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3
82장. 순대볶음과 쏘맥
슥……, 슥슥.
달궈진 넓은 철판 위로 순대와 야채들이 골고루 섞였다.
순대 타운의 명물 백순대를 오랜만에 본다.
한때 같이 공부하던 스터디 그룹 멤버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던 곳이다.
한국대 출신 멤버가 알려줬던 꽃순이 할머니 순대.
손유리 덕분에 오랜 기억 속의 장소를 찾았다.
할머니는 과거 내가 알던 그때 보다 젊었다.
“야! 이놈아, 그렇게 히마데기 없이 젓고 지랄이야! 고렇게 대충할라면 때리쳐! 장가가면 마누라 퍽도 좋아허것다!”
“에이, 할머니. 제가 요리를 못해서 그렇지 그쪽으로는 선수라고요~. 그냥 힘이 넘쳐요~ 넘쳐!”
“지랄 허네. 하나를 보면 둘을 알아 이눔아. 허벅지 비실거리는 놈이 무슨 쉰 소리여! 넌 딱 보니까 2분짜리여~.”
“네? 2분요? 그게 뭔데요.”
“토깽이!”
“푸하하하하하하하하!”
“토끼래……, 키키키.”
욕쟁이 할머니에게 찍힌 남자 직장인 하나가 망신을 당했다.
철판에 놓인 재료들을 대충 섞다가 벌어진 참사다.
탁탁탁.
그에 반해 난 능숙하게 순대, 양파, 양배추, 당면을 볶았다.
대장금 할매 덕분에 볶는 데는 선수가 됐다.
불판에 어울리는 최적의 타이밍으로 야채와 순대를 섞었다.
너무 빨리, 너무 늦어도 안 됐다.
볶는 것도 타이밍과 일정한 리듬이 중요했다.
“저기 총각 봐봐. 얼굴도 잘생긴 놈이 착착 박자를 탈 줄 알잖여. 남자는 힘도 중요하지만 기술이 생명이여. 이 멍충한 놈아!”
할머니가 나를 가리키며 남자를 구박했다.
“진짜……, 잘생겼다.”
“저 언니 모델 아냐?”
“요리사 출신 아냐? 뭐 이렇게 잘 볶는 거야?”
“순대볶음이 더 먹음직스러워 보여.”
곳곳에서 나와 순대볶음을 번갈아보며 수군거렸다.
들어올 때부터 나와 손유리는 눈요기가 됐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와 손유리를 대적할 커플이 보이지 않았다.
“많이 처묵어라. 그래야 오늘 밤 처자한테 이쁨 받지~.”
욕쟁이 할머니가 다가와 덕담을(?) 던졌다.
굳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괜히 대답 잘못했다가는 줘도 못 먹는 병신이라고 욕을 처먹을 수 있다.
과거에 나도 당했다.
여자 친구도 없이 사내놈들이 술을 마시자 계집도 없는 알 없는 자식들이라고 욕을 처먹었던 기억이 새로웠다.
할머니 욕이 그만큼 찰졌다.
“어이, 거기 불여시 같은 미대생.”
“네~ 할머니.”
“너는 남자 친구 처음 데리고 오는 거 맞지?”
“남자 친구 아니에요. 그냥 후배예요.”
“웃기고 자빠졌네. 야! 니 꼬리치는 거 나도 알고 여기 있는 눈꾸녕들이 다 아는디 어디서 거짓부렁이여!”
“…….”
손유리 얼굴이 빨개졌다.
“저놈 꼭 잡아라. 딱 보니께……, 돈으로 태산을 쌓고 살 놈이여……, 기집이 좀 꼬이것지만……, 잡는 년은 땡잡은기라~ 기회 되면 확 자빠뜨려라~. 알았제?”
욕쟁이 할매 눈치는 귀신같다.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자연히 관상을 볼 줄 알게 된 것이다.
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근디 너 처음 보는디……, 낯이 익는다? 너 나 아냐?”
“오늘 처음 봅니다.”
“그렇자? 근디……, 낯짝이 아주 눈에 익는단 말이시……, 허어 참 벌쎄 치매끼가 왔나.”
와! 저 할머니 뭐야?
나처럼 회귀한 것도 아니면서 아직 만나지 않은 전생의 나를 아는 것처럼 말한다.
소름이 쫙 돋았다.
“니는 자주 와라~. 내가 니 지집들 바꿔서 데려와도 안 말도 안 헐랑께.”
