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14
815장. 선과 악.(4)
“찍어.”
“형님, 감사합니다!!!”
배중수는 손에 힘을 잔뜩 넣어 도장을 꾹 눌러 찍었다.
“나 말고 우리 회장님께 고마워해.”
“네? 회장님요?”
LKB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배중수는 업계 선배 황연태 전화를 받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왔다.
돈을 준다는 말에 눈이 획 돌아갔다.
잘나가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제 빛을 보기 시작한 사업체를 양도했다.
얼마 전 스타트루 대표와 만나 포커 한 판 친다는 게 인생이 막장으로 곤두박질쳤다.
LKB와 달리 제법 이름이 알려진 스타트루.
조폭이 뒤에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있어온 만큼 조심한다고 조심했다.
그런데 술이 문제가 됐다.
문효진을 다음 작품에 꽂아주겠다는 미끼에 넘어가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영화판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감독까지 포함되어 있던 술자리.
처음 심심풀이로 시작했던 포커 판이 눈 깜짝 할 사이 몇 배의 판으로 커졌다.
술을 연거푸 마신 뒤로 알딸딸한 상태가 된 배중수.
잠도 자지 않고 이틀 동안 판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기억도 나지 않는 엄청난 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사인하고 지장을 찍은 증빙 서류도 함께였다.
누가 봐도 완벽한 개인 채무 대출 서류.
그날 이후부터 배중수는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이자가 고리 대금 수준이었다.
법적으로 따질 수 있는 명분이 하나도 없었다.
스타트루는 부산 대형 조폭 소유의 사업체였다.
회사 자금을 횡령하고 아파트까지 담보 잡혀 돈을 마련했지만 한 번 발을 들인 도박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사이 도박 중독 수준에까지 이른 배중수.
은밀하게 들어온 청부에 간판 배우인 문효진까지 팔아 넘겼다.
“계약은 체결됐습니다. 방금 잔금이 입금됐습니다. 매매 계약금은 15억. 총 채무는 11억. M.T.S가 채무를 모두 떠안는 조건으로 LKB 지분 전부를 인수 받았습니다. 두 분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법정상한선을 넘는 이자는 지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금은 불법원인급여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으니 갚으셔야 합니다.”
“당연하죠. 이 개새끼들 빚 털었으니 바로 한국 떠날 겁니다.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황연태 사장 옆에 있던 젊은 변호사의 말에 배중수가 한시름 놓은 듯 신세한탄을 늘어놓았다.
아주 악질들이었다.
악마도 그런 악마가 없었다.
바짝 마른 오징어를 비틀어 기름을 짜는 놈들이었다.
본가뿐만 아니라 처가 쪽 재산까지 탈탈 털어먹으려 작정을 했다.
절망에 내몰려 마지막에는 한강에 몸을 던져 죽으려 했다.
그때 마침 들어온 문효진을 미끼로 한 청부 의뢰.
청부를 의뢰한 쪽에서 먼저 3억 정도를 당겨주기로 약속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애지중지 키워온 문효진을 꽃뱀 작업에 투입했다.
남의 사정을 봐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도박중독이 그렇게 쉽게 끊어질 것 같습니까?”
M.T.S 대표실에서 계약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담보로 잡힌 LKB 주식을 후하게 쳐준 황연태.
자신들의 무식한 힘을 믿었던 스타트루는 지분 관계에 대한 채무계약서만 작성한 상태였다.
이미 업계에 지저분하기로 소문 난 배중수가 도망갈 곳이 없다고 판단해 공증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허술하게 채무계약서가 작성되었기에 가능한 공식 인수합병 계약.
도장을 찍어 계약이 완료되고 여유를 되찾자 배중수는 그제야 되바라지게 말하는 변호사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도 어린 새끼가 기분 나쁘게…….’
자신의 실수가 맞긴 하지만 사업하는 남자라면 한 번쯤 도박에 빠지게 마련이다.
흔한 말로 남녀 간의 불륜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채무를 제외한 계약 잔금을 받게 되면 바로 한국을 뜰 것이다.
마카오 쪽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해 두었다.
그곳에서 다시 지금까지 판에서 배워둔 실력을 제대로 활용해 볼 생각이었다.
“남은 금액으로 식구들 빚부터 갚으십시오. 밀린 회사 채무는 M.T.S에서 처리하겠지만 인간으로서의 도리까지 저버리면 안 됩니다.”
