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80
280장. 책임지다
“영주님! 저희들을 받아 주십시오!”
“자비로운 주인이시여! 받아 주시옵소서!”
하룻밤이 금세 지나갔다.
밤새 잠을 못 잤다.
노바 형님이 주신 최신 동영상은 내용이 심각했다.
낮에는 정숙한 여왕이요 밤에는 아찔한 밤의 여왕이 되는 엘프 누님…….
화끈하고 강렬했다.
커다란 달덩이는 여전했다.
끊고자 했지만 이게 중독성이 엄청났다.
다시 고삐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참고할 만한 내용들이 넘치고도 많았다.
고수는 죽어도 고수였다.
노바 형님은 여성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자 신이었다.
둘은 아직도 신혼 냄새 풀풀 풍겼다.
근엄한 신이 포스를 보이다가도 단둘만 있으면…….
아우!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이건 교육을 빙자한 잔인한 폭력(?)이었다.
내성 앞에 포진한 사람들에 의해 길이 막혔다.
상단을 따라왔던 유랑 난민들을 비롯해 매일 수십에서 수백 명씩 성으로 찾아왔다.
옷은 다 헐벗고 못 먹어 안색은 누르스름했다.
누가 봐도 미래가 안 보이는 사람들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난 규모로 불어났다.
성에 모인 숫자가 수천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노인들로부터 시작해서 아낙들과 아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젊은 성인 남성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치면 오크밥이 될 운명들이었다.
경비를 서던 용병들은 모두 조심스럽게 내 표정만 살폈다.
내 입에서 쫓아내라는 명이 떨어지면 따라야 했다.
탈만을 포함해 휘하 용병단 대부분이 영지 소속 병사가 되기로 약속했다.
단장 탈만이 내 밑에 부하로 들어오기로 하자 모두 두말없이 뒤를 따랐다.
모두가 나에게 호감을 품었다.
오크와의 전투가 벌어져도 솔선수범해 앞장섰다.
직접 요리도 해서 귀족들이 쓰레기 취급하는 용병들과 영지민들을 거두어 먹였다.
영주라고 개폼만 잡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감춰진 능력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마법사에다 정령사이고 신성력까지 소유했다는 말이 내 귀에까지 흘러들어왔다.
용병들 저리가라 오크 대가리를 쪼개는 박력에 뻑 간 용병들도 많았다.
영주가 아니라 용병단장을 맡았어도 그들은 나를 따랐을 것이다.
“영주님…….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 갈 곳이 없습니다.”
“영주님……. 부디…….”
새로운 난민들이 고개를 땅에 박고 자비를 구했다.
무한급수로 늘어나는 난민들, 이 시점에서 영주의 인간성을 다시 확인하려는 듯 용병들이 날 지켜봤다.
타 영주들도 받아주지 않는 떠돌이들이라는 걸 모두 아는 처지였다.
남성들은 대부분 돈 벌기 위해 용병이 되거나 병사로 축출, 농노로 끌려갔을 게 빤했다.
용병들의 과거 모습이 저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영주님이시여……. 과거 저희들은 이 풍요로운 땅의 영지민이었습니다. 집을 잃고 헤매다 새로운 영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부디 가진 것 없지만 저희들을 자비의 신 에레카 님의 이름으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죽어 거름이 되어서라도 영주님과 영지를 위해 보답하겠사옵니다.”
새로운 무리의 촌장이 바들바들 떨리는 노구를 이끌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륙이 혼란스럽다더니 갈 곳 잃은 유랑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모양이었다.
수시로 벌어지는 영지전쟁으로 과부나 고아들도 무수히 넘치고 있다고 탈만이 말해줬다.
세금이 가혹해도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죽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베르샤 백작령에서 마물 때문에 떠났던 저들도 고향이 그리워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나까지 저들을 버린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게 뻔했다.
저녁나절로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왔다.
겨울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가진 것이라고는 목숨밖에 없는 난민 무리였다.
오크들까지 난리를 치고 있으니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흐윽…….”
마음 약한 여인들이 아이들을 안고 뚝뚝 눈물을 흘렸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일 게 뻔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치를 그들은 스스로 깨닫고 있는 눈치였다.
거의 영지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뿐이었다.
상인 사비나도 영주인 내 결단을 기다렸다.
노동력마저도 미천한 떠돌이 무리들.
탈만은 영지 사정이 썩 좋지 않다고 귀띔했었다.
먹을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부족하다는 말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결단의 시간.
그들을 결코 버릴 수는 없었다.
지구에도 난민들이 많았다.
전쟁으로 집을 잃고 떠돌이가 된 수많은 이들이 국경을 넘어 난민 무리에 합류했다.
“다들……. 밥은 먹었나?”
그들에게 물었다.
“…….”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이른 아침 한 끼를 먹는 것도 이들에게는 사치인 상황이었다.
요사이 상단을 비롯해 바쁜 일들을 처리하느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나 혼자 처리하기에는 손이 모자랐다.
때가 때이니만큼 이제는 제대로 영주 노릇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탈만 경.”
