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777
778장. 어전회의.(2)
“오 원장, 공무가 바쁘실 텐데 이렇게 불러서 미안해요.”
점잖은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아닙니다. 회장님 부르심인데 바로 달려와야죠.”
대법원장 오승택은 최대한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법률 서적을 비롯해 언뜻 보아도 족히 만 권이 넘을 법한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고상한 서가.
꽤 낡았지만 세월의 기품이 배어 있는 가죽 의자에 앉아 있던 손국중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전직 대법원장 선배이자 한국변호사회의 실질적 주인.
그의 앞에서 현직 대법원장은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대법원장이 되기 전 이곳에 찾아와 손국중의 윤허를 받았다.
‘이렇게 부르실 만한 이유가…… 뭐지?’
오승택은 전화 한 통화만으로도 그의 모든 청을 들어줘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가 직접 만나자 청했다.
손국중에게 그 어떤 저항도 허락되지 않았다.
저렇게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의 진짜 얼굴 뒤에 감춰진 차가운 피.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시작해 이승만과 군사 정권 시절을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승승장구했다.
앞을 막아서는 자는 적이나 동지를 가리지 않고 가차 없이 쳐낸 인물로 유명했다.
가진 힘이 무소불위의 수준.
지금도 리앤장을 앞에 두고 막후에서 대한민국 법조계를 주무르고 있었다.
“차 들어요.”
“감사합니다.”
손국중이 손수 내린 녹차를 권했다.
한눈에 보아도 좋은 차지만 향을 느낄 수 없었다.
신경은 온통 손국중의 감춰진 의중을 파악하기에 바빴다.
“…….”
오승택은 귀에 들려올 그의 말을 기다렸다.
“임주혁 회장 알죠?”
“물론입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본론이 흘러나왔다.
KI그룹 회장은 지금 수감되어 있다.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아 1심에서 섣불리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없었다.
횡령과 배임의 규모가 상당했다.
그것도 경찰과 검찰 쪽에서 많이 봐준 덕에 축소 가능한 금액이었다.
항소심에서 3년 형에 5년 정도 집행유예가 떨어지는 코스가 예상됐다.
일명 재벌 코스.
죄가 중하니 일단 구속시켜 여론을 잠재웠다.
국민들 눈에 재벌도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간다는 퍼포먼스 정도는 보여줘야 했다.
이것만 넘기면 다음 코스는 순탄하리라 예상되었다.
정권과 법조계에 큰 악연이 없다면 대부분 집행유예 코스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많이 아프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경제를 위해 뛰다보면 가끔 실수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오 원장이나 나처럼 똑같은 사람인데…… 살면서 실수 한번 없다면…… 말이 안 되잖아요.”
“맞습니다. 성자가 아닌 이상 모두 다 실수를 합니다.”
“깊이 반성한다고 하니……. 병원에서 요양할 수 있도록 힘 좀 써줘요.”
청탁의 목적이 명확했다.
‘이런 일을 왜 직접?’
손국중 정도면 오승택에게 전달할 수 있는 여러 라인이 존재했다.
하다못해 아들인 손대균 이사를 통해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손국중이 이렇게 직접 불러 주문했다.
그간 손국중을 겪어온 오승택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
“검토하라고 지시해 놓겠습니다.”
병보석을 허가할 중앙지법 재판부는 대부분 오승택 라인이었다.
병명만 명확하다면 보석으로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다.
“고마워요. 오 원장.”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게 다가 아닐 텐데?’
일개 그룹 회장을 위한 청탁 한 가지 때문에 자신을 불렀을 리가 없었다.
찻잔을 입에 대며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어떻게 할 건가요?”
“네?”
“지난번에 부탁한 일 말이에요.”
“……진행 중에 있습니다.”
오승택도 면밀히 살펴야 하는 내용.
일본과 관련된 배상문제는 과거부터 계속 법원을 괴롭혔다.
정치권에서 원하는 해결 방식과 국민들의 민심은 크게 달랐다.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현 정부 쪽 손을 들어주자니 자자손손 친일파라는 욕을 먹게 될 판이다.
정부는 주도적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졸속으로 처리된 한일청구권 협상에 대한 후폭풍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속 시원한 해결이 요원했다.
“마무리 지어야죠. 이미 국제법적으로 모두 해결된 사항입니다. 국민들 감정적 여론에 휘둘리면 국격에 타격을 입습니다. 건설적으로 일본과 협력해야 합니다. 이웃한 나라와 친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일본만 한 친구가 없어요.”
“…….”
대표적인 친일 법조인 중 한 명인 손국중.