젊은 변호사는 대놓고 배중수의 인생에 관여하려 들었다.
맞는 말이었지만 일단 배중수는 기분이 나빴다.
“변호사님,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는 거 아니오. 이 자금으로 내가 뭘 어떻게 하든 변호사님이 관여할 바 아니란 말이오.”
배중수 입에서 삐딱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한시름 덜자 바로 평소 태도가 드러났다.
“배중수! 너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황연태가 그 모습을 보다 버럭 호통 쳤다.
“형님. 이번에 땡 잡은 겁니다. 효진이가 물건인 거 아시죠? 제가 발굴한 애들 모두 쓸 만합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면 절대 넘기지 않았을 겁니다. 계약 기간도 길게 남았고 정산비율도 회사에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여기저기 돌려도 남는 장사라구요.”
배중수는 빚에 쫓기는 동안 무척 야비해졌다.
알고 지내던 사람들 모두를 돈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일찍부터 소속 연예인들을 여기저기 돌리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물에서 빠졌다 목숨을 건지게 되자 본전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이제 다 끝났다.
어차피 계약은 완료됐고 잔금도 들어왔다.
아쉬울 것은 하나도 없는 입장.
“하아……. 너 요즘 막장 됐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구나.”
황연태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후배 배중수를 쳐다봤다.
자신처럼 밑바닥부터 시작했기에 연예인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배려 깊은 전문가로 성장했다 여겼다.
열심히 노력해서 명성을 갖춰가는 모습을 봤을 때 흐뭇했는데 저런 본심을 숨기고 있는 줄은 몰랐다.
“막장요? 형님 그러는 거 아닙니다. 몇 푼 안 되는 돈 빌려달라고 전화했을 때 냉정하게 거절하셨잖아요. 그때 많이 섭섭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은 빌려주실 줄 알았습니다.”
“도박에 빠진 걸 아는데 어떻게 빌려 주냐? 제수씨 얼굴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우리 가족은 제가 지킵니다. 형님이 신경 쓸 일 아닙니다.”
냉소를 짓는 배중수.
“후후훗.”
옆에서 변호사가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어이. 변호사님. 그 웃음 정말 기분 나쁘오.”
배중수가 인상을 팍 썼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하더니……. 맞네.”
“뭐라고?”
만년필을 들고 있던 변호사가 배중수를 똑바로 쳐다봤다.
파바밧.
배중수의 두 눈을 향해 강력하게 꽂히는 젊은 남자의 눈빛.
“!!!”
배중수는 날선 변호사의 시선에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한 호흡에 폐부 깊숙한 곳까지 냉기가 닿는 것처럼 차갑고 냉철했다.
“마음 같아서는 빈털터리로 만들어 쫓아내고 싶었지만 문효진 후배 미래를 위해 참는다. 겨우 15억에 자신을 믿고 따른 이들을 팔아넘긴 당신의 죄질은 결코 가볍지 않아.”
“이, 이 새끼가 지금…….”
“닥쳐!”
“…….”
변호사의 으르렁거리는 포효에 배중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몸이 저절로 벌벌 떨렸다.
맹수 앞에 선 초식 동물이 따로 없었다.
“문효진을 나에게 접근시키라고 주문한 애들 누구야?”
“헛!”
배중수는 신음을 삼켰다.
그제야 젊은 변호사의 정체를 알아챘다.
‘장태산…….’
그에 관한 정보는 잘 모르지만 이름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M.T.S 이사이자 투자자.
과거 그를 만나고자 절치부심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런데 이렇게 조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짐작이 맞다면…… 오정이겠지.”
“…….”
단박에 스캔들 의뢰자를 짚어내는 장태산.
배중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맞네.”
“X발! 그래서! 맞으면 어쩔 건데! 네가 오정을 어떻게 해보려고? 건방지게. 오정이 어떤 곳인 줄이나 알아?”
배중수에게 오정은 조폭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일개 투자자나 변호사가 상대할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깨끗하게 정리해야지.”
“뭐라고? 정리?”
장태산의 대답이 그저 황당한 배중수.
“회장님. 저런 잡놈과 더 이상 말 섞지 마십시오.”
‘회장!’
배중수는 황연태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방금 계약을 체결할 때 황연태는 분명 회장님에게 감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젊은 변호사에게 회장님이라고 했다.
