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613
614장. 대부의 조건 (1)
진짜 오랜만에 시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감히 자신 앞에서 당돌하게 도움을 요청하며 뻣뻣하게 말하는 녀석.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 확실했다.
지금은 한물갔지만 이래봬도 명동 허대부라는 이름 하나로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사람이다.
금융실명제 전만 해도 명동 허대부 이름 석 자 앞에서 재벌도 고개를 숙였다.
돈이 돈을 벌어오던 최고의 시절이었다.
기업들 어음 돌아올 때는 급전으로 일주일에 원금의 10퍼센트를 이자로 받았다.
기업 인수 합병이라도 있게 되면 당연히 허대부 돈을 필요로 했다.
사기꾼들은 자본이 없었다.
몇 바퀴 이름을 세탁한 후 전주가 됐다.
그렇게 해 두면 알아서 돈은 허대부의 손으로 굴러 들어왔다.
남들 다 망해 넘어지던 IMF 당시에도 담보를 쏠쏠하게 잡아 한 번 더 부를 뻥튀기했다.
강남을 비롯해 서울 시내에 즐비한 건물들 다수가 허대부 소유였다.
정치권에서도 감히 허대부를 터치하지 못했다.
대선이나 총선 자금도 쏠쏠하게 빌려줬던 허대부.
정치인들의 비리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허대부를 터치하는 순간 온 나라가 뒤집어질 정도의 파급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오정이나 연대 정도 되는 그룹만 허대부 앞에서 기침을 했다.
나머지 수많은 그룹이나 자잘한 기업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허대부가 가진 돈의 규모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았다.
당연히 해외에도 투자금이 존재했다.
일명 검은 머리 외국인 자금.
눈 밖에 나는 순간 잘 운영되던 기업 무너지는 건 순간이었다.
그런데.
‘허세가…… 아니란 말이지.’
허대부는 한눈에 알아봤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줄줄 흘렀다.
대부분 돈이 필요해 찾아온 이들은 허대부 앞에서 감히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하지만 장태산의 태도는 그들과 달랐다.
양반 자세로 앉아 허대부를 향해 싱글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마치 빌려준 돈 받으러 온 채권자 행세로 보일 정도다.
“그래. 뭘 도와줄까? 용돈 필요해? 1000억이면 돼?”
허대부가 맞장구를 치며 장난스럽게 미끼를 던졌다.
오정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장태산.
부랴부랴 인맥을 동원해 바쁘게 정보를 좀 캤다.
임성철 회장 말대로 젊은 사람이 대단하긴 했다.
자수성가로 수조 원대 자산을 굴리고 있었다.
놀라운 건 모두 다 합법적인 과정을 거쳤다는 것.
주식과 선물에 투자해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자금.
미국 월가의 큰 손과도 돈독한 사이로 인맥관계의 폭이 넓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병박 정권도 눈치를 봤을 정도였다는 어린 거물.
허대부도 이름을 얼핏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사는 세상이 달랐다.
아예 만날 일이 없었던 인물이다.
굳이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는 인연 억지로 맺지 않는 것이 허대부의 인생관이기도 했다.
“돈이 궁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용돈 좀 드릴까요? 한 5000억?”
“뭐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
1000억이 5000억이 되어 돌아왔다.
누가 보면 허세꾼들의 말장난 같은 대화.
오가는 말 사이에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허대부보다 훨씬 큰 자금을 굴리고 있다는 간접적 의사 표현.
“용돈도 싫다……. 그럼 왜 왔을까? 내 후계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것도 아닌 듯하고.”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한 달 전 개업한 뜨끈뜨끈한 변호사입니다. 최대한 합법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꿈틀.
장태산의 말에 허대부의 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꿈틀댔다.
허대부도 피해갈 수 없는 치부.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지만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굴렸는지 허대부는 잘 알고 있다.
대부업은 가진 게 없는 이들의 눈물과 피를 묻힌 돈을 먹고 사는 팔자.
“돈이면 다 돈이지…… 그게 뭐가 달라.”
허대부 목소리가 냉랭하게 바뀌었다.
“틀립니다. 돈은 사람들의 기(氣)를 먹고 사는 요물입니다. 돈을 건넨 자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하면 죄가 안 되지만, 한을 담아 지불한 돈은 업을 품습니다. 대부 어르신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업의 무게를.”
사채왕에게 던지는 업에 관한 말.
다른 놈들이 지금과 같은 말을 했다만 당장 경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는 달랐다.
만만치 않은 고수를 상대하고 있는 느낌.
‘요놈 봐라? 그런 것도 알아?’
장태산만 한 나이 때는 큰돈을 다스리기가 힘들게 마련이다.
가진 게 없던 자는 수십억이 넘는 로또에 당첨되어도 1년이 지나면 다시 거지꼴이 된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큰돈에 깔려 자멸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돈도 교육을 받아야만 굴릴 수 있는 기술의 영역.
차일드 가문이나 유럽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이 부자인 이유가 있었다.
큰돈을 손에 쥐는 것보다 작은 규모의 돈부터 관리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폭넓은 관리 교육과 마음 수련을 탈무드나 가정교육을 통해 일찍부터 가르쳤다.
