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369
368장. 상사화 (2)
‘내, 내가 왜 떨리는 거지!’
고연지는 발표 수업도 곧잘 했다.
장학금을 놓치지 않을 만큼 인문대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학생회장을 비롯해 여러 가지 감투를 썼다.
집에서도 간 큰 막내딸이라고 불릴 만큼 매사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시를 처음 읽었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숨은 배경을 알게 되자 문자들의 나열처럼 보였던 장태산의 시를 가볍게 대할 수 없었다.
절절한 여인의 애모와 묵언승의 고행이 말만 들어도 알알이 가슴에 박혔다.
마음껏 사랑할 수 없기에 더욱더 애틋했다.
세상을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간 젊은 묵언승.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향해 사랑에 빠진 여인의 심정…….
남 얘기 같지 않았다.
장태산이 자신을 멀리한다는 걸 고연지는 본능으로 알았다.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호감을 갖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장태산 같은 남자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연지의 심장을 처음으로 제대로 흔든 사람이었다.
짧은 스토리 설명이었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과 상상 속의 인물들.
혹여…….
이 생에 내가 그대를 만나지 못하고 떠났거든
선 붉은 핏빛 애절한 한을 품고 간 줄만 아오…….
장태산의 음성에 실린 묵직한 시어들.
둥둥 귓속을 울리며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
고연지 터져 나오는 신음을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마치 지금 눈앞에 젊은 묵언승이 서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연을 향한 묵언승의 뜨거운 심정이 느껴졌다.
그것도 자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상사병까지 앓았다던 여인을 향한 애절함 말이다.
나를 기다리는 이는 말없는 묵언 수행승인가
팔을 뻗어 둥근 꽃자리는 만져도 돌부처가 따로 없소.
가늘고 여린 몸을 어루어도 어찌 이리 무반응일고.
고연지의 떨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애절한 감정을 싣고 강의실을 울렸다.
돌부처 같은 묵언승을 바라보는 민가 여인의 속 타는 사랑의 고백 같았다.
파르르.
고연지는 울컥 칫솟는 감정이 뜨겁게 끓어오름을 억지로 참았다.
마주하는 묵언승의 고뇌에 찬 시선.
나란히 서 있는 장태산의 모습이 자꾸 시 속의 묵언승 같아 보였다.
나 떠난 뒤 그대 한발 바로 뒤쫓아 피어
이후 닥친 징한 폭염을 다 견디고
나 보기를 열망하였다는 소리 뒤늦게 접하였소.
묵언승의 안타까움이 시 구 한 소절 한 소절에 그대로 담겼다.
수행 중이었기에 세상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리라.
고연지는 시의 공간과 시간 속에 갇혀 버린 초월적 환상에 빠져들었다.
산속 암자에 앉아 있어도 귓가에 들려왔을 소문.
그 소문의 실체를 알게 된 묵언승, 자신을 사모하는 처자가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침묵하던 묵언승의 그 목소리, 그 심정을 온전히 고연지는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회초리보다 매섭게 온몸을 후려치는
한여름 소낙비에 꺾여 썩어져 거름이 되며
단 한 번 눈 맞추지 못한 님 생각에 나는 일주문 앞에서…… 요절하오.
서로 마주칠 일 없는 상사화의 꽃과 잎.
감히 고결한 묵언승을 사모한 죄가 너무 컸다.
아마 탑돌이가 있는 날이었을 것이다.
첫사랑에 빠진 민가의 처자는 그 때 번뇌를 끊고자 수행하는 젊디젊은 수행승을 봤을 것이다.
속세를 등진 수행승의 모습은 또 맑고 깨끗했을 것이다.
어쩌면 묵묵히 부처 앞에 삼천 배를 올리는 묵언승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사랑하지만 단 한 번도 서로 눈길을 마주치지 못한 짝사랑이자 첫 사랑.
이제 피어나기 시작하는 봄 새순 같았을 동네 처자의 처음 사내를 향한 사랑.
그 지독한 열병에 처자는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어느새 고연지 눈망울에는 눈물이 쏟아져 내릴 듯 담겼다.
묵언승을 사모하는 여인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나는 붉소…….
묵언승의 피는 뜨거웠다.
세상의 욕심과 번뇌를 버리고자 했지만 그의 붉고 뜨거운 피는 팔팔하게 살아 수행을 방해했을 것이다.
나지막한 장태산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울렸다.
