생회장을 맡았다.
최악의 경우 선배들 도움을 받아 취직을 해야만 한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일 년에 최하 1,000만 원이 필요했다.
고시원 월세, 식비, 학원비에 스터디 그룹 활동비까지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가난한 학생이 고시 공부한다는 말은 옛날 일이다.
개천에서 용들이 승천하는 시대는 진작 끝났다.
편안한 방에서 잘 먹고 족집게 강사들의 도움을 받거나 뛰어난 스터디 그룹까지 만나야 합격할 수 있었다.
어중간하게 합격해서 변호사 길로 가는 건 최하책이다.
로스쿨 졸업생들이 변호사 시장에 들어오는 순간 완벽한 레드오션 시장이 되어 버린다.
그 사정을 조교 강혁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놓고 유학필 같은 케이스의 학생들을 무시했다.
조교실도 아니고 로비 옆에 위치한 103 강의실 앞에서 열을 냈다.
오고 가는 재학생들과 신입생들이 조교 눈치를 봤다.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강혁주는 강하게 나갔다.
‘새끼들 이 정도면 올 한 해는 죽었다고 복창하겠지. 흐흐.’
과거에도 개강 모임을 위해 강의실을 사용했다.
그런 사실을 강혁주는 감췄다.
“일단 오늘은 어쩔 수 없으니까 강의실을 사용해. 하지만 학필이하고 한대성 네가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보고해라.”
“…… 알겠습니다.”
“네. 조교님…….”
힘없는 한대성과 유학필은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 모습에 강혁주는 마음이 흡족했다.
“그렇게 알고 난 교수님께 보고하러…….”
“거참 너무하시네.”
조교 강혁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삐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강혁주가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타 학교와 달리 한국대 법학과 조교는 생각보다 끗발이 좋았다.
신경질적으로 돌아보며 외치는 강혁주.
“접니다. 조교님.”
활짝 웃는 얼굴의 신입생 하나가 강혁주를 쳐다봤다.
“너, 너!”
“저 아시죠? 법학과 08학번 의리의 오만둥이 장태산입니다. 하하하.”
# 143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