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5
34장. HSBC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점장님을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네? 지점장님요?”
“네. 지점장님요.”
HSBC 서울 지점에 찾아왔다.
홍콩상행 은행.
HSBC그룹 최대의 자회사였다.
홍콩의 발권은행이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스코틀랜드 상인들 중심으로 설립되었으며, 홍콩 반환에 대비해 영국으로 본점이 옮겨간 세계적 은행이다.
한국에서는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세계적 은행이었다.
IMF 당시 서울은행을 먹기 위해 들어왔지만 밀렸다.
우선 협상자 지위까지 얻었지만, 정권과 코드가 맞지 않았다.
란스타 펀드를 통해 외환은행을 꿀꺽하기 위해 다시 공들였지만 탈이 났다.
갑자기 불기 시작한 외국 자본에 대한 경계로 이들은 한국에서 투자를 포기했다.
미래에는 1개 지점만 남기고 10개 지점을 폐쇄해 버린다.
하지만 지금은 한참 열이 난 시기였다.
먹이를 노리는 금융자본은 언제나 배가 고팠다.
그런 은행의 한국중앙지점인 서울지점에 찾아갔다.
급히 마련한 미니멀하고 댄디한 스타일의 정장을 입었다.
그 위에는 감색 슈트를 착용했다.
나름 제대로 갖춰 입었지만 누가 봐도 난 어려 보였다.
손에 가죽 가방을 들었지만 딱 봐도 신입 보험회사 영업사원 분위기다.
“예약하셨습니까?”
당황하던 안내 데스크 여직원이 웃으며 물었다.
직업 정신이 투철해 보였다.
“아닙니다.”
“그럼 곤란합니다. 스티븐 벤슨 지점장님께서는 예약 없는 방문을 사절하십니다.”
“대형 비즈니스를 위한 방문입니다. 이 서류를 보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이런 곳에서 만나달라고 사정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
나 같아도 거절이다.
서류를 만들었다.
다른 거 별거 없다.
지금껏 투자했던 각 증권회사 총 수익계좌를 인쇄했다.
그 주식 평가액과 잔액이 무려…….
“보여주시면 알 겁니다.”
“네? 네에…….”
절대 쫄면 안 될 일이다.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폼을 잡았다.
난 잡상인도 아니고 당신들에게 돈을 벌어주기 위해 찾아온 손님이라는 이미지를 풍겼다.
안내 데스크 직원도 그런 내 기운을 파악했다.
조심스럽게 서류를 받아 어딘가에 인터폰으로 연락을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네.”
HSBC 은행을 찾는 개인은 드물었다.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일반은행이 아니다.
기업이나 은행 같은 큰 먹이를 노리고 쳐놓은 사냥꾼의 숙소다.
분위기 파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오래간만이네.’
이 은행에 몇 번 온 적이 있다.
은행이 있는 종로 중구는 내가 다니던 증권회사와 가까웠다.
여름날 커피 들고 시원하게 쉬었다 간 적도 있었다.
미래보다 세월의 흔적이 덜했다.
묘한 감흥이 일었다.
시간 회귀자만이 맛볼 수 있는 감정이다.
미래였던 과거와 현재인 과거가 뒤섞였다.
이럴 때마다 회귀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지점장님이 방문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안내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19층 건물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숭례문이 보였다.
대한상공회의소도 얼핏 보인다.
내가 과거 놀던 곳.
“…….”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회귀했어도 이곳까지는 난생 처음이다.
지점장 직급이지만 한국 홍콩상행 은행의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대기업 임원들이나 방문하는 자리다.
띵!
맑은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안내 직원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개를 숙였다.
문이 열리자 30대 중반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점장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비서 강윤무입니다.”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직장인들 특유의 격식 있는 짧은 인사를 나눴다.
“이쪽입니다.”
강윤무 비서는 나를 안내했다.
바닥에는 회색 양탄자가 깔려 있어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점장실에 다다랐다.
똑똑.
고위직들은 한 번 만나는 것도 쉽지 않는 법이다.
강윤무 비서는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지점장이 지켜보지도 않는데 예의를 잃지 않았다.
좋은 아랫사람의 표본이다.
“들어와요.”
악센트가 살짝 들어간 영국식 영어가 들렸다.
본사에서 파견된 지점장은 영국 출신인 것 같다.
문이 열렸다.
강윤무 비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귀족 집안 출신인가?’
들어가자마자 마주한 장면은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오는 숭례문의 전경과 시원한 대로였다.
그렇게 높지 않은 건물이지만 시야가 훤했다.
그리고 눈에 띄는 지점장실 인테리어.
북유럽식 엔틱 계열의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원목 가구가 주였다.
커다란 붉은 마호가니 책상과 벽면을 채운 책장.
컴퓨터 모니터 한 대와 골프 연습 도구, 목재 대형 지구본이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기품이 넘쳤다.
돈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품격을 엿보는 것 같았다.
“하하, 어서 와요. 미스터 장~.”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티븐 벤슨 지점장님.”
“오오! 발음이 아주 좋습니다! 영국 유학파 출신인가요?”
“아닙니다. 집에서 독학했습니다.”
“대단해요!”
언어학자 크리스 반스데일의 조언이 먹혔다.
내가 보낸 영국식 영어 악센트와 성조에 지점장은 활짝 웃었다.
첫인상이 나쁘지 않게 박혔다.
스티븐 벤슨도 인상이 좋았다.
키가 큰 멋들어진 유럽 중년 신사다.
금발 곱슬머리칼이 영화배우 저리 가라였다.
양복 대신 체크무늬 카디건과 갈색 구두, 회색 바지로 멋을 냈다.
살짝 기른 콧수염도 어울렸다.
