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45
144장. 세상에 순진한 여자는 없다.
“법학과도 여기로 왔다고?”
“어. 방금 전에 버스에서 우르르 내려 연회장으로 가더라.”
“그래?”
“뭔지 몰라도 요리 카트까지 우르르 따라가더라. 총괄 쉐프? 뭐 그런 외국인 요리사까지 들어가더라니까.”
“뭐라고? 총괄 쉐프까지 나왔어?”
“응. 연회장에 뷔페가 차려지는 것 같았어. 음식 냄새가…… 죽이더라.”
경영학과 과대에 선출된 아유라는 인상을 썼다.
‘이번에도 법학과야?’
아유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안의 기대가 컸던 만큼 아낌없이 지원을 받았다.
설립 초창기에는 대한민국 첫 번째 가는 라면회사였지만 계획된 경쟁업체 술수로 만년 2위 신세가 됐다.
공업용 우지를 판매했다는 누명을 쓰다 8년 만에 무죄를 받았다.
경쟁업체와 돈을 받은 언론, 그리고 권력자들이 찍어 누른 억울한 사건이지만 식품업계의 이미지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외환위기 때 경영난까지 겹쳐 화의를 신청했지만, 할아버지의 뚝심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그렇기에 오양식품은 절치부심 후계자들의 능력 배양에 열을 올렸다.
거대 그룹의 계열사로 출발해 후발업체에서 한순간 성장한 농경 그룹을 따라잡고 싶었다.
하지만 돈과 실력, 권력 연줄까지 모든 게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3세 후계자 아유라가 한국대 경영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기업 차원에서 아낌없이 지원에 나섰다.
과대표인 아유라를 위해 호텔 연회장까지 빌렸다.
‘오동성도 없는데 누가 지원한 거야? 총괄 쉐프까지 나왔다면 최소 1인당 10만 원은 잡아야 하는데…….’
대충 봐도 비용이 1억 이상 나올 게 확실했다.
아유라도 회사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개강 모임이었다.
하지만 총괄 쉐프까지 부르지 못했다.
겨우 소규모 뷔페 식단만 차렸다.
그것만으로도 아유라는 부담이 됐다.
“좀 더 쉬다 들어갈 거야?”
“어? 어.”
“그래. 오늘 완전 무리했으니까 좀 쉬어.”
바람 쐬러 나온 여자 동기가 경영대 개강 모임 장소인 연회장으로 사라졌다.
“한번 보고 와야겠어.”
사업체를 키우기 위해서는 자본뿐만 아니라 인재도 필요했다.
아쉽게도 오양식품은 한국대생들이 그다지 선호하는 회사가 아니었다.
대기업과 중견기업 사이로 포지션이 어중간했다.
연 매출액이 3,000억 정도에 당기순이익이 겨우 100억 수준이다.
계열사도 중소기업이었기에 한국대 출신들은 지원서를 집어넣지 않았다.
인맥을 넓히기 위해 한국대에 입학한 아유라는 오양식품을 글로벌 식품회사로 키우고 싶은 야망이 넘쳤다.
경쟁업체와 달리 음식에 장난을 치지 않았다.
창업자인 할아버지 아인창 회장은 국민들이 먹기에 되도록 좋은 재료를 사용하라는 말을 항상 하셨다.
정도경영은 회사 방침이었다.
하지만 인재가 부족한 정도경영은 적자생존의 경쟁사회에서 먹이가 될 뿐이었다.
또각또각.
오늘 교수들과 동기, 선배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한껏 멋을 낸 아유라는 상큼한 아이보리 셔츠, 플레어스커트, 구두까지 차려입었다.
누가 보면 연예인이라 생각할 정도로 완벽했다.
헤어숍에서 머리까지 세팅한 아유라는 법학과 개강 모임이 열리는 연회실로 조용히 다가갔다.
“와아아…… 오늘 요리 죽인다. 요즘 애들 말로 지렸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본다. 총괄 쉐프가 직접 요리해 주는 스테이크라니…… 와인으로 불질해서 구워내는 거 봤지?”
“난 영화에서나 이런 요리가 있다는 거 봤다. 내가 지금껏 먹었던 뷔페는 전부 쓰레기였다.”
“진짜 그 녀석 대단하지 않냐? 걸그룹을 섭외하지 않나, 1시간 만에 호텔 연회장을 빌려서 최고급 요리까지 대접하다니…….”
“5성급 호텔에서 막걸리로 배를 채울 수 있다니……. 이거 신문에 날 일 아니냐?”
“교수님들 입 벌어졌더라. 문자로 경영학과 교수님들 몇 분 초대하던 것 같은데?”
“교수님들도 유치하셔. 경영학과 교수님들과 매일 자존심 싸움이야.”