“네?”
“얼굴마담 노릇 좀 혀라. 지집들이 널 보고 침을 질질 흘리고 꼬리치는 게 안 보이냐?”
나도 보입니다요.
그래봐야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난 눈앞의 손유리만 보였다.
“다 됐어요. 먹어 봐요.”
그때 마침 순대볶음이 알맞게 익었다.
앞접시에 순대를 덜어 주려고 했다.
“야야! 덜면 맛이 사라진당께! 뽀뽀하면 침도 꼴딱꼴딱 빨아 마시면서 뭔 내숭이여! 그냥 젓가락으로 처먹어!”
할매! 진짜 짱입니다요!
손유리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대학 3학년답게 참 순수했다(?).
저 정도 농담은 사회생활에서는 양념으로도 안 쳤다.
“그리고 민숭민숭하게 술도 안 처먹냐? 알콜을 빨아야 진도가 나가징!”
“소주하고 맥주 주세요.”
“호오, 짬뽕도 할 줄 아냐? 그려! 넌 머스마 자격 있다. 오늘 술값은 공짜다!”
할머니가 파격적으로 쐈다.
“할매! 나 심정 상하려고 합니다. 얼굴로 사람 차별하는 거 아니에요~ 저 학교 다닐 때부터 단골인데 콜라 한 병 안 주셨잖아요!”
할매에게 놀림 받던 토끼 직장인이 토라진 척 행동했다.
대학 때부터 단골인 것 같다.
“야! 웃기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니 2학년 때 군대 간다고 그 누구여……, 미숙이? 그려, 그 여우하고 만리장성 쌓으라고 내가 방값 줬잖여! 썩을 놈아! 10만 원어치 떡을 얼마나 쳤는지 니놈은 알 거 아녀!”
“어! 미숙이를 아직도 기억하세요?”
“정신 차려 토깽이 놈아! 미숙이 그것이 고무신 신고 딴년들이랑 와서 그러더라. 토깽이하고는 절대 못 산다고!”
“할머니 너무 해요! 그건 모함입니다!!!”
“내가 왜 너무혀! 니 허약한 아랫도리허고 조상을 탓허야지!”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꺄아아아악~.”
“호호호호호호~.”
사방에서 난리가 났다.
적당한 19금 농담이 이 할매의 강점이다.
흥에 겨운 청춘들이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나도 알바생이 가져다 놓은 맥주와 소주를 개봉했다.
“뭐예요? 여기 와 봤어요?”
“처음입니다.”
“할머니가 본 것 같다잖아요. 그리고 순대는 왜 이렇게 잘 볶아요? 여러 번 온 것 맞죠?”
“요리가 취미입니다.”
“피이.”
손유리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귀엽다. 그냥 전부 다.
“소주? 맥주?”
“술도 마셔요? 아직 미성년자잖아요.”
손유리가 조용히 속삭였다.
뭐 미성년자는 남자도 아니고 술도 못 마실 거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그리고 과거 내 주량은 좀 셌다.
“여기 할매 큰아들이 서울지검 부장검사예요. 그리고 둘째 아들이 경찰청 고위 공무원입니다. 막둥이 딸은 판사예요. 단속 절대 안 들어옵니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어라? 그런 당신은 어떻게 아는데?
나야 전생 친구가 알려준 비밀이다.
나와 달리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됐던 스터디 친구가 조용히 알려준 극비다.
그런데 손유리도 아는 눈치다.
뭐지? 이 미대생 누나 정체가?
“고등학교 동문 법대 선배들이 알려줬습니다.”
대충 거짓말로 둘러댔다.
내가 죽다가 회귀한 인간이라 안다고 말해봐야 믿을 인간 세상에 없었다.
“이상하네……, 그거 비밀인데.”
지금이야 비밀이지만 나 고시 낭인 시절에는 쫙 퍼져 있던 이야기다.
이곳 골목 순댓집 상인이 할매를 음해하려고 청와대에 민원을 넣게 된다.
미성년자인 대학생들에게 술 파는 곳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도리어 고발한 상인집이 각종 행정 단속에 걸려 망했다.
알고 봤더니 사촌 이내 친척들이 다들 한 자리씩 하고 있던 집안이었다.
일단 한국대 학생으로 증명되면 술은 언제나 오케이다.
“섞어줘요?”
“네???”
아직 소맥이 일반인에게 폭발적으로 전수되기 전이다.
양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만 제조되었다.
