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908
915장. 파라다이스.
“이게…… 진짜 돈 버는 맛이었어.”
장립의 육신을 탈로 쓴 임성철 회장은 고풍스런 테라스에서 해 지는 와이너리의 풍경을 감상했다.
붉은 와인으로 영롱히 빛나는 와인 잔.
벌써 몇 잔을 마셨는지 모른다.
맛이 기가 막혔다.
이제서야 와인의 풍요로운 맛을 알게 되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유기농 내추럴 와인에서 눈으로 보고 있는 풍경과 같은 풍미가 전해졌다.
이상한 소리 같겠지만 눈에 보이는 땅이 풍겨내는 흙냄새와 피부에 느껴지는 바람, 따사로운 햇빛의 기운이 고스란히 와인 맛에서 느껴졌다.
진한 루비의 빛깔, 사향의 부드러움, 적당한 산미, 막 벌집에서 내린 듯한 꿀 향 등등.
온전히 정성을 다해 집중해야만 얻을 수 있는 와인이 가진 풍성하고 다채로운 맛.
한 모금씩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새로운 인생을 맛보는 것 같았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도 와인을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겉멋에 고급 양주만 주구장창 마셨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는 산삼주 같은 몸에 좋다는 술을 골라 마셨다.
와인은 서양 놈들이 마시는 포도 주스 정도로 취급했다.
하지만 최근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장태산과 함께 어울리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와인을 자주 접하게 됐다.
독한 양주는 미국에서 자주 열리는 일반적인 파티에서 쉽게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한국에서처럼 상대의 마음을 열기 위해 취할 필요도 없었다.
와인을 마시며 가벼운 대화부터 천천히 서로를 알아갔다.
적당한 알코올이 주는 쾌감에 젖어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
취기가 느껴지면 대부분 스스로 절제했다.
만취해서 실수할 일이 거의 없었다.
고지식했던 임성철 회장이 장태산과 함께한 여러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세계적인 경제인으로 손꼽혔지만 막상 미국의 평범한 부자 수준에도 못 미치는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는 저택이 조금만 커져도 언론과 국민의 질타를 받았다.
절제가 겸손이었고, 겸손하지 못하면 미덕이 아니라고 교육 받았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대기업 오정전자를 키워낸 장본인이지만 큰소리를 낼 수 있는 입장이 못 됐다.
잘나간다 싶으면 귀신같이 정치인들이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뇌물을 요구해 왔다.
사업에만 매진하고 키워나가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물론 정치인을 통한 뇌물로 심심치 않게 민원도 해결해 왔다.
천하의 오정이라고 해도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할 수는 없었다.
물론 국민들 모르게 옳지 못한 일을 한 적도 있다.
그때마다 기업을 운영하며 뿌려왔던 뇌물이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짙은 어둠이 물러나고 새벽 동이 밝아오며 모든 거짓이 낱낱이 드러나고야 말 아침이 다가옴을 느꼈다.
그간 고수돼 왔던 기업 문화가 바뀌어야 미래에도 생존이 가능할 터였다.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임성철 회장의 이마에 깊게 주름이 잡혔다.
장태산과 동행하는 동안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동안 오정은 잘 성장해 왔지만 장래가 밝지만은 않았다.
선친과 함께 심어 놓은 오정의 DNA에 새로운 유전자를 접목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반도체라는 좋은 원목을 선택해 뿌리를 잘 내렸다.
오정 특유의 기업 색깔도 갖췄다.
그러나 환경이 변한 만큼 갑작스러운 병충해에 당할 수도 있다.
대만의 반도체 업체가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과 일본, 중국의 노골적인 개입도 문제였다.
튼튼하게 안정 궤도를 유지하며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수혈이 필요했다.
현장에서 떨어져 나오니 모든 게 제대로 보였다.
“성장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일 뿐이라고 했지…….”
이곳에 오는 동안 나눴던 대화 중 장태산이 흘리듯 말한 얘기였다.
지금껏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게 했다.
장태산이 일궈 낸 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장태산은 나이답지 않게 즐기면서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앞만 보고 무작정 달리던 자신과는 달랐다.