“흐흐. 그 맛에 교수님 하시는 거지. 대한민국에서 자존심 대결할 교수들이 경영학과 말고 또 있겠냐?”
배를 채우고 밖에 나와 수다를 떠는 법학과 학생들의 말에 아유라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자신이 준비한 이벤트보다 몇 차원 더 높았다.
말을 종합해 보니 총괄 쉐프가 직접 주방 팀을 이끌고 고기를 굽고 있는 것 같다.
이사급 대우를 받는 총괄 쉐프들은 자존심이 엄청났다.
그들을 끌어낼 정도면 소유주나 되어야 가능했다.
‘말도 안 돼!’
“오만둥이 오늘 조교님 박살 내는 거 보니 속이 다 후련하더라.”
“처음에는 그 자식 스포츠카 타고 다녀 재수 없게 봤는데 의리는 있더라.”
“집이 엄청 갑부라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외가 쪽이 재벌이라는 소리도 있더라.”
“그래? 어쩐지…….”
“이제부터 나 장태산 확 민다!”
“뭐야? 벌써 줄 서는 거야?”
“잘나가는 동기 스폰 좀 받으면 좋잖아. 재벌이면 나중에 퇴직하고도 챙겨줄 거 아냐.”
“일단 고시부터 패스해라. 벌써 퇴직 후까지 생각하는 건 오버다.”
“무슨 소리야. 로스쿨 실시되면 우리 찬밥이야. 그러니까 너희들도 태산이에게 잘 보여라. 미래는 모르는 일이다.”
“그래…… 장태산 녀석 뭔지 몰라도 크게 될 놈이다.”
“나도 인정.”
‘장태산! 또…… 너야!’
아유라는 장태산이라는 말에 눈을 감았다.
번번이 자신이 계획한 이벤트를 무너트린 장태산이다.
그가 오늘도 자신을 뛰어넘는 수준의 개강 모임을 열었다.
넘사벽이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타고난 미모를 이용할 줄도 아는 아유라였지만 장태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뭔지 몰라도 비밀스러웠다.
여자가 봐도 매력이 넘쳤다.
장태산. 고등학교 동창인 강현수도 장태산을 신비롭다는 말로 표현했다.
살던 곳에서 상당한 부자라고 했다.
그러나 재벌 혈족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부터 학교를 휘어잡았다는 장태산은 조폭과도 맞짱을 뜬 영웅이라고 했다.
친구나 동기로부터 장태산은 인정받고 있었다.
‘좋아! 장태산…… 너 내가 진짜 찍었어!’
라면시장 만년 2등 회사의 서러움을 알기에 자신의 자존심도 굽힐 줄 아는 아유라였다.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앞으로 크게 될 것 같은 장태산을 자신의 남자로 만들어 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떡 줄 사람 입장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말이다.
***
“술 마셨어요?”
“왜요?”
“얼굴이 달아올라 있는 것 같아서요. 보통 신입생 때 매일 술 마시잖아요.”
온시은은 데이트가 있던 그날 이후 완벽하게 나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첫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현모양처 감으로 보였다.
옷차림도 변했다.
청치마에 아이보리색 스웨터를 입을 정도로 개선이 됐다.
안경 대신 렌즈를 꼈다.
날 만나고 용 됐다.
보기도 참 좋았다.
“어제 개강 모임이었습니다.”
“법대도 신고식으로 대접에 소주 마셔요?”
“아닙니다. 대접에 양주 마셨습니다.”
“와아아…… 역시 잘나가는 과는 달라요.”
온시은이 감탄을 터트렸다.
과가 잘나갔음이 아니라 내가 잘나갔다고 말하지 못했다.
양 키우는 형들도 아니고 자랑질도 격이 있다.
어제 개강 모임은 죽여줬다.
급하게 부탁했음에도 안창수 지배인은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어머니 동창회로 이용됐던 장소가 배정됐다.
테이블과 의자가 넉넉하게 놓였다.
1시간밖에 여유가 없었지만, 뷔페로 기본 요리가 세팅됐다.
100명이 넘는 인원을 소화할 리무진 관광버스 3대도 보냈다.
대학생들 개강 모임답게 소소하게 맥주와 소주, 막걸리가 각 테이블에 깔렸다.
특급 호텔에서는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소주도 판매하지 않으니 통 막걸리는 말해야 입만 아프다.
뿐만 아니라 총괄 쉐프가 팀을 이끌고 나타나 스테이크를 구워냈다.
쉐프가 조리해서 그런지 고기가 완전 죽여줬다.
신입생들 모두 배 터지게 먹었다.
라이브 반주 팀도 불렀다.
교수님들도 대만족하며 술이 대취할 정도로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경영학과 교수님들도 불러 기를 죽였다.