서민 폭탄주를 몰랐다.
소주를 3분의 2 가량 소주잔에 따랐고 그것을 맥주잔에 부었다.
그리고 시원한 맥주로 나머지 잔을 채웠다.
“지, 지금 짬뽕하는 거예요?”
“소맥 만드는 중입니다.”
“소맥요?”
손유리가 의문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가볍게 소주와 맥주를 섞고 숟가락으로 탁탁 찍어 완벽하게 소맥을 완성했다.
풍부한 맥주 거품과 완벽하게 이슬 같은 소주가 혼합됐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소맥.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쫙 돌았다.
꿀꺽 꿀꺽.
손유리가 멍하니 보는 사이 단숨에 소맥을 들이켰다.
“크!”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달달하고 톡 쏘는 소맥의 감칠맛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바로 이 맛이다.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서민 폭탄주다.
“맛있어요? 안 써요?”
깻잎에 정성스럽게 순대와 청양고추를 올려 안주로 먹었다.
술안주로 기가 막혔다.
소울 푸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잊지 못할 전생 요리 10위 안에 들었던 음식이다.
손유리는 소맥 맛을 물었다.
“말아줘요?”
“빨리 취할 것 같은데…….”
“싫음 마십시오.”
여자에게 술 먹여 작업이나 하는 그런 못된 놈 아니다.
우연히 미대 누나와 조우하며 이루어진 예기치 못한 만남이었다.
그냥 이 자리만으로 충분히 감사했다.
맛있는 안주와 시원한 소맥, 그리고 나와 대화를 나눠주는 어여쁜 미대 누나까지 완벽했다.
더 이상 바란다면 그게 나쁜 놈이다.
그리고 오늘은 합격 후 학교에 임시 출근한 첫날이다.
“한 잔 줘 봐요.”
“안 마셔도 됩니다.”
“나 미대 3년생이에요! 선배들과 밤새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는 건 기본이에요!”
하하하하. 여기서는 한 번 웃자.
귀여운 여대생 누나가 투지를 보였다.
슥 스스스슥. 쪼로로로록.
빠르게 한 잔 마련해 대령했다.
“첫잔은 원샷!”
그녀가 잔을 내밀었다.
위험한 신호가 감지됐다.
미대생 누나가 3학년의 자존심을 세우려 했다.
소맥이 달콤하게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 인생의 또 다른 터닝 포인트가 된다는 걸 모르는 그녀다.
짠!
잔과 잔이 경쾌하게 부딪혔다.
그리고……, 그녀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캬아~.”
단숨에 잔을 비워낸 손유리는 내가 있음에도 알콜 절대 신음을 냈다.
“괜찮아요?”
“이거 뭐예요? 왜 이렇게 맛있어요? 맥주의 심심한 맛이 다 사라졌어요!”
신세계 경험은 언제나 충격적인 법이다.
손유리가 또랑또랑 맑아진 눈으로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말아줘요~.”
한국대생 아니랄까 봐 똑똑했다.
바로 말아달라는 의미를 알아챘다.
“그러다 취합니다. 소주가 섞여 있어 도수가 높습니다.”
경고를 잊지 않는 착한 남자다.
“걱정 말아요. 저 술 세다니까요.”
성년인 여성이 술이 세다고 우기는데 못 마시게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조용히 침묵의 암살자인 소맥을 다시 제조했다.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히~. 맛있다.”
깻잎에 순대를 싸서 조그만 입에 밀어 넣으며 그녀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버터 바른 빵에 샐러드나 먹을 것 같은 분위기의 손유리는 순대를 제대로 먹을 줄 알았다.
입고 있는 옷들 모두 명품으로 보이는데 입은 소탈했다.
그렇게 손유리와 잔을 부딪치며 유쾌하게 술을 마셨다.
“어! 유리야!”
갑자기 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말이다.
“아린~.”
손유리가 목소리에 애교를 담았다.
“뭐야? 술 마시러 온 거야?”
“어~ 한 잔 꺾으러 왔지. 넌 무슨 일이야?”
“신입 오리엔테이션 조장을 맡아서 애들에게 대학교 생활의 낭만을 전수하러 왔지. 그런데……, 누구셔?”
등 뒤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강아린 선배가 나에 대해 물었다.
“그게…….”
손유리와 아린은 아는 사이가 분명했다.
그러나 손유리가 나에 대해 아는 건 이름과 법학과 신입생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헉! 너, 넌!”
# 83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