음악을 비롯해 예술과 문학, 경제와 사회 전반에 관한 통찰력까지 장난 아니었다.
과거 장태산을 처음 만났을 때 괜히 주눅이 들었던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다.
임성철 회장이 품거나 판단할 수 있는 그릇 크기가 아니었다.
“준형이가 이 맛을 알면 좋을 텐데.”
자식들이 떠올랐다.
나름 잘 성장해 주었지만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과 깨달음을 전하지 못함이 아쉬웠다.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와인 한 잔이 주는 맛의 여유를 알면 삶이 굉장히 윤택해질 터였다.
‘기업의 성장만이 진리다’라고 자식들에게 오랜 시간 각인시켰다.
돌아보니 미안했다.
“방법을 찾아야 해.”
임성철 회장은 와인을 마저 비워냈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는 태양.
붉은 황혼만이 넓게 하늘을 수놓았다.
다시 숨 쉬고 살고 있지만 수명이 정해져 있는 임성철 회장의 운명 같았다.
완전히 떠나기 전에 세상에 남겨 놓고 싶은 선물 하나.
“사업보국(事業報國).”
선친께서 평소 자주 하시던 말씀이었다.
이제야 그 깊은 뜻을 알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일도 많았지만 절대로 사업보국을 잊지 말라 항상 당부했다.
나라가 있어야 기업도 국민도 존재할 수 있다고 임성철 회장에게 틈만 나면 주지시켰다.
오로지 가문과 돈만 밝히던 형을 제치고 임성철 회장이 오정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이기도 했다.
“아버지.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정이 진정 나라를 위해 보국할 수 있도록…… 멀리서나마 응원해 주십시오!”
***
– 재신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 카르마 포인트가 듬뿍 지급되었습니다.
언제나 이런 소식을 전하는 알림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입금된 보너스 같은 포인트.
다만.
“으으음…….”
로버트 라이언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미국을 향한 저주와 같은 전망.
몇 번이나 나를 통해 확인하려 했지만 나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 어두운 미래를 예견했다.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미국의 민낯.
플라톤은 말했다.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
현 미국 시민들의 수준이 딱 트럼프였다.
어디를 가도 대접받는 오만한 민족.
터지기 일보직전인 상태까지 배가 불렀다.
고질적인 인종 문제를 애써 외면하며 오로지 자신들의 차고와 집 크기를 늘렸다.
가난과 재난도 상품화로 만들어 버리는 미국 경제인들.
99%가 1%를 위해 피를 짜내고 수혈하고 있다는 걸 미국 시민들은 몰랐다.
완벽한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로 보이지만 가장 저급한 천민자본주의가 판치는 곳이 미국이다.
투자하는 중에도 확실하게 깨달았다.
미국은 자본주의국가의 최악의 표본이라는 걸 말이다.
국가만 부유했지 전체적인 시민들의 삶은 나락의 밑바닥이다.
우주군까지 창설됐지만 가난한 자는 죽을 때까지 병원 문턱 한 번 넘을 수 없다.
오직 부자들만을 위한 파라다이스.
그게 내가 내린 미국에 대한 결론이다.
딱 로마 제국이 그랬다.
초창기에는 로마 시민들이 피를 흘려 제국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배가 부르자 착취한 돈으로 용병을 고용했다가 제대로 털렸다.
배가 부르면 손가락을 넣어 토한 후 다시 배를 채우고 비우는 일을 반복했던 귀족들의 작태.
지금의 미국과 다를 바 없었다.
넘쳐나는 곡물을 바다에 버릴지언정 배고픈 소외된 인류를 위해 적선하지 않았다.
신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태에 대한 대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울 것이다.
그들을 지켜줄 오래된 조상신도 없었다.
여기저기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이들이 만들어낸 미국.
위기의 순간에는 조각조각 분열이 되어 총질로 난리가 날 것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배척하며 미연방은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다.
“로버트.”
이제는 그를 깨워야 할 때.
“네……. 보스.”
얼굴이 창백해진 로버트가 날 봤다.
