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610
611장. 허대부 (1)
– 산업은행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들의 지분을 팔아 세금을 환수해야 합니다. 건설회사가 언제까지 국영 기업처럼 운영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 이제 국제 경기가 조금씩 나아지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국내 대기업들도 자금 여력이 없습니다. 어설픈 기업에 괜히 넘겼다가 공적 자금을 다시 투입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해외자본이라면 모르겠지만 국내 매각은 반대입니다.
– 교수님. 너무 짧은 생각 아닙니까? 대웅 건설은 국내 3대 건설회사입니다. 설계 기술과 영업 노하우를 해외 자본에 넘기는 건 국부를 팔아먹는 짓입니다.
– 자본시장이 개방된 상태입니다. 건실한 해외 자본을 투자 받아도 인력과 노하우는 모두 변함없이 우리 것입니다.
– 핵심이 그게…….
종편 TV 프로에 패널들이 나와 대웅 건설 매각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에잉. 도적 놈들 같으니.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걸 모를 줄 알고?”
탁! 타악!
손에 든 화투 패를 바닥에 착착 내려놓은 늙은 남자의 손.
“혼덕부점(昏德不占)이 되겠어. 원 잡놈들이 뭐 이리 떠드나…….”
띠링.
옆에서 대기 중이던 머리를 땋고 곱게 한복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리모컨을 작동해 TV를 껐다.
“애월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내가 저놈들 때문에 먹고 살지만 속이 터진다. 국민들 코 묻은 돈을 온갖 잡것들이 따 빨아 먹는구나.”
애월이라는 고운 얼굴의 여인은 빙긋 웃기만 했다.
“그래 말도 못하는 너에게 내가 무슨 대답을 듣겠느냐. 쯧.”
혀를 차고 다시 화투 패를 잡고 노려보는 남자.
신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반쯤 벗겨진 이마에 그나마 남은 머리카락은 온통 흰머리다.
체구는 듬직했고 혈색이 붉었다.
이목구비도 시원시원했다.
다만.
“헐……. 뭔 지랄 같은 패인고?”
입이 걸었다.
화투점을 보면서 남자는 고민에 빠졌다.
스승님에게 물려받은 변형 육효점의 괘(卦)가 이상했다.
“비견(比肩) 편재(偏財) 편인(偏印) 편관(偏官)의 운이 동시에 찾아오다니……. 이건 내 팔자가 아닌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고. 이번 해는 대운이 발휘되건만…… 이 무슨 악재란 말인고.”
평안하게 받아먹을 수 있는 정재(正財), 정인(正印), 정관(正官)이 아닌 온통 힘들게 일해야 얻어먹을 수 있는 눈칫밥 신세의 운명.
“비견의 세가 강하다. 어떤 놈이 날 털어 먹으려 드는 거야? 이거…… 도망갈 괘도 없는데…… 누가 날 엮는 거지?”
남자는 고민에 빠졌다.
지난 세월 변형 육효점의 도움을 톡톡히 봤다.
웬만한 위기는 미리 알고 벗어나거나 때를 잘 맞춰 큰 이득을 봤다.
재복이 남다르지만 음(陰)에 구지(九地)가 낀 재(財)를 품고 있어 세상에 떳떳하게 부를 밝히고 살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 타고난 재복이 강해 대한민국 그 어느 재벌도 돈으로는 두렵지 않았다.
지금도 현금 동원력에서는 대한민국 제1인자다.
무기명 채권을 비롯해 현찰과 금, 국내외 유명인의 그림과 외화, 차명 계좌 및 해외 계좌에 엄청난 돈을 품고 살았다.
대그룹 회장들도 두려워하는 명동 허대부.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갑자기 변한 자신의 운세를 살폈다.
“이상한지고…….”
착착 차차착.
화투를 빠르게 섞였다.
기를 담아 다시 펼치는 변형 육효점.
탁탁탁!
바닥에 깔리는 패.
“편재국에…… 편인국까지! 염병! 이게 도대체 왜 이래!”
더 정확하게 드러나는 화투 패의 숫자가 품고 있는 의미.
거느리고 소유하기 부담스러운 재물과 인물이 찾아온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내칠 수 없는 형국이다.
마치 형제처럼 떼어낼 수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비견 천륜에 연이 묶였다.
벗어날 수 없다.
“에잉…….”
촤아아아앗.
깔린 화투패를 쓸어버리는 허대부.
스윽.
화를 내는 허대부 앞으로 고운 손이 시원한 냉수가 든 잔을 들고 나타났다.
“고맙다. 그리 안 해도 속에서 열불이 나던 참이다.”
꿀꺽 꿀꺽.
허대부는 단숨에 냉수를 들이켰다.
“곧 큰 인연이 나타난다는 의미인데…… 계륵이라니…… 대운이 어찌 그리 꼬였을꼬?”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는 허대부.
