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5
84장. 책임지십시오!
손유리는 놀라 말도 안 나왔다.
10인용 대리석 식탁 위에는 깔끔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파가 살짝 들어간 두툼한 계란말이, 살짝 익어가는 김치, 방금 무친 아삭아삭한 콩나물, 아몬드가 들어가 있는 꽈리 멸치볶음, 표고버섯 청경채 볶음, 새우 호박나물, 매콤해 보이는 두부조림까지…….
한정식 메뉴가 떡하니 차려져 있었다.
“앉아요. 국 드리겠습니다.”
하얀 셔츠에 편안한 바지를 입은 장태산은 감잎물이 곱게 든 에이프런을 두른 채다.
단단한 근육이 셔츠 아래로 드러났다.
큰 키와 완벽한 몸매는 에이프런으로도 감출 수 없었다.
‘설마 혼자 다 한 거야?’
손유리는 도우미 이모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인기척이 없다.
“먼저 이것부터 마셔요.”
장태산이 다가와 유리잔을 내밀었다.
“뭐, 뭐예요?”
“사과주스입니다. 아버지 과수원에서 가져온 녀석들입니다. 즙만 짜내면 당도만 높아 영양가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용물까지 쭉쭉 드세요.”
손유리가 유리잔 속 내용물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거 마시면 머리 아픈 것도 가실 겁니다.”
“네…….”
사실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기도 했다.
속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분위기에 휩쓸리고 강아린의 전투 유발에 깜짝 넘어갔다.
친구였지만 집안도 학업도 어릴 적부터 라이벌이었다.
다행히 예체능과 문과였기에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엮였다.
둘 다 강남에서 첫째가는 사립 유치원 라라 출신들이었다.
손유리는 잔을 받아들고 천천히 음미했다.
‘어?’
평소 먹던 사과주스와 완전히 달랐다.
집에서도 도우미가 좋은 사과로 즙을 내주지만 이 맛이 아니다.
당도는 기본이고 마시는 순간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머리가 개었다.
“앉아요.”
게 눈 감추듯 주스를 마시자 장태산이 자리를 권했다.
슥 스윽.
장태산은 등을 돌린 채 국을 펐다.
‘콩나물 북엇국!’
아빠가 과음한 날 언제나 먹는 국이다.
손유리도 어릴 적부터 먹어 봤기에 풍미를 제대로 안다.
입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냄새만 맡아봐도 제대로 된 황태와 잘 어우러진 콩나물 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손유리가 조신하게 자리에 앉자 장태산이 국과 밥을 가져다주었다.
최근 장만한 듯 식탁과 그릇들 모두 새 거다.
전체적으로 모던한 실내장식과 소품들이다.
20대보다는 성공한 30대가 꿈꾸는 그런 디자인들이다.
그렇다고 유행에 민감한 그런 스타일들도 아니다.
‘전문가 솜씬데…….’
손유리는 빠르게 집을 스캔했다.
졸부들은 따라올 수 없는 품격이 느껴지는 실내 인테리어다.
장태산 행동도 졸부 스타일로 보이지 않았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이들만 풍길 수 있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아버지에게서 느껴지던 여유로움이다.
“먹어 봐요. 약 안 탔으니까~.”
손유리가 멈칫거리자 장태산이 앞에 앉았다.
그 앞에도 기름 좔좔 흐르는 쌀밥과 국이 보였다.
“아주머니 어디 가셨어요?”
“네? 아주머니요? 누구요?”
“도우미 아주머니 안 계세요?”
“없습니다.”
“그럼 이 요리는…….”
“제가 했습니다.”
“지, 직접 다 했다고요?”
“네. 제가 직접 두 손으로 장만했습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요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제 스승님에게 전수받았습니다.”
“요리 스승님도 계세요?”
“물론입니다. 아주 유명한 분이십니다.”
이름을 말하지 않고 빙긋 웃기만 하는 장태산이다.