“네! 주군. 하명하십시오!”
용병들 중에 유일하게 기사로 임명된 탈만이 절도 있게 답했다.
완장이 사람 만들었다.
덥수룩하던 수염을 깔끔하게 밀어버린 탈만은 기사 냄새가 물씬 났다.
“상단에게 구입한 물건들을 배분하라! 나의…… 영지민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허락하노라!”
“주군의 명을 따르옵니다!!!”
탈만이 우렁차게 외쳤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여, 영주님 만세! 만세!!!”
탈만의 힘찬 대답에 무릎 꿇고 있던 새로운 베커 성의 영지민들이 성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그렇게 시작된 베커성의 어느 가을날 아침.
따사로운 햇살이 축복처럼 듬뿍 모두의 어깨 위에 쏟아져 내렸다.
– 마나 포인트를 엄청나게 획득했습니다.
– 자비의 신 에레카 님이 당신을 기쁘게 눈여겨봅니다.
– 마신이 인상을 강렬하게 찌푸립니다.
***
“엘리스~ 이게 우리 집이란다.”
“엄마……. 정말 우리 집이야?”
“그럼. 착하신 영주님의 내려준 우리 집이야.”
“우아아앙. 나 커서 영주님에게 시집갈 거야.”
밖에서는 한참 집이 배정되고 있었다.
순찰을 돌 때마다 들려오는 사람들의 칭찬에 흐뭇해졌다.
몰려오는 영지민들에게 집을 나눠줬다.
과거 외성 안에 살았던 부유한 자들은 상당수가 전 영주를 따라갔다고 한다.
가진 것 없던 이들에게 무상 주택의 파격적 혜택을 안겼다.
상단이 가져온 먹을 것과 물품들은 정확하게 나누어 배분됐다.
탈만이 기사답게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다.
상단의 상인들도 손을 거두고 도와줬다.
내가 돈이 된다는 걸 그들은 본능적으로 잘 알았다.
– 영지민들의 칭송이 대단합니다. 마나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매우 좋아~.”
지금은 사라진 복리 적금의 마술 같았다.
영지민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포인트 획득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스스로 착하다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늘은 날 착한 놈으로 찍은 것 같았다.
땅! 땅! 따당!
“거기 목재 좀 더 가져와 봐! 지붕부터 고쳐야겠어!”
“클클. 얌손. 너 제법이다. 오크 몸통 쪼개는 것보다 망치질이 더 잘 어울려~.”
“내가 말이야 한 망치한다. 우리 아버지가 목수였다. 그 피가 어디 가겠냐. 으흐흐.”
탈만 용병단 뿐만 아니라 사비나를 따라온 용병들도 솔선수범해서 마을 곳곳을 수리했다.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방금 갓 구운 빵이에요.”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주십니까. 저희 같은 놈들은 밀가루하고 물만 처먹어도 알아서 소화시킵니다.”
처음 아무것도 없던 영지가 활기로 넘쳤다.
배정된 집은 수리할 곳이 많았다.
남자 일손이 부족하자 용병들이 망치와 톱을 들고 찾아가는 서비스로 수리에 들어갔다.
용병들뿐만 아니라 영지민들 중에도 기술자들 섞여 있어 도움이 됐다.
금세 영지민들과 용병들이 한마음이 됐다.
낡은 집들이 새 단장 되면서 생동감이 넘쳤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삽니다~.”
사비나를 통해 엄청난 물품을 주문했다.
다른 황금마차가 곧 도착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성 밖 들판에 멋대로 자란 곡식들도 도움이 됐다.
매일 먹을 것들이 충원됐다.
강에서도 고기잡이가 시작됐다.
물 반 고기 반이었다.
성안은 웃음꽃이 곳곳에서 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집을 얻자 영지민들은 금세 기력을 회복했다.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자에게 허락한 안도와 평안이었다.
외성벽 위를 걸었다.
이곳도 손 볼 곳이 많았다.
곳곳에서 용병들이 보초를 섰다.
턱없이 부족한 숫자지만 성벽 위에 수비병들이 서 있는 모습은 그림이 괜찮았다.
뭔가 전체적으로 안정이 된 모습이다.
사박사박.
성벽은 생각보다 넓었다.
과거 이곳이 고위 귀족이었던 백작이 살던 곳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두둥실 달이 떠올랐다.
어느새 황혼이 사라진 들판에는 별이 뜨고 달도 떴다.
듬성듬성 용병들이 화톳불을 피웠다.
이제 외성이 주 방어벽이 됐다.
성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수천이 넘어갔다.
그들을 모두 내성으로 들일 수 없었다.
“Hello……. my old friend~♫”
찾아온 밤의 광경에 촉촉이 감성에 젖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의 가사가 조용히 입에서 흘러나왔다.
엄마가 어린 시절부터 즐겨들었던 감수성 100점의 팝송.
“……you again~♬.”
이계의 성을 걸으며 부르기에는 이만한 노래가 없었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옷자락이 날렸다.
과거의 기억들이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힘들었던 지난 생의 청춘.
