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81
887장. 보스의 여자(2).
휘릭 휘리리리릭.
수백 평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창고.
수련장으로 사용되는 중앙의 넓은 바닥에서 한 남자가 연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제는 과거 문물이 되어버린 연검.
제조방식이 독특하다 보니 만들 수 있는 장인이 거의 없었다.
운용방식도 까다로웠다.
과거 무공을 수련했던 이들도 꺼려하는 연검.
수련하기가 무척 어렵고 힘들었다.
외적 수련뿐만 아니라 내공 수련까지 겸비되어야 연검을 안전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 어려운 연검을 지금 허공에 현란하게 수놓고 있는 그림자.
고수였다.
연검이 공간을 가를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림자가 무려 수십 개가 넘었다.
검으로만 부딪쳐 싸운다면 이길 자가 거의 없을 듯했다.
치리리리링.
수련이 끝난 듯 검이 미세한 흔들림을 남기며 멈췄다.
“후우우우.”
길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기를 다스리는 남자.
깊은 눈빛에 비해 나이는 어려 보였다.
탈의한 상체는 잔근육이 보기 좋게 발달되어 있었다.
흐르는 땀방울 사이로 드러나는 10여 개의 깊은 흉터.
평범하게 살아온 인생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스윽.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중년 사내가 수건을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대형.”
“패드로가 죽었다는 게 확실해?”
흥건히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시날로아 카르텔의 후안 파비오와 자폭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확실한 거냐고?”
남자의 물음은 날카로웠다.
눈매가 작고 예리했다.
“……FBI 고위직이 개입되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누군가 나타나 그들을 습격했다고도 합니다.”
“습격? 패드로를?”
“그런데 증거가 없습니다. 총격전이 잠깐 있었던 것 빼고는 외부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FBI가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갱단 두목 죽음에 FBI라……. 후안 파비오 때문인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구스만이 슬퍼하겠어.”
“한동안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그래봐야 멕시코에서나 마약왕이지. 미국에서 테러라도 저지르면 놈도 끝이야.”
차이나타운에서 밤의 왕이라 불리는 와칭의 보스 주걸은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911 사태 이후 미국 내에서 테러를 계획하는 건 스스로 자멸하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구스만은 지금 분노하고 있겠지만 딱 그 수준까지였다.
LA 갱들과 달리 차이나타운은 마약을 취급하지 않았다.
본토에서 보내오는 비자금 처리만으로도 수익 규모가 엄청났다.
세력을 확장하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차이나타운으로도 살아가는 데 지장없었다.
전통 있는 이탈리아 마피아와 다른 미국 갱들.
수시로 주인이 바뀌었다.
그나마 이번에는 오래 버텼던 패드로 라이언도 죽었다.
주걸은 잠깐의 애도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약에 취해 사는 들개는 처참하게 죽게 되는 게 운명이었다.
“그리고…….”
주걸을 보좌하는 와칭의 참모 백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는 듯 평소와 달리 긴장했다.
“말해.”
주걸이 낌새를 눈치 채고 기회를 줬다.
“그놈이 돌아왔습니다.”
보스의 눈치를 면밀히 살피는 백양.
“그놈? 누구?”
“……장립 말입니다.”
“!!!”
주걸은 진심으로 놀랐다.
“춘야당에서 딤섬을 먹고 있습니다.”
“……확실해?”
“사진이 전송되었습니다. 확실합니다.”
과거 장립을 휘하로 두고 있던 백양이 그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
주걸의 인생에 있어 흑역사 중 하나인 장립과 첩의 도주.
주걸은 다른 갱 보스들과 달리 부하들에게 넉넉하고 인자했다.
한번 자신의 사람이라 여기면 그 순간부터 깊은 신뢰를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주걸은, 중간 보스들을 중심으로 대형으로 불렸다.
다만 여자에게만은 독한 면모를 보이는 주걸.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차이나타운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 중에 생식기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남자로서의 구실은 물론 아이도 가질 수 없었다.
피가 끓는 나이에 당한 충격적인 현실이었다.
호르몬 약을 복용해 남자 외관을 유지했지만 여자는 품을 수 없었다.
와칭의 보스답게 주변엔 항상 여자들이 차고 넘쳤다.
그중에서 나은 계집으로 골라 첩을 삼았다.
하지만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매번 여자가 바람을 피웠고 발각되는 즉시 가차 없이 주걸의 손에 죽어나갔다.
일이 거듭될수록 분노는 집착으로 바뀌어갔다.
그런 계집들 중에서 유일하게 바람을 피우고도 살아남은 첩이 있었다.
“설마 여여가?”
주걸이 진심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여.
명문 대학 출신으로 똑똑하고 예뻤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진심 어린 사랑이 샘솟았다.
친구 같기도 한 첩 여여.
주걸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곳에서 장립을 만났습니다.”
“으음…….”
주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파르르 불타오르는 강력한 질투.
“패드로 그 자식이 거짓말 할 놈은 아닌데…….”
몇 번이나 확실하게 묻어 버렸다고 말했던 패드로 라이언.
현장 확인 사진까지 첨부해 주었기에 의심을 거두고 믿었다.
“운이 좋은 놈이지만……. 오늘까지인 것 같습니다.”
“여여의 오늘 경호 담당이 누구지?”
“진봉입니다.”
“후훗.”
진봉이라는 이름을 듣고 주걸의 인상이 풀어졌다.
자신보다 몇 배는 더 여여를 아끼는 진봉.
“그놈이 또 다시 죽고자 돌아왔다면 뜻대로 해줘야지…….”
***
따뜻했다.