‘냄새는 죽이는데……, 맛은.’
손유리는 수저로 국을 살짝 떴다.
다진 청양고추와 파가 색감을 더했다.
자취생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조화다.
후룹.
입에 국물을 떠 넣고 마시는 손유리.
“!!!”
그녀의 눈동자가 놀란 고양이 눈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마, 맛있어요!”
감탄을 터트리기 무섭게 손유리는 체면도 잊고 빠르게 수저를 놀렸다.
체면이고 뭐고 이미 사망한 지 오래다.
몸에서 자꾸 시원하고 칼칼한 황태 해장국을 원했다.
‘뭐야? 달걀말이가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거야?’
평소 식사량이 그렇게 많지 않은 손유리였다.
입이 까다로운 20대 대학생이었던 그녀가 정신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김치까지 모두 환상이다.
“끄읍~.”
그렇게 얼마 동안 정신없이 밥까지 모두 먹어치운 손유리는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트림을 겨우 참았다.
‘내가 도대체……, 뭔 짓을 해버린 거야.’
처음 본 남자와 술에 외박에 이제는 남자 밥까지 축냈다.
“물 마셔요. 체하겠어요.”
장태산은 정말 친절했다.
아침 일찍 요리까지 하고 숭늉까지 내왔다.
“요리를 잘하시네요. 공부하기도 벅찼을 텐데 대단해요.”
“쌍둥이 여동생들 간식 만들어 주다가 좋은 스승님을 만나 취미로 배웠습니다.”
‘취미? 이 솜씨가?’
당장 집 요리 담당 가사도우미로 모시고 싶을 정도의 솜씨다.
“쌍둥이 여동생이 있어요?”
“네. 올해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갑니다.”
‘여동생들과 사이가 좋은가 보네.’
손유리는 자상한 장태산 같은 오빠가 있는 쌍둥이들이 부러웠다.
“집이 커요. 부모님들이 시골에 계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어머니 집입니다.”
“아…….”
‘엄마가 부자야? 가정주부라며?’
청담동에 이런 집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최소 50억대는 투자해야 한다.
손유리도 그 정도 시세는 안다.
“집에 있는 그림들이 다 예사롭지 않네요. 누구 작품이에요?”
손유리의 단연 관심을 끄는 건 곳곳에 걸려 있는 풍경화들이다.
대단한 중견 화가 작품이 확실했다.
“어머니 작품들입니다.”
“네? 어머니요???”
“홍인대 미대 출신입니다.”
“아! 홍인대…….”
한국대와 함께 한국 미술계 2대 산맥으로 불리는 홍인대 미대다.
그곳 출신이라면 일단 반절은 먹고 들어갔다.
“그런데 어제 무슨 일 있었나요? 제 친구들과 법대 후배들은 어디로 갔나요?”
쪽팔림을 무릅쓰고 손유리는 어젯밤 상황에 대해 물었다.
이렇게 그냥 묻고 가기에는 찝찝했다.
“기억 안 나요? 어젯밤 사건?”
“사, 사건요?”
사건이라는 말에 손유리는 긴장을 탔다.
난생 처음 제대로 필름이 끊겼다.
그리고 간절하고 두려운 눈빛으로 어제의 썸남 장태산을 바라봤다.
***
‘쌩얼이……, 더 예쁘네.’
화장기 하나 없는 담백한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했다.
피부 미인이 진짜 미녀라는 말이 실감났다.
‘두렵지? 후후.’
밥 한 공기와 국에 반찬 대부분을 싹쓸이한 미대 누나가 내 입만 바라봤다.
지금 심장이 미친 듯이 뛸 것이다.
필름이 끊어진 여자의 모든 걸 아는 남자 앞에서 넘치는 자신감을 유지할 여자는 드물었다.
“정말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까?”
“네……, 하나도요.”
“어디까지 생각납니까?”