“아빠! 나 학교!”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
“천천히 가거라. 차 조심! 남자 조심하고!”
“그러다 아빠 딸 시집 못가! 남자는 환영이고~ 차는 조심할게~.”
끼릭. 쿵.
허대부를 아빠라 부르던 여성은 어느새 문 밖으로 사라졌다.
“누굴 닮아서 저러는지 에잉…… 쯧쯧…….”
늦게 얻은 외동딸.
명운에 자식복이 없는 사주였지만 때를 잘 노렸다.
손이 강한 여자를 얻었다.
그리고 연운(年運)에 잠깐 월(月)과 일(日) 시(時)에 손이 동시에 찾아올 때를 노려 동침했다.
하늘을 속이는 술법까지 사용해 얻은 귀한 자식.
아들이기를 바랐지만 삼신할미가 속은 것이 괘씸했는지 딸을 점지했다.
그것만으로도 허대부는 만족했다.
자신이 지은 업에 결과로 보자면 결코 얻을 수 없었던 핏줄.
대신 딸은 하늘도 어쩔 수 없는 강한 사주를 가진 사내를 만나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할 운명이다.
그러다 보니 매일 같이 노심초사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지만 속이 타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식에게 남겨 주지 못할 재산은 모두 다 허망한 물질에 불과했다.
더 이상 인간 세상에서 누릴 복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
따르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르릉.
그때 방안에 놓여 있던 다이얼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침부터 누구야?”
말을 못하는 애월이가 길게 선을 늘인 수화기를 끌어왔다.
“누구시오?”
대뜸 누구냐 묻는 허대부.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그가 뿌려 놓은 돈이 한 축이 되어 권력 판에 깔려 있었다.
– 하하. 접니다. 허대부님.
“오! 임 회장이 웬일이오? 이제는 내 돈 쓸 일이 없는 분이.”
– 선친 때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공짜도 아니고 이자도 두둑이 받았는데 은혜는 무슨……. 무슨 일 있소?”
천하의 오정 그룹 회장을 편하게 대하는 허대부.
전혀 꿀리는 기색이 없었다.
– 제가 아는 청년이 대부님을 보고 싶어 하는데 시간이 되십니까?
“청년이라……. 임회장 아들은 아닌 것 같고……. 누구요?”
허대부도 궁금했다.
임성철 회장에게 이렇게 편하게 말했지만 허대부도 꽤 조심했다.
사채계의 대부였지만 이제 임성철 회장에게 모든 면에서 밀렸다.
세상이 변했다.
아무리 해도 명동 사채업자에 불과한 허대부.
그가 세계를 주무르는 그룹 회장에게 갑질하며 큰소리치던 시절은 이미 갔다.
– 장태산이라고, 아주 건실한 청년입니다.
“장태산?”
허대부는 처음 듣는 이름.
– 만나보면 진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을 내주십시오.
부탁 같지만 은근한 압력.
“큼큼. 그럼……. 내가 시간 좀 내 보겠소. 언제…….”
– 오늘 밤이 좋겠습니다. 시간은 7시. 자택으로 찾아간다고 했습니다.
“그, 그렇소?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이미 시간 약속까지 잡아 놓은 임성철 회장의 통보.
허대부는 입맛을 다시며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럼 다음에 시간 잡아 약주 한 잔 하도록 하죠. 애월이 가야금 소리가 그립습니다.
“그러도록 합시다. 소문에 건강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조심하시오.”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났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놈이 뭘 먹고 저리 힘이 넘쳐?”
과거 임성철 회장을 만날 때 육효점을 봐줬던 허대부.
임성철 회장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하늘의 선단이라도 예약 받은 듯 기가 넘쳤다.
“장태산이라…… 장태산…….”
어디서 듣던 이름인 것 같아 인상을 쓰며 골똘히 생각하던 허대부.
“어! 그……놈 장태산!!!”
***
학교에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렜다.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고 학과가 사라졌음에도 학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자유는 엄청났다.
[다다다 다다다 다다다 다다다~♬ We Are Young Boy~♪]스피커를 통해 경쾌한 작은 북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밝은 목소리로 들려오는 노래.
2012년에 한참 유행했던 팝송 ‘We Are Young Boy!’
3월 4일 개강에 맞춰 학교에 가는 차 안에서 듣기에 이보다 좋은 노래는 없었다.
재학생과 졸업생 간의 학교 가는 맛은 엄연히 달랐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차 배기통이 웅장하게 울렸다.
로버트가 마지막 학창 시절 재밌게 즐기라며 컬렉션을 추가해줬다.
노란 바탕에 앞발을 들고 있는 말.
빨간 스포츠카.
12기통 6300cc 엔진을 달고 있는 작은 괴물.
100Km 가속력 0.3초에 최고 속도는 340이 나왔다.
몸체는 4미터 60cm.
달리고 싶은 녀석은 서울 시내의 복잡함에 으르렁거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봄이 참 좋아~.”