근본 없는 돈은 재앙이나 마찬가지.
돈을 좋아하되 멀리할 줄 아는 중용의 덕목이 꼭 필요했다.
누가 됐든 삿된 돈을 먹으면 탈이 나게 마련.
정치인들도 정당하지 못한 뒷돈을 받으면 관의 임기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게 다 그래서 그렇다.
악한 놈들이야 뻔뻔하게 버티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청산되지 못한 업과가 거기서부터 쌓이는 것이다.
결국 대물림 되는 업의 소용돌이로 발을 들이미는 선택을 하는 것.
대신 선한 이들은 괴로움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고, 다시 길이 아닌 곳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어린 녀석이 감히 허대부와 돈을 논하자고 들이댔다.
“돈이 필요 없는데……. 날 왜 찾아왔을꼬? 세상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다시 본래 표정을 되찾은 허대부.
가만히 장태산을 바라봤다.
스윽.
그사이 애월이 차반에 차와 곶감을 담아왔다.
씨를 빼 꽃문양으로 모양을 낸 지리산 대봉 유기농 곶감.
귀한 사람이 올 때나 내오는 곶감을 애월이 처음 보는 장태산에게 내왔다.
보기 드문 일.
말을 못하지만 애월은 기감이 누구보다 대단했다.
맑지 않은 자를 대하면 지독한 악취가 난다며 자리를 피하는 그녀.
허대부가 그나마 사람답게 살고 있는 이유가 애월이 곁에 있어서 가능했다.
태어난 가택궁 자리가 구금(九金)바닥.
그것도 구금이 재(財)를 품었다.
바닥 인수는 정인(正印)인 십토(十土).
머리 위까지 구금이라도 보니 토생금의 원리로 큰 부를 일군 것이다.
다만 그렇게 끌어 모은 재물이 빠져 나갈 구멍이 없어 구멍이 없었다.
왕한 구금에 치어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부드러운 육수(六水)의 기운을 품은 여인이 필요했다.
구금의 기운이 가득 차 머리가 혼미해질 때가 잦았다.
그럴 때마다 육수의 사주 가진 여인을 품어 숨통을 열었다.
돈으로 안 되는 건 세상에 거의 없었다.
꼼꼼하게 사주팔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 들인 여인.
허대부의 경우 자칫 칠화(七火)의 여자를 품었다가는 방사 중에 화극금의 원리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공부를 한 허대부는 음양과 오행의 이치를 아주 신봉했다.
인간들은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신들의 우주운행 법칙.
고르고 고른 여인들 중에 애월은 허대부와 가장 궁합이 잘 맞았다.
사주의 대문격인 팔문(八門)까지도 훌륭했다.
허대부의 날카로운 구금의 기운을 모두 흡수해 통기해 주는 하늘의 선물 같은 여인 애월.
사주에 재가 강해 누구도 버텨내기 힘든 허대부의 기질.
그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애월이 오늘따라 다소곳하기만 했다.
남녀 간의 감정 같은 것이 아니다.
장태산의 기가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는 의미.
‘머리 쓰는 악한 놈은 아니군.’
허대부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인간들을 만나왔다.
악한 자들은 대부분 어두운 기운에 눈동자가 청록색으로 물들어 있다.
이미 별빛을 잃은 후인 경우가 태반.
앞에 앉아 있는 장태산은 그런 점에서 달랐다.
두 눈이 어린아이처럼 맑게 반짝였다.
또로록.
이슬만 마시고 자란 최고급품 녹차가 잔에 채워졌다.
“향기가 그윽합니다.”
재대로 다도를 배운 듯 정석으로 찻잔을 잡고 코끝으로 향을 음미하는 장태산.
‘고얀놈.’
속으로 고얀놈이라고 말했지만 허대부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부를 이만큼 일군 후 자신 앞에서 이렇게 강단 있는 젊은 놈은 처음이었다.
“귀한 차를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태산은 애월에게 인사를 잊지 않았다.
배시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애월.
‘애월이가 오랜만에 활짝 웃는구나.’
따스한 시선으로 그런 애월을 바라보는 허대부.
이곳 성북동은 애월의 집과 같은 곳이다.
멀지 않은 곳에 과거 그녀가 어릴 적부터 살았던 집이 있다.
지금은 절이 되어 버린 서원사.
1980년까지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들과 인사들이 술을 마시고 쾌락을 나눴던 서원각.
애월은 그곳 기녀였다.
말을 못해 부모가 내다버린 애월.
서원각의 주인이었던 매향 서원화가 어린 애월을 거둬 길렀다.
일찍 권반이 된 서원화는 정악계의 대부인 허균일 선생의 문하생 겸 양녀였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서원화는 애월을 친 딸처럼 키웠다.
스승에게서 받았던 진수무향(眞水無香)의 뜻을 애월에게 고스란히 넘겼다.
본래 깨끗하고 청정한 물은 잡스러운 내음을 풍기지 않는 법.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애월은 기녀답지 않게 곱게 성장했다.
허대부는 어느 날 그곳에 접대 차 갔다가 애월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
하지만 절대 애월을 내놓지 않던 서원화.