강하지 않고 부드러운 잔잔한 고백 같지만 시 속의 내용은 그것이 아니었다.
부처 앞에 모든 걸 내려놓고자 했던 구도자는 아직 세상 것을 모두 다 비워내지 못했다.
쌓인 한을 각혈로 토한 흔적이요.
그대는 어떤 모습이오, 혹 나의 주검을 본 일은 있소.
민가의 처자처럼 묵언승도 세속에 대한 끝없는 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수행을 지속하는 구도자는 살아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그는 죽은 이와 다를 바 없었다.
장태산이 고연지에게 묻는다.
고연지가 마주하고 있는 그는 지금 완벽한 묵언승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건 도대체…….’
양유종 교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시의 내용이 이렇게 깊게 가슴을 울리며 다가올 줄 몰랐다.
한 편의 소설이자 연극이며 한 개인의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짧은 시어들이 편지처럼 오갔지만 낭송하는 두 사람의 에너지가 엄청났다.
“흑…….”
“아.”
강의실에 짧은 비탄의 탄성이 찼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장태산이 뱉는 독백은 그 무게가 달랐다.
깊게 가라앉은 공기.
누구 하나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혹여…….
고연지 역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훅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상사병을 앓는 민가의 여인처럼 장태산을 앞에 세워두고 한없는 그리움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피어 일주문 앞이거든
님을 부른 이가 나인 줄 아오…….
낭송을 약속한 시가 끝났다.
또로로록.
고연지 눈에 가득 찼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그대로 볼을 타고 흘렀다.
사랑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치명적이고 아팠고 아름다웠다.
이번 생에는 만날 수 없는 두 남녀.
그렇게 처음으로 일주문 앞에서 생(生)과 사(死)로 비켜갔던 것이다.
강의실 모든 이들이 일주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일주문을 벗어나지 못한 묵언승과 그 앞을 주검이 되어 한 바퀴 휘돌고 멀어지는 처자의 꽃상여.
일주문 옆에 핀 상사화의 붉은 꽃은 그 어느 해보다 핏빛에 가까운 붉은 빛으로 피었을 것이다.
짝……. 짝짝.
한 편의 완벽한 퍼포먼스가 조용히 막을 내리자 양유종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박수를 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진한 감동.
애절하기에 더 아팠고, 아팠기에 더 선명하게 그림이 머릿속에 남았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짝!
강의실 학생들도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젖어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다.
시가 이렇게 온갖 맛을 다 전하면서 달콤할 줄 누구도 몰랐다.
짧은 한 편의 시는 대작 영화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흐으윽…….”
그리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고연지는 그대로 묵언승의 화신 같은 장태산의 품에 자신도 모르게 안겨 서럽게 울었다.
***
그놈은 멋있다.
그놈은 바람둥이다.
그놈은 시인이다.
“하아아…….”
코하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트에 끄적이며 낙서하던 손을 멈췄다.
아직도 강의실에서 느꼈던 감동이 생생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시가 아니라 뮤지컬 을 본 듯했다.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아왔던 코하네는 이렇게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처음 맛봤다.
박수는 몇 분 동안 계속됐다.
다음 발표자가 선뜻 나서지 못하고 발표를 취소했다.
교수도 한 편의 시 낭송으로도 흡족해 하며 수업을 종료했다.
교수가 떠난 강의실에서 학생들 모두 장태산을 경외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다.
“바보 연지……. 제비에 걸린 것도 모르고.”
같이 시를 낭송했던 고연지가 장태산 품에 안기자 코하네는 질투라는 낮선 감정을 느꼈다.
장태산 품에 안긴 여자가 고연지가 아닌 자신이고 싶었다.
고연지는 장태산에게 안겨 위로를 받았다.
자신이 승려를 그리워하다 죽은 소녀였던 것처럼 서럽게 울어 버리던 고연지.
장태산은 멋진 승려처럼 그녀를 토닥이며 가만히 기다려줬다.
매너까지 끝장난 멋진 놈이었다.
누가 봐도 A+이다.
장태산은 다음 시간부터 강의에 나오지 않아도 됐다.
강의가 끝나고 일찍 순댓국집에 갔다.
9교시 체육 강의도 A+을 받아 놨다고 했다.
학기 시작하자마자 강의를 패스해 버린 천재적인 남자였다.
고연지는 말없이 순댓국에 소주를 마셨다.