일제시대 때부터 일본과 연결된 인연이 아주 깊었다.
한일청구권 협상 당시에도 보이지 않는 조력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
그의 치부는 조정희 전 대통령의 치부나 다름이 없었다.
“힘든가요?”
조용한 물음에 오승택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렸다.
자칫 잘못 대답을 했다가는 사달이 날게 확실했다.
“대법관들 중에 반대하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조율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 일은 특히 대법원 전원합의체 사건이었다.
오승택 이전에 임명된 인사들 중에는 양심 있는 대법관들이 몇몇 섞여 있다.
워낙 올곧은 성향을 가진 탓에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가 힘들었다.
오승택이 사건을 질질 끌고 있긴 하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손국중 말고도 청와대를 비롯해 여당, 언론사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
조약 당사자인 조정희 대통령의 딸이 VIP가 되면서 일본이 열을 올렸다.
이번 정권이 묵은 체증을 털어내기에 좋은 기회라는 걸 일본이 모를 리 없었다.
“힘들어도 조율하고…… 합의를 도출해냄이 대법원장으로서의 능력 아닌가요?”
조용하면서도 강한 압박.
“최대한…… 빠르게 결론을 내겠습니다!”
오승택은 두 말 하지 않고 바로 머리를 조아렸다.
여기서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가는 불명예스럽게 대법원장 자리에서 미끄러져 내려올 수도 있었다.
오승택에게도 흠거리가 될 만한 비리가 많았다.
그 모든 걸 낱낱이 꿰고 있는 손국중.
“그래요. 내 오 원장을 믿어요.”
사람 좋게 웃는 능구렁이 노인.
“믿음에 확실히 보답하겠습니다!”
“결과를 기다려보겠어요.”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하나 더 당부할 게 있어요.”
“하명하십시오.”
연달아 지시가 내려왔다.
“손대균 이사가 좀 쉬고 싶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당분간 손대균 이사 쪽에서 들어가는 사건은 보류하세요.”
“네?”
이건 분명 명백한 태클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하는 일에 태클을 거는 손국중의 태도를 쉽게 이해 할 수 없었다.
손대균은 손국중의 뒤를 이를 대표 후계자였다.
지금 손국중의 말은 후계자 아들을 뒤로 물리겠다는 의미.
“깊게 알고 싶나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싸늘하게 묻는 질문.
“아, 아닙니다. 지시해 놓겠습니다.”
오승택은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그리고…… 장태산이라는 변호사…… 아나요?”
“알고 있습니다.”
손대균이 애지중지 감싸고도는 한국대 후배였다.
오승택 라인과 짧게 몇 번 부딪친 일도 있었다.
“내가 여러모로 눈 여겨 보고 있어요. 그렇게 알고 있어요.”
듣는 순간 이미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걸 말투에서 알아 챈 오승택.
‘손대균과 장태산……. 너희…… 찍힌 거냐?’
***
또각또각.
뚜벅뚜벅.
대리석 위를 걷는 두 사람의 구두 발자국 소리.
블랙 투피스 정장 차림을 한 도도희는 안경도 블랙으로 통일했다.
손에는 가죽 서류가방이 들려 있다.
그리고 그 옆을 따라 걷는 중년의 남자.
깔끔한 감색 슈트 차림의 그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도대체 이곳은…….’
대웅조선 전무로 작년에 퇴임한 제문환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퇴직 후에 할 만한 일을 여태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은 팔팔하게 일할 50대 중반.
하지만 구조조정 여파로 현장에서 밀려났다.
영업 파트도 아니었는데 해외에서 입은 손실을 핑계로 별 연관 없는 제문환이 속해 있던 조직 파트를 날려 버렸다.
조선업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낙하산 인사가 사장으로 꽂혔다.
정치권에 줄을 대고 있던 이들이 줄줄이 승진했다.
입사 후 30년 동안 한 우물만 팠던 제문환은 운이 없게 연줄을 잡지 못했다.
실력만 좋으면 그 어떤 조직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살아온 그였다.
여러 부침을 겪으면서도 그 믿음대로 버텼다.
설계와 신공법 분야에서 특히 탁월한 성과를 냈다.
하지만 그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토사구팽 신세가 됐다.
아직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넘쳐났지만 냉정한 조직에서 내쳐졌다.
퇴직 한 달 전에야 내려온 은밀한 제안.
알고는 버틸 수 없었다.
윗선의 뜻을 따르면 퇴직금과 함께 위로금을 지급한다고 했다.
그것을 거부하면 손해배상을 당하게 될 거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늦게 결혼해 아직 대학교와 고등학교 다니는 남매가 있는 상황.