“아린이하고 죽자고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에 있는데……, 그 다음은…….”
‘딱 알맞은 곳에서 끝났네.’
사실 그렇게까지 별일은 없었다.
강아린 선배와 후배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집에 가겠다고 나섰다.
그때 손유리는 2차를 외쳤다.
생각보다 겉모습이 멀쩡했기에 다들 말리지 못했다.
강아린 선배가 나에게 집에 잘 데려다주라고 부탁까지 했다.
처음 술을 마셔본 동기들 상당수도 뻗기 일보 직전이라 감당하기가 벅차 보였다.
그래도 대학 생활 거저 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애들 주소를 묻더니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리고 여자 후배들은 직접 자신의 집에서 재우겠다며 데리고 갔다.
그 이후 손유리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핸드폰은 비밀번호로 잠겨 있었다.
배터리가 다 한 듯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
술 취한 여자를 놓고 갈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었다.
주변에 남자들이 취한 채 쓰러진 손유리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차에 태워 집으로 왔다.
나도 몇 잔 마셨지만 심법을 운기해 알콜을 모두 날렸다.
그렇게 집에 입성한 후에 꿀물을 타서 먹이고 재웠다.
자는 동안 등판에 내공을 불어넣어 몸과 진기를 안정시켰다.
그런 까닭에 오늘 아침에 일어나 밥까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러셨어요.”
뜬금없이 물었다.
“네? 뭐, 뭘요?”
“저한테 왜 그러셨나고요.”
“뭘……, 뭘 했다고 그러세요…….”
손유리가 쫄았다.
어젯밤 날 폭탄주 제조가로 만들고 원샷을 달리던 그녀에게 소심한 복수가 시작됐다.
“나……, 처음이었습니다.”
“네……, 처, 처음요?”
손유리가 덜덜 떨며 물었다.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대학교 3학년에 올라갔지만 30대 사회인이었던 나에게는 애송이다.
학교에서나 성인이지 대학생은 아직 예비 인생 준비생일 뿐이다.
“제가 왜 좋아요?”
“네!!! 좋다니요…….”
“어제 분명히 저에게 말했습니다. 첫눈에 반했다고 말입니다.”
“흐끅! 흐끅…….”
손유리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지금 머리가 터질 듯 괴로울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 사건들을 복구하고 싶어 미칠 것이리라.
그러나 어쩌랴.
다 구란데~.
손유리가 내 등판에 엎혀 기분 좋다고 말한 적은 있다.
하지만 첫눈에 반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오빠 덕분에 오늘 제대로 인생 공부할 거다. 손유리~.’
한번 호되게 당해야 술자리에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는 법이다.
술 마시고 정신 줄 놓는 건 남자나 여자나 비추다.
“술 마셨으니 어느 정도 이해하겠습니다. 최소 저에게도 방조범의 과실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짝 줄을 풀어주는 것도 기술이다.
“그, 그러니까요……, 제가 술을 왜 마셔서……, 흐꾹!”
방심하는 손유리.
그녀는 아직 인생 초급이다.
“그래도 그건 너무 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강하게 줄을 감아 들었다.
“네?”
“제 첫……, 크으.”
뒷말을 뱉지 않은 채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손유리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뭔지 모르지만 자기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냥 집에 와서 잠만 잤던 그녀가 뭘 알겠는가.
“죄송합니다……, 흐끅……, 어제 초면이었는데…….”
죄가 없어도 지금은 죄인인 거다.
우기면 허접 패도 장땡으로 변하는 게 지금 이 판이다.
“그래서 지금 저에게 했던 그 행동들에 대해 죄송하다는 한마디로 넘어가겠다는 말씀입니까?”
다시 공격 기술이 들어갔다.
“정말 미안합니다. 뭔지 모르지만 제가 어떻게 하면…….”
손가락을 깨물며 당황하는 그녀.
오케이!
“책임지십시오!”
“채, 책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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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