한 병을 훌쩍 넘어갔건만 고연지는 지난번처럼 금세 취하지 않았다.
정신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 지배해 버렸다.
맨정신에 소주를 마시던 고연지는 집에서 보낸 경호원과 사라졌다.
고연지가 없었지만 장태산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코하네도 장태산과 헤어졌다.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미국에는 뭐 하러 가는 거지?”
다음 날, 예상치 못하게 장태산은 한국을 떠났다.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난 장태산.
그를 따라갈 수 없는 입장이었던 코하네는 궁금증만 증폭됐다.
그간 장태산의 행적을 보아, 분명 미국에서도 큰 사건을 칠 것이 분명했다.
갈증을 느낀 코하네는 술을 따라 마시며, 낙서장에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끄적거렸다.
“나는 붉소…… 나는 붉소…….”
시의 한 구절을 되뇌는 코하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 또한 묵언승을 사모하는 그 여인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그쪽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받아들여? 누구 맘대로~.
로버트 라이언이 매입한 투자회사 건물 회의실.
몇 달 만에 마주한 포드의 재무 담당 수석이사 제프 도넬리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호기롭게 뱉었다.
상황이 그사이 바뀌었다.
이제는 완벽하게 내가 갑의 입장이 됐다.
“헐값인 40억 달러에 볼부를 넘기겠소.”
거저라는 말투로 말하는 제프 도넬리의 말에 가벼운 미소만 머금었다.
이 양반이 날 물로 봤다.
중국에는 20억 달러에 팔면서 나에게는 배로 받아내려 했다.
“비싼데요~.”
옆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도도희가 웃으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요! 볼부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 자동차 회사요. 안전의 대명사이자 쌓아온 노하우가 장난 아니란 말이요.”
“그거 다 포드에서 가져갔잖아요. 껍데기만 남은 회사를 40억 달러에 사라는 거예요? 지금 이 시절에?”
말하지 않아도 도도희가 알아서 상황을 정리했다.
전투력이 장난 아니었다.
냉정하고 지적인 여성으로 보이게 하는 붉은 안경테 아이템을 착용한 도도희.
제프 도넬리의 얼굴이 바로 구겨지며 썩어 들어갔다.
오늘 협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그도 알고 우리도 알았다.
“이 위기는 금방 지나갈 거요. 정부에서 긴급 자금을 지원하고 있기에…….”
“선제 조건이 필요하잖아요. 의회를 설득할 명분~ 그게 쓸데없는 자회사 정리 아닌가요?”
제프 말을 톡톡 자르는 도도희가 제법 멋있었다.
아버지 도운중 회장의 피가 제대로 흘렀다.
“그건 그러니까…….”
포드 재무 담당 이사가 말을 더듬으며 당황했다.
이 자리에 로버트는 빠졌다.
지시를 받고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짧고 화끈하게 갑시다.”
이제는 정리해야 할 타이밍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기운이 빠진 제프 도넬리의 시선이 날 향했다.
“중국 지리와 협상 중인 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중국에 넘기면 미래에 엄청난 위험이 될 겁니다. 지금도 중국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합자회사가 필수입니다. 그런 중국이 기술까지 흡수하게 된다면…….”
“휴우.”
제프가 긴 한숨을 쉬었다.
미국 국회에 중국 측 로비스트가 포진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집요하게 볼부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음은 자명했다.
의회를 납득시킬 명분이 필요했다.
이것저것 정리하지 못하면 포드는 망할 수 있었다.
“30억 달러에 받겠습니다.”
“!!!”
제프 도넬리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한 가격보다 높다는 걸 아는 것이다.
“대표님, 그건 너무 비싼 가격이에요~.”
상담하기 전에 도도희와 말을 맞췄다.
짜고 치는 고스톱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조, 좋습니다. 그 가격에…….”
덥석 미끼를 물었다.
“덤으로 하나 더 주셔야 되는 거 알죠?”
“네? 덤이요?”
“원래 망할 때는 원 플러스 원이 정석이잖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동네 슈퍼도 아니고 그게 뭐냐고?
“에스턴 마린. 그거 얹어주십시오.”
본드카로 알려진 세계적 슈퍼카를 덤으로 요구했다.
“끙…….”
삼키지 못한 한숨을 내쉬는 제프 도넬리.
역시……. 물건 살 때는 조르고, 후려치고 깎은 다음에 덤을 받아야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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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