눈물을 머금고 퇴직 서류에 사인했다.
자존심보다는 돈 몇 푼이 아쉬운 현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했다.
현실에 속 쓰렸지만 실력을 인정받은 인재인 만큼 어디서든 다시 쉽게 취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순진한 착각.
국내 해운업과 조선업의 불황이 연계됐다.
1년 동안 10여 곳에 지원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반면 중국 쪽에서 집요하게 연락이 왔다.
제문환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그들은 과거부터 접촉해 왔던 헤드 헌터.
몇 번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국 제문환은 거절했다.
아무리 급해도 돈 몇 푼에 국가와 민족을 팔 수는 없었다.
대웅조선소의 노하우를 팔아 호의호식하기에는 제문환의 영혼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필요한 돈이 많았지만 제문환은 이를 악물었다.
제시한 계약금 10억이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참았다.
부득이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으면 경비업에 뛰어들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얼마 전 도도희의 연락을 받았다.
대웅조선을 위해 다시 일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이었다.
두 번 생각지 않고 바로 승낙했다.
도도희 대표는 입사 초기부터 신으로 여겼던 도운중 회장의 딸이었다.
도도희가 능력 있는 대웅맨들을 모아 일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소문이 돌던 참이었다.
제문환은 젊은 시절만큼이나 심장이 뛰었다.
곧 서류면접이 통과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오늘 서울에서 헬기를 타고 이곳까지 도도희와 동행해 날아왔다.
구체적으로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중요한 인사를 만나는 자리라는 짐작만 있을 뿐이다.
‘연구소가 맞는 것 같은데?’
엄청난 규모의 연구 단지다.
백색의 연구복을 입은 이들이 간간이 보였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연구하는 곳인지는 아는 바가 없다.
대형 한옥 건물이 주를 이루고 구역과 구역이 확실히 나누어져 있다.
주차되어 있는 차량만 봐도 규모가 범상치 않고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건 짐작 가능했다.
경비도 삼엄한 데다 대규모다.
건장한 체격의 경호원들과 CCTV가 물 샐 틈 없이 연구 단지 곳곳을 감시했다.
잔뜩 기가 죽은 제문환.
“제 전무님.”
“넵! 대표님.”
나이는 어리지만 도도희는 도운중 회장의 딸이면서 투자회사의 대표였다.
제문환은 깍듯하게 윗선으로 도도희를 대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어렵게 잡은 기회입니다. 마음껏 능력을 발휘해 보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문환은 목소리에 힘을 담아 답했다.
“다 왔군요.”
연구 단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한옥 건물의 최상층.
단단한 원목 문 앞에 두 명의 경호원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도 대표님.”
“다들 오셨나요?”
“네.”
A.T 씨큐리티 직원들은 같은 건물에 거주하는 도도희를 잘 알았다.
스르륵.
문은 외관과 달리 자동시스템으로 움직였다.
“들어가요.”
도도희가 앞장을 섰다.
제문환은 옷깃을 단정하게 매만지며 도도희를 따라 내부로 들어갔다.
안쪽에 문이 하나 더 존재했다.
“도 대표님. 늦었네요.”
“길이 막혔어요.”
“헬기가 막혀요?”
“모르셨어요. 요즘 하늘 길도 막혀요.”
문 앞에 대기 중인 유세라 상무가 도도희와 농담을 나누었다.
외부 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이니만큼 서로 경어를 사용했다.
유세라와 도도희는 다소 들떠 있었다.
서울이 아닌 장주시에서 처음 열리는 정식 회의.
그녀들도 장주시 연구소 본관 구경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구중궁궐 심처 같았던 장태산 회장의 비밀 공간.
“들어가세요.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네~.”
유세라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공간.
‘헛!’
유세라와 눈인사를 건네고 안으로 들어서던 제문환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눈에 들어온 이들의 면면에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TS그룹 하관우 회장, 천일의 황효관 대표, 삼룡자동차 현동영 대표……. 저분은 우리들은행 현준규 행장!’
제문환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로 알아주는 쟁쟁한 인사들이었다.
그들 말고도 몇몇 사람들이 더 앉아 있었다.
“이쪽으로.”
유세라가 멈칫하는 제문환을 안내했다.
“!!!”
제문환은 안내된 자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놀랍게도 지정된 좌석에는 ‘대웅조선 임시 대표 제문환’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앉으세요.”
“네? 네…….”
얼떨결에 자리에 앉은 제문환.
“…….”
회의실에는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중앙 상석은 아직 비어 있었다.
때마침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
“회장님 입장하십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