죽음 그리고 다시 태어난 인생과 예기치 않은 돌발 사고의 연속.
이번 생이 한 편의 영화처럼 흘렀다.
갑작스럽게 신들의 계약으로 찾아온 이계의 삶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았다.
슬픔과 웃음이 공존하는 인간들의 치열한 전쟁터와 휴식처.
시선을 돌려 성안을 봤다.
빵 굽는 연기와 수프 끓이는 냄새가 안개처럼 퍼졌다.
내가 없었다면 이 작은 평화도 허락되지 않았을 사람들.
“……Take my arms……. ~♫”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내 손을 잡으라는 가사가 듣기 좋게 울렸다.
“~of silence……. ♬.”
잔잔하고 긴 노래가 끝났다.
그리고 찾아오는 뭉클함.
이제 이곳도 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추억이 함께 쌓여버린 시공간.
“오늘은 이만 안녕~.”
파아아앗.
감성에 젖은 마음이 일자 빛이 터졌다.
나는 잠시 이 느낌 이대로 잠을 한숨 자고 싶었을 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난 다시 나의 치열한 전쟁터로 내던져졌다.
***
“하아아~ 휴우~.”
김한별은 숨이 찰 때까지 춤을 췄다.
별 거지 같은 남자 놈 때문에 파장 분위기가 될 뻔했던 클럽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도대체 뭘 해서 돈을 버는 거야? 술값으로 몇 억은 나왔겠다.’
술이 무제한으로 풀리자 클럽은 일순간 광분에 빠졌다.
술과 음악 그리고 선남선녀들이 쫙 깔린 홀은 극한의 흥분으로 치달렸다.
디제이도 오늘따라 필을 받아 미친 듯 분위기를 이끌었다.
김한별도 약에 취한 것처럼 홀을 누볐다.
목이 마르면 공짜 맥주를 마시며 흠뻑 땀을 냈다.
정체 모를 장태산의 품에 안겼던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았다.
그와 몸이 닿자 잠자고 있던 욕망이 들불처럼 일었다.
멋진 남자였다.
근육은 탄탄하고 넓은 어깨는 듬직했다.
맡아지던 강렬한 수컷 향기는 주변 남자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조금 더 자극됐다면 김한별은 그대로 남자 손을 끌고 갔을 것이다.
‘잠깐 보였던 장면은 뭐지? 도대체 어디야?’
미래를 예지하는 김한별.
사라졌던 능력이 다시 나타났다.
분명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이 예언을 읊었다.
예언을 읊는 순간에는 의식이 통제 불가능했다.
그러나 기억만은 공유됐다.
하지만 다시 나타난 능력은 이상한 곳을 눈앞에 보여줬다.
거대한 중세 시대 성과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본 적 없는 흉측한 괴물들이 분명 보였다.
“나 미친 거 아니지?”
고개를 흔들며 김한별은 룸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 장태산은 다른 약속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룸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시간은 새벽 2시.
갑자기 돌아온 능력을 김한별은 100퍼센트 신뢰하지 못했다.
딸깍 문을 열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뭘 믿고 저렇게 멋있는 거야?’
홀로 술을 따라 자작하고 있는 장태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짙은 우수가 그를 감쌌다.
고독한 방랑객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안아주고 보살펴 주고 싶은 모성 본능을 자극했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자신 혼자만의 착각이어도 상관없었다.
“오빠 심심했지~.”
활짝 웃으며 김한별이 장태산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옆에 바짝 앉았다.
말없이 시원한 맥주가 잔에 채워졌다.
탁자 위에 이미 빈 양주병과 맥주병이 상당히 많았다.
자음자작의 맛을 아는 남자였다.
“오늘 스트레스 몽땅 풀어준 은인에게 러브 샷~”
김한별은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러브 샷을 외쳤다.
무심한 얼굴로 피식 웃는 장태산.
그 웃음조차 김한별을 녹이고도 남았다.
팔과 팔이 걸렸다.
단숨에 뛰는 피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오오~ 오빠 화끈해~.”
러브 샷으로 잔을 비우고 팔을 빼려는 순간.
갑자기 장태산의 왼팔이 김한별의 허리를 감싸왔다.
훅 들어오는 남자의 거친 돌격.
두근두근! 김한별의 심장 박동수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K…….”
이름을 알려줬음에도 국정원 소속일 때 쓰던 호칭을 사용하는 장태산.
천천히, 그의 얼굴이 김한별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엄마야!’
놀라 눈을 감아버린 김한별.
장태산의 거친 숨소리가 얼굴 가까이에서 뜨겁게 느껴졌다.
단단한 팔에 붙들려 버린 몸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귓가에 닿을 듯 말듯 느껴지는 장태산의 숨결.
“누나……. 책임져 줄까?”
“!!!”
‘채, 책임? 날? 오늘? 도대체 뭘???’
눈을 뜨지도 못하고 질끈 감은 채 장태산이 뱉은 말의 의미를 빠르게 되새기는 김한별.
눈을 감고 수많은 생각에 빠진 김한별은 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빙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장태산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 281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