미래를 예견 받은 선지자의 괴로움이 엿보였다.
“따뜻한 사람이 되십시오.”
“???”
“당신 한 사람만 악에 동조하지 않아도 미국은 미래가 있습니다. 촛불 하나가 1000년의 어둠을 물리치는 법입니다. 세상을 위해 빛과 소금처럼 사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미래를 거스를 수 없지만, 희망의 싹은 땅에 심어도 됩니다. 인류가 지금껏 번성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보스…….”
담담한 격려에 울컥해진 로버트 라이언.
“내가 돕겠습니다.”
빈말이 아니다.
미국 상당수 시민이 트럼프를 지지하지만 반대도 있었다.
반절 이상의 투표권자가 트럼프 집권을 반대했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르지 못했다.
자기 주머니만 채우려는 사기꾼 기업가를 대통령으로 올려봐야 그 진한 맛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민도 그랬다.
말도 안 되는 달콤한 언변과 기레기들의 농간, 그리고 기득권층의 호위로 탄생한 최병박 정권.
어리석었던 당시 시민들의 선택으로 미래 세대는 안정적인 미래를 빼앗겼다.
한 국가가 집행하는 국가 운영자금은 결국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자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세금을 강바닥에 처박아 버린 수십조에 달하는 자금.
차라리 전 국민을 상대로 현찰을 풀었다면 내수 경기라도 지금쯤 살아있을지 모른다.
결국 몇몇 건설 대기업들과 정치권, 언론, 기득권만 돈을 벌었다.
‘우리끼리’라는 정신으로 지들끼리 해쳐 먹었다.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고 문맹률이 낮은 대한민국 국민을 핫바지로 본 결과였다.
지금은 과거 시대의 세뇌를 받았던 이들이 투표를 주도했지만 1년 1년이 지날 때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탄생하게 된다.
투표권을 가진 국민이 주인이고 곧 지도자였다.
“보스만…… 믿겠습니다!”
로버트가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뜨거워지며 붉어진 눈동자.
딱 여기까지!
어제도 충분히 느꼈던 남자들만의 땀내 나는 우정.
오늘은 사양하고 싶다.
– 도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파라다이스로 가자고요!
파라다이스?
잊을 만하면 끼어들어 귀신이 난리를 쳤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허공을 응시했다.
천국일 리는 없다.
와인의 요정 딸기코 할배는 천사가 아니다.
신이 되어서도 와인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와인의 요정이 천국을 만들었다고?
– 형님.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거 알죠? 전…… 죽어서도……. 아니 신이 되어서도 형님만 믿고 따를 겁니다! 충성! 충성!
아무래도 귀신이 약을 먹은 것 같다.
그래도 자꾸 뒷목을 자극하는 호기심.
“로버트 잠시 지하 와인 창고에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로버트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스스로 깨달아 갈무리할 때.
“동양의 정신적 스승들은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도움을 주고 싶다.
“…….”
반짝이는 눈으로 날 보는 로버트 라이언.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한 자다.”
“!!!”
저벅저벅.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더 이상의 충고는 무의미했다.
로버트가 심사숙고해 스스로 깨달아야만 하는 과제.
– 흐흐! 고고!
귀신이 앞장을 섰다.
잘 벌고 잘 놀아서 그런지 갈수록 형체가 진해졌다.
귀신과 신과의 경계 선상 정도.
이 정도면 저승차사가 봐도 애매할 것이다.
더군다나 신급 수준의 강력한 나와 있으니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막상 장립은 모르겠지만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게 바로 나였다.
임성철 회장 입장도 마찬가지.
내 포인트가 아니었다면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끼릭 끽.
지하 와인 저장고와 숙성실로 향하는 길은 깨끗했지만 소음이 좀 났다.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 으흐흐흐. 으흐흐흐흐흐.
음흉한 웃음을 지르며 앞으로 치고 나가는 장립의 영혼.
그 뒤를 따라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끼리릭.
마침 열리는 지하 와인 저장고.
“헛!”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 어때? 죽이죠? 이곳이 바로 파라다이스입니다! 움하하하하하하하!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