“앞날이 잘되기를 빌어주지는 못하겠고……. 앞으로 마주하지 맙시다. 어차피 세상 살다보면 당신처럼 스쳐가는 인연도 많으니.”
배중수의 귀에 콱 박히는 장태산의 말.
“당장 내 방에서 꺼져. 도박쟁이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회개 못 한다더니…….”
황연태가 축객령을 내렸다.
스윽.
마치 좀비처럼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배중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 앞에 이르러 잠깐 멈췄다.
“니들 잘났다 새꺄! 얼마나 잘나가는지 두고 보마!”
띠릭 콰앙!
배중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악을 쓰듯 한마디 내뱉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황연태가 장태산의 눈치를 살폈다.
“아닙니다. 황 대표님 덕분에 여러 사람이 살았습니다.”
“네?”
“문효진 씨를 비롯해 LKB 배우들 계약서 새로 작성해 주십시오. 재능이 있다면 살펴 주시고 아니면 일찍 마음 접고 적성 찾도록 정리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단호한 장태산의 지시에 황연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설마 오정을 진짜 치실 건 아니겠지?’
조금 전 상황을 곱씹는 황연태.
장태산 회장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무척 궁금했다.
***
– 카르마 포인트를 듬뿍 받았습니다.
– 중금리 이자를 선차감했습니다.
M.T.S 이사실.
배중수가 자리를 뜨고 난 뒤 오랜만에 이사실에 들렀다.
황연태 대표가 깔끔하게 관리해 온 사무실은 먼지 한 톨 없었다.
“돈으로 업을 정화하는 게 가장 쉽다니까.”
문효진의 미래를 위해서 선투자했다.
계약금을 후려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신들의 계산에 의하면 문효진 몸값을 두둑이 지불하는 게 맞았다.
그래야 배중수와 악연이 깔끔하게 정리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이래저래 남는 장사했다.
배중수에게 들어간 돈을 제외하고 스타트루에 따로 빚을 청산해 줄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항구파와는 악연 관계에 있는 조직.
구서현 검사가 손쓰기 전에 내가 먼저 정리할 생각이다.
문제는 오정.
– 목화씨를 팔아 신계에서 먹고 사는 갑부 신이 당신에게 포인트를 듬뿍 쐈습니다.
목화씨?
갑자기 불시 전달된 정산 알림음.
“설마?”
문효진과 연관되어 있는 역사적 인물이 누굴까 떠올려봤다.
내 짐작이 맞다면 그분 덕분에 조상님들은 목화솜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포인트를 얻었다.
“문효진 후배님. 앞으로 대박 날 겁니다.”
계획한 일은 아니지만 기분이 좋았다.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섰던 한 사람을 구제했다.
중금리를 갚기 위해 차곡차곡 포인트를 벌어야 하는 입장.
이번 일로 포인트 벌 기회가 많았다.
“최수혁. 생각해 보니 네 미래가 불쌍타.”
지금은 잘나가는 배우가 분명했지만 향후 몇 년 안에 대한민국에 불어닥칠 미투 운동으로 아주 제대로 망가진다.
세상의 기운이 뒤바뀌면서 이중 가면을 쓴 자들은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뿌린 악업이 싹을 틔우는 경우가 한두 건이 아니었다.
인기만 믿고 노력하지 않아 차차 연기력도 떨어진다.
성질을 죽이지 못해 주먹을 쓰다 언론에 자주 노출되기도 한다.
소속사에서 최수혁의 일탈을 막아주는 데 한계를 보인다.
썩은 쓰레기에서 나오는 악취는 태우거나 묻기 전에는 그 냄새를 처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때까지 갈 것도 없이 정리하는 게 낫겠어.”
대한민국의 깨끗한 연예계를 위해 정화사업을 서두를 생각이다.
세상은 넓고 포인트 벌 곳은 많았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말아야 할 순간이 도래했다.
다른 악인들을 처분하는 것에 비해 많이 봐줬다.
하지만 분수를 모르고 도를 넘는 행동을 했다.
이대로 묵과한다면 더 큰 사고를 칠 게 자명했다.
스마트폰을 들었다.
가볍게 번호를 터치했다.
뚜르르르르르르.
짧게 울리는 신호음.
– 바쁜 자네가 먼저 연락을 주시고 이거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대기음은 길지 않았다.
가볍게 전화를 받는 상대.
“오늘 시간 되십니까?”
– 시간? 무슨 일 있어?
“형님께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 허락? 나에게???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