립……. 너 바보 멍청이 미친놈이라고 한 말 다 취소할게.
여여는 보이는 이미지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진심인 담긴 시를 알고 진실한 사랑을 아는 여자였다.
웬만한 남자들이 모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력을 소유했다.
립이 목숨을 걸만 했다.
다만.
– 이제 떨어져도 되는데…….
립. 질투하냐?
지금껏 립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에 대한 이자와 기타 비용까지 깔끔하게 정산했다.
보스의 여자, 여여.
살포시 그녀를 떼어냈다.
“립…….”
립을 부르는 여여의 눈빛이 애절했다.
“미안해. 그때 같이 죽지 못해서…….”
이렇게 영혼이 아름다운 여자를 봤나!
이것저것 계산하기 바쁜 요즘 여인들.
그녀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혼을 가진 찬란하게 빛나는 여여의 마음 씀씀이.
“괜찮아.”
– 하아.
립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살아 있을 때 계획을 더 확실하게 짰어야지!
보스의 여자와 도망친 곳이 고작 다른 조직의 영역이었다니.
– 제 딴에는 고심해서 결정한 곳이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같이 죽는 게 목표였어요.
말투로 보아 두 사람은 자살을 계획했던 것 같았다.
바보 같은 립.
사후세상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자살은 드물었다.
“떨어져라……. 개자식아.”
그때 누군가 다가오며 싸늘한 살기를 뿌렸다.
입구에서 비웃음을 흘렸던 그 자다.
애틋한 만남을 갖고 있는 모습을 대놓고 싫어했다.
“진봉. 못 본 척해 주면 안 돼?”
여여가 남자를 바라보며 부탁조로 말했다.
“여여……. 당신은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하면 안 됩니다. 보스께 이미 보고가 됐습니다.”
진봉이라는 자도 중국인이었다.
덩치가 꽤 컸다.
깔끔하게 수염을 다듬었지만 파르스름한 면도 자국이 눈에 강하게 들어왔다.
우직해 보이는 입술과 콧날.
여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를 보는 시선은…….
찢어 죽일 듯한 강렬한 질투!
– 보스의 행동대장입니다. 태극권의 고수입니다. 그리고 여여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헐? 지금 이거 사각관계야?
여여는 보스의 여자.
보스의 여자 여여는 립과 눈이 맞았다.
그런 여여를 사랑하는 보스의 오른팔.
꼬여도 아주 제대로 꼬였다.
“아…….”
이미 보고했다는 말에 여여가 긴 한숨을 토했다.
“립. 네가 살아 있을 줄 몰랐다.”
진봉도 립을 알고 있었다.
“나도 그래.”
어쩌다 엮인 운명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이곳에 왜 왔는지 묻지 않겠다.”
진봉의 말투는 선이 굵고 짧았다.
말투에 어울리는 우직한 관상을 가졌다.
과거 시대라면 갱이 아니라 전장을 지휘하는 무장이 됐을 상이었다.
“보스를 만나러 왔다.”
“웃기는 놈이군.”
진봉이 비웃음을 흘렸다.
“말로는 쉽지 않겠지?”
“나를 꺾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진봉, 뭘 믿고 이렇게 자신감이 넘쳐?
눈앞에 상대하고 있는 자가 무늬만 장립이라는 걸 전혀 몰라서 하는 실수였다.
“어디로 갈까?”
“여기서.”
진봉이 휘릭 웃옷을 벗었다.
“허억!”
“싸움이다!”
우당탕탕.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촤르르르릇.
콰다다다당.
식당 주인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식탁을 한쪽으로 밀어버리는 진봉.
탄탄한 어깨와 가슴이 떡 벌어져 보기 좋았다.
“진봉! 멈춰! 립은 당신 상대가 아니잖아!”
여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립의 행색 자체가 연약해 보이는 체격이었다.
“여여. 과거의 내가 아니야.”
“???”
“기다려. 빨리 끝낼게.”
“립…….”
여여가 두 눈만 껌뻑였다.
스스슥.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한번 쓸어주었다.
– 어떻게 알았죠? 그녀가 좋아했는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립이 끼어들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알림음이 팁을 줬지 않나.
립이 나고 내가 립이라고.
내가 장립이었다면 딱 이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미안해…….”
또로록.
여여가 금세 눈물을 다시 흘렸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립이 위험을 무릅쓰고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왔다고 착각했다.
본래 계획은 여기 보스만 해결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지는 것이었는데…….
헛! 설마! 립……. 너 이것도 다 계획적이었어?
– 진심 존경합니다. 흠흠.
이런 못된 귀신 같으니라고!
좋은 대학 나왔다더니 괜히 좋은 대학 입학한 게 아니었다.
내가 립의 큰 그림에 당한 것 같다.
그동안 몇 차례 함께하며 내 성향을 파악하고 나름 계획을 짠 것이다.
반면 살아 있는 나는 립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무늬만 너와 내가 하나였다.
“조심해.”
쪽.
여여가 내 볼에 키스했다.
장미향이 훅 코끝에 맡아졌다.
그런데 많고 많은 향수 중에 왜 장미향?
– 제가 처음 선물한 향수에요. 할머니가 즐겨 사용했던 향이거든요.
여여가 불쌍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고 무드 없는 남자 장립.
“어서 공격해! 어서!!!”
질투에 눈이 돌아간 진봉이 소리를 높였다.
그를 바라봤다.
파바밧.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기선 제압에 나서며 날 잡아 먹을 듯 노려봤다.
“후후훗.”
그런 진봉에게 앞서 받았던 비웃음을 자연스럽게 되돌려줬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