바쁘게 강의실로 향하는 신입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입학한 신입생들은 한눈에 봐도 티가 났다.
특히 여학생들은 어울리지 않는 화장과 치마 정장 차림이었다.
풋풋한 신입생들의 활기가 가득 찬 캠퍼스.
차도 바쁠 것도 없이 느긋하게 강의실로 향했다.
여유가 느껴지는 곳곳에서 보이는 복학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군대 대신 2년간 사법연수원에서 자격증을 땄다.
08학번 동기들 상당수가 사라졌다.
법학과가 사라지고 난 뒤 신설된 로스쿨.
안면 있는 법학과 선배나 동기들 얼굴은 안 보였다.
성을 빼앗긴 병사들은 본래 지리멸렬하는 법이다.
끼이익.
법학관에 차를 주차했다.
이제는 나를 시기하는 남자 선배들이 거의 사라…….
“뭐야?”
“이번 로스쿨 신입생인가?”
“재수 없게 스포츠카야…….”
“저러니 로스쿨이 돈 스쿨 소리를 듣는 거야.”
……지지 않았다.
차에서 내가 내리는 순간 과거 선배들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로스쿨 학생들이 날 보고 수군거렸다.
선배에서 로스쿨 생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변한 게 없었다.
가방도 없이 내렸다.
청바지를 입고 산뜻한 푸른색 셔츠에 가벼운 카디건만 걸쳤다.
신발은 편안한 브라운 계열의 스니커즈 스타일의 가죽 신발을 신었다.
“가방도 없어?”
“우리 학교 학생 맞아?”
“……제비 아냐? 아니면 룸 영업사원?”
“크크크. 맞네 제비.”
졸렬한 남자들의 질투는 더 추한 법이다.
저벅저벅.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
다가서자 놀라서 바라보는 세 명의 남자.
“처음 뵙겠습니다.”
함박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에…….”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않았다.
“로스쿨 생이시죠?”
“네.”
로스쿨 생이냐 묻자 당당하게 답했다.
“로스쿨 신입생이세요?”
그들 중 한 명이 용기를 내 물어왔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학교에 왔더니 선배님들이 다 사라졌네요. 법학과 08학번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아. 그러시구나.”
로스쿨생과 법학과 학생은 진골과 성골 정도의 차이.
그들의 표정에서 어색함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로스쿨 할 만하세요?”
“네? 그건 왜 묻습니까?”
왜 묻냐고?
그거야 너희들이 나를 제비라고 했잖아!
그걸 듣고 그냥 넘어가면 내가 장태산이 아니다.
“이렇게 담배 피면서 다른 사람 뒷담화 까며 스트레스 푸는 걸로 보니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연수원생들은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데 미래에 경쟁 상대가 되겠습니까?”
웃음을 잃지 않고 친절하게 비교해 줬다.
“뭐야! 지금 시비야?”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당신이 연수원 생활을 어떻게 알아!”
“나 경영학과 06학번이야! 학과는 다르지만 선배들 상대로 놀리면 재밌어?”
세 사람 용감했다.
“그대들이 먼저 나를 제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쪽 분은 활짝 비웃기까지 하시고~.”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면서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 그래서!”
“어쩌라고!”
법을 공부한다는 자들이 이렇게 무지했다.
“명예훼손까지는 아니더라도 모욕죄 구성 요건은 되는 거 아시죠?”
난 친절했다.
“그래 내가 모욕했다! 그래서!”
중앙에서 나를 제비라고 확정했던 놈이 앞으로 나섰다.
스윽.
왼손에 차키와 함께 들고 있던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
“JS 로펌 수석 변호사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헉!”
“읍!!!”
명함과 변호사라는 말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된 세 사람.
“사과하시죠. 그렇지 않으면 벌금 한 번 맞아보시던가.”
로스쿨 학생들 중에서도 판사와 검사에 임용될 만한 인재들이 존재했다.
벌금형 기록이 남으면 임용에 좋을 게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저희가 잠시 실언을 했습니다.”
“선처해 주십시오…….”
현실 교육에 바로 꼬리를 마는 세 남자.
그래도 머리에 생각은 장착하고 살았다.
“이렇게까지 사과하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어차피 1년 동안은 자주 봐야 할 것 같은데…….”
여기저기 소문내 나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넵!”
“감사합니다!”
군대를 다녀온 듯 세 사람 목소리가 우렁찼다.
“가보세요.”
타다다닥.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세 그림자.
개폼은 잡았지만 아직 비린내 나는 로스쿨 학생에 불과했다.
“이 맛보려고 내가 2년을 굴렀어~.”
피식 웃으며 명함을 지갑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1층 로비를 향해 걸어가려는 순간.
부우우우우웅 부우우웅. 끼이이익.
귀에 익숙한 배기음과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주차장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오는 빨간 차 한 대.
“저건……. 또 뭐야!”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