보통 한국 남자들은 주저할 수밖에 없는 패션이다.
“자리에 앉아요. 차 좋아하나요?”
“물론입니다. 홍차를 사랑합니다.”
“다행이군요. 강 대리도 한잔할 텐가?”
“넵! 지점장님!”
홍차에 대한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한국 일반인이 홍차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런데 떠오르는 홍차의 이미지.
입에 침이 고였다.
따뜻한 고품질 홍차에 설탕 한 스푼으로 맛 조절을 하면 느낄 수 있는 맛이 연상됐다.
크리스 반스데일이 심어놓은 기억의 부작용인 것 같았다.
스티븐이 직접 홍차를 내렸다.
우리나라 은행 지점장들과 행동이 완전 달랐다.
“홍차는 333 법칙을 따르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3그램, 3분, 300ml가 기본 정석입니다.”
스티븐은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본 내가 영국식 발음을 했다는 이유로 직접 홍차까지 따라줬다.
내가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융숭한 대접이었다.
“마셔 봐요. 오늘따라 향이 더 죽이는군요.”
어린 사람에게도 깍듯하게 존칭을 사용했다.
나이 어린 나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한다는 뜻일 것이다.
잠시 티타임 시간을 가졌다.
내가 익숙하게 홍차를 마시자 흥미롭게 날 봤다.
“맛있습니다. 지금껏 제가 마신 홍차 중 최고입니다!”
“정말요? 하하하. 빈말이라도 고마워요.”
정말 최고다.
설탕 살짝 넣어 마시는 홍차는 피로와 긴장을 풀기에는 최상의 음료였다.
입맛에 딱 맞았다.
“그런데 미스터 장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내가 자료로 봤던 천문학적인 숫자가 믿기지가 않아요. 후하게 봐도 대학생 같은데…….”
“한 달 뒤면 고3입니다.”
“고3? 하이스쿨?”
“네. 하이스쿨 학생입니다.”
“오! 마이 가아아앗!”
진짜 놀라는 스티븐이다.
증권계좌에 기록된 정보로 이름은 알았지만 생년은 몰랐을 것이다.
“장태산 씨, 지금 장난하시면 안 됩니다.”
강 대리도 놀라며 주의를 줬다.
“민증 보여드려요?”
품에서 민증과 학생증을 동시에 꺼내서 보여줬다.
“지저스…….”
스티븐은 왜 신을 찾는지…….
강 대리는 헉 하고 입을 벌리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보여준 총 주식 계좌 잔고는 현재 2,500억이다.
일개 고등학생이 주식 투자로 그 금액을 벌었다는 게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지점장님 차가 맛있습니다. 한 잔 더 부탁해도 될까요?”
놀라는 그들과 달리 난 여유가 생겼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가 따로 있지만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남자 통장에 저 정도 돈이 꽂혀 있다면 재벌들 앞에서도 어깨 쫙 펴도 된다.
재벌이라고 해서 바로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주식은 얼마 안 된다.
“미스터 장……. 그런데 나를 찾아 온 이유는 뭔가요? 자금을 예치하기 위해서인가요?”
홍차를 한 잔 더 따르며 지점장 스티븐 벤슨은 조심스럽게 날 봤다.
내 나이와 통장의 액수가 뭘 말하는지 그도 알 것이다.
앞으로 엄청난 잠재 고객이자 투자자가 될 수 있는 나였다.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네, 반대요?”
절대 실수로라도 하대하지 않는 스티븐.
고객의 중요도는 나이가 아니라 돈이라는 걸 은행원인 그가 몸소 보여줬다.
믿음이 가는 영국산 아저씨였다.
“돈 좀 빌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네? 돈을 빌려요?”
“네. 원화로 말고 미국 달러……. 그걸 빌려주십시오.”
돈 빌려 달라면서 난 떳떳하고 뻔뻔했다.
“그 말은…….”
“홍콩에 투자법인 계좌를 열 예정입니다. 그곳으로 대출을 받고 싶습니다.”
“아!”
내가 가진 돈은 대한민국 안에서만 효력이 발생했다.
외국에 투자하고 싶어도 법인도, 사업체도 없었다.
상장 기업이라도 하나 구입해서 일을 벌여도 시간이 너무 걸렸다.
내가 원하는 큰 판.
곧 다가올 거대한 판을 쓸기 위해서는 판돈이 많이 필요했다.
그것도 한국 원화와 전혀 관계가 없어야 한다.
비밀스런 작업이라는 걸 스티븐이 모를 리 없다.
“법인은 있습니까?”
“아니요. 내일쯤 홍콩에 갈 계획입니다. 스티븐이 도와주시겠습니까? 사례는 섭섭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홍콩상행 은행의 모기업인 HSBC그룹은 은행업뿐만 아니라 증권, 투자회사 같은 여러 자회사를 거느렸다.
큰물에서 놀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알겠습니다. 미스터 장은 저희에게 큰 고객이 될 것 같군요. 그런데 대출 자금이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부모님 동의는 가능하겠습니까? 담보는 증권계좌입니까?”
일이 술술 풀렸다.
내가 나이는 어리지만 그는 날 한 명의 초우량 고객으로 대했다.
멋졌다.
저게 바로 프로다.
내가 나간 뒤에 뒷조사를 하겠지만 지금은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아마 궁금해 미칠 거다.
내가 주식으로 돈을 쓸어 담은 비밀 말이다.
“증권계좌를 담보로……. 미화로 1억 달러를 원합니다.”
“허업!”
겨우 1억 달러에 놀라는 스티븐과 강 대리.
이 사람들아 뭘 그리 놀라나.
나 아직 큰 판 시작도 안 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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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