총지배인이 나타나 교수님에게 와인을 따라줬다.
그 양반 눈치가 빨랐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라는 아부를 아끼지 않았다.
법학과 교수님들의 어깨가 올라갔다.
법학과 개강 모임이 이 정도라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하필 다시 호텔에서 개강 모임으로 마주친 경영학과…….
어제도 완벽하게 개발렸다.
그리고 교수님들이 나를 불렀다.
오늘 개강 모임 장소를 훌륭하게 섭외한 주인공이 나라는 걸 알았다.
대접에 양주를 가득 따라줬다.
그냥 원샷으로 마셨다.
교수님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술 잘 마시는 제자가 나중에 큰일 한다나 뭐라나.
은근슬쩍 면접 때 있었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언질을 줬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라는 걸 교수님은 잘 아셨다.
겸손하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렇지만 내년에 시험을 볼 생각이다.
합격하면 전공과목 모두 패스해 주기로 한 약속은 내가 필요했다.
학교에 다니지만 선택해서 다닐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조교도 교수님들 모시고 왔다가 고개를 처박았다.
나에게 제대로 감정펀치를 맞았다.
눈도 못 마주쳤다.
확실히 조교와 내 수준 차이를 보여줘 당분간 날 건들 일이 없었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동기들과 터놓고 술을 마셨다.
따라온 학생회장 유학필과는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마음에 든다고 앞으로 동생 삼겠다는 말에 허락해줬다.
앞으로 날 만나기 전과 만난 이후의 인생이 180도 달라질 거라는 걸 그는 몰랐다.
날 동생이라 부르는 순간 장태산 라인에 자연스럽게 합류한 것이다.
“짬뽕 괜찮네요.”
“그렇죠? 여기 짜장면도 맛있어요. 탕수육도 저렴하고 식감도 바삭해요.”
공대 간이식당에서 온시은과 점심을 먹었다.
짬뽕과 짜장면, 탕수육 한 상 거하게 대접했다.
다 해도 세종대왕 2장도 안 됐다.
한국대학교 식당들은 전체적으로 맛이 괜찮았다.
조미료 냄새가 났지만 동네 중국집보다 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조신하게 밥 먹는 온시은을 보고 있으면 배가 불렀다.
“커피는 제가 쏠게요.”
“학생이 돈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풀코스로 대접하겠습니다.”
“태산 씨도 학생이잖아요.”
“돈 버는 학생이죠. 전문 용어로 CEO.”
“피이…….”
온시은이 웃었다.
귀여웠다.
그녀와 자리를 옮겼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봄 햇살이 부드러웠다.
서서히 움트는 교정의 새싹들이 기지개를 켰다.
식당 옆 카페에서 원두커피 두 잔을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했다.
커피를 들고 공대 벤치에 앉았다.
수요일 오늘 수업은 이제 오후 공대 강의가 끝이다.
오전 바이올린 수업시간에 한 곡 상큼하게 연주해줬다.
베토벤이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가 1,000곡이다.
무슨 도전 노래방도 아니고 개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교수 앞에서 들려줬다.
그리고 또 울음바다가 됐다.
피아노보다는 잔잔했지만, 신들이 받았던 서러움이 온전히 곡에 담겨 있었다.
그렇게 오전 수업을 마치고 공대로 넘어와 점심 데이트를 즐겼다.
“커피도 맛있습니다.”
“공대 커피가 좀 더 진해요. 카페인이 듬뿍 담겨 있어 그런다는 말이 있어요.”
온시은은 참 친절했다.
그렇게 나와 그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셨다.
“수업 들어가죠.”
“저기…… 태산 씨.”
오후 강의시간이 가까웠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온시은이 조심스럽게 날 불렀다.
“할 말 있어요?”
“이거…….”
그녀가 손가방에서 조용히 표지에 분홍 하트가 박혀 있는 A4 사이즈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공대생 아니랄까 봐 연애편지도 색달랐다.
보고서도 아니고…… 후훗.
“이게 뭔가요.”
알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종이를 받아들며 펼쳐봤다.
손편지는 아니더라도 그 가상한 마음을…….
“헛!”
순간 신음이 터졌다.
“왜요? 비싸요?”
“아니 이건…….”
젠장! 연애편지가 아니다!
“슈퍼컴퓨터 견적서예요. 여기저기 제조사에 연락해서 최대한 저렴하게 알아봤어요. 전력이 완벽하게 컨트롤 되는 건물도 하나 필요하고 대형 비상 발전기…… 운용에 소요될 대형 서버…….”
블라블라 떠들며 행복한 상상에 빠진 온시은.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가 전설의 공대 누나라는 걸.
그리고…….
세상에 순진한 여자는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 145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