천만금을 줘도 애월을 내주지 않을 거라고 서원화는 버텼다.
그러나 하늘의 운명은 서원화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다 세상을 떠난 스승 허균일.
그의 아들이 허대부라는 사실을 알고 고집스럽던 의지를 스스로 꺾었다.
다행히 애월 또한 허대부를 싫어하지 않았다.
꽃다웠던 시절 큰 시인 한 사람을 사랑했었던 서원화.
두 사람의 마음을 짐작해 애월을 허대부에게 보냈다.
그리고 직후 서원각 문을 닫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서원각은 어느 날 서원사가 됐다.
애월을 비롯해 모든 걸 내려놓고 자유를 찾은 서원화.
성북동 허대부 집에 살면서 어머니 같았던 서원화가 운명하는 그날까지 애월은 지극정성으로 봉양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았던 이생의 인연.
허대부는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애잔한 눈으로 애월을 봤다.
그리고.
“동룡이 맡긴 담보는 줄 수 없다.”
허대부는 장태산이 이렇게 찾아온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동룡 그룹과 장태산 사이의 악연.
이미 들었다.
쉽게 짐작 가능한 이들의 사연.
“주십시오. 섭섭지 않게 지불하겠습니다.”
웃던 얼굴을 거두고 정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허대부를 쳐다보는 장태산.
“안 된다. 내가 비록 사채계의 대부라 불리지만 그 동안 신의로 살아왔다. 신의는 내 생명이다.”
허대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돈은 더 이상 불리지 않아도 문제없는 삶이다.
남아 있는 건 자존심.
제도권 은행이 한국 경제를 책임지는 동맥이라면 허대부는 뒤란을 책임지는 어둠의 정맥 같은 자금을 다루는 자.
정맥 자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제를 떠받쳤다.
음과 양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며 흐르는 자금 세계.
개인 간 은원으로 경제계가 흐트러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주인이 바뀌면 그 아래 부리던 사람들 모두가 힘들어지게 마련.
과거와 달리 투명해지고 있는 세상.
허대부도 몇 년 전부터 인상이 써질 만한 악한 일에는 자금 투입을 끊었다.
하나뿐인 딸을 위해 이생에 쌓은 업을 어서 청산해야만 했다.
스윽.
그때 다소곳이 앉아 있던 애월이 허대부 옷자락을 살짝 움켜잡았다.
‘……도와주라고?’
애월이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사업적 대화에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큰 눈을 껌뻑이며 허대부를 바라보는 애월.
허대부의 마음이 흔들렸다.
원칙이 무너지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자칫 정권의 눈 밖에 나 도리어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 권력계의 최고 집단인 일송회의 역량을 낱낱이 알고 있는 허대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서로 간섭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단단하게 굳어진 관행.
동룡 주현태 역시 일송회의 멤버다.
풀을 건드려 숨어 있는 뱀들을 놀라게 할 수도 있었다.
“흐음.”
허대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괘씸한 놈…….’
애월에게 점수를 딴 장태산에게 묘한 질투를 느낀 허대부.
그냥 들어주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동룡 주 회장의 대웅건설 인수를 물 먹여라.”
동룡 주현태 회장은 자신의 지분은 물론 자식들의 주식 전부를 맡겼다.
대웅건설 인수에 올인 한 도박꾼.
만약 인수가 무산되면 담보를 넘긴 것에 대한 명분이 생긴다.
1조원에 가까운 자금의 이자가 장난 아니다.
“알겠습니다.”
단숨에 승낙하는 장태산.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시험.
이대로 물러나면 명동 허대부가 아니었다.
고약한 문제를 준비하는 시험관처럼 머리를 굴리는 허대부.
“우리 애월이가 상처가 많아 기쁨의 눈물을 잃고 산 지 오래다. 애월이의 굳은 마음에 눈물샘이라도 만들어 봐라……. 그럼 내 적극적으로 너를 돕겠다.”
어머니와 같았던 매향 서원화가 입적한 이후 서서히 눈물이 말라가던 애월.
그녀에게 남은 삶에 아직 웃을 만한 기쁨이 남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허대부.
지금껏 여러 방면으로 공을 들였지만 애월의 마른 눈물은 다시 흐르지 않았다.
애월이 이렇게 시들다 사라지면 허대부 운명도 다하는 셈.
이제는 끊어낼 수 없는 공생관계.
애월의 희로애락이 허대부의 희로애락이었다.
“으음.”
짧게 신음을 흘리는 장태산.
“좋습니다. 지금 바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흐흐. 쉽지 않을 것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시도해 왔던 허대부.
마음과 달리 한편으로는 장태산이 두 손 두 발 들 게 될 것이라 장담했다.
“좋다! 만약 실패하면 조용히 나가거라.”
“저걸 잠시 빌려주십시오.”
그때 장태산이 손으로 방 안에 있는 물건 하나를 가리켰다.
“응?”
허대부는 장태산이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남자들은 거의 다루지 않는 물건.
“???”
듣고 있던 애월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의문이 가득 찬 시선으로 장태산을 쳐다봤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