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Hero is an Academy Honors Student RAW novel - Chapter (501)
501.
“루나님이 여긴 어떻게?”
놀란 표정을 짓는 칼을 보며 첸 시아가 빙그레 웃었다.
“저는 칼군이 루나님을 단번에 알아본 게 더 놀라운데요?”
칼이 루나를 알아봤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2학년 중 가장 감정 수습이 빠른 첸 시아답게 어느새 특유의 웃는 얼굴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뭐?”
첸 시아의 말에 당황하던 칼이 이내 아차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루나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무래도 네 정체를 알아차렸던 모양인데? 알고 있었어?”
장난스럽게 자신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루나를 보며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고 있었어.”
민망한 듯 얼굴을 감싸 쥐는 지금 생의 가장 절친한 친구를 보며 레오도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
“언제부터 알아차린 거야?”
동아리동으로 향하는 길목.
교정 곳곳에 비치된 벤치에 앉은 레오가 물었다.
“처음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 때는 드웨노님의 세계에서였지.”
레오의 옆에 앉아 있던 칼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 세계에 너무 익숙했거든. 게다가 베르키아님이나 아르온님, 드웨노님과도 허물이 없었고.”
영웅의 세계에서 연기는 필수이다.
최대한 그 시대의 사람인 것처럼.
다른 이들이 그들을 대하듯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레오의 태도는 조금 이상했었다.
눈치 빠른 칼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느낌.
마치 학교에서 자신을 포함한 친구들을 대하듯.
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대하듯.
“그러다가 여름 방학 때 아르온님과 네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눈치챘지.”
레오와 친하게 지내면서 알게 된 퍼즐을 맞춰갔다.
심상치 않은 성장 속도.
대영웅들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인연.
거기에 시작의 영웅과 같은 올 클래스.
설마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는 순간부터 레오가 카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칼의 말에 레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안일했군.”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눈치가 빠른 거 아니었겠냐?”
“왜 내가 카일이라는 걸 눈치챘다고 말 안 했어?”
“입이 근질근질하긴 했지. 하지만 내가 아는 넌 레오 플로브야.”
칼이 레오를 보며 씩- 웃었다.
“시작의 영웅 카일이 아닌 내 친구 레오지.”
입학식의 그 순간부터 레오는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다가오는 이와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다.
격이란 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허물없이 대했다.
처음 레오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는 왜 그렇게 대했나 싶었다.
세상을 구한 자의 여유와 넓은 아량일까?
하지만 칼이 기억하는 한 레오는 매사에 진심이었다.
시련에 맞설 때도.
자신에게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이들을 상대할 때도.
또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앞장서서 달려가며 자신의 뒤를 따르는 이들을 다독일 때도.
그래서 칼은 레오를 친구로 대하기로 했다.
정체가 어찌 되었든 칼에게는 가장 절친한 친구니까.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하네?”
“으헉?!”
그때 레오와 칼 사이로 루나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루나를 보며 칼이 심장을 부여잡고 벤치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런 칼을 보며 루나가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었다.
그러고는 칼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칼 토마스라고 했지?”
“예.”
칼이 루나의 손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툭- 엉덩이에 먼지를 터는 칼을 보며 루나가 말했다.
“내 이름은 루나 루비넌스야. 편하게 루라고 불러.”
“네, 루님.”
“아니, 아니. 편하게 루라고 부르라니까.”
루나가 씩- 웃으며 레오를 가리켰다.
“넌 이 녀석을 친구라고 생각한다며?”
“그렇죠.”
“나도 얘 친구야.”
그러면서 레오에게 태연하게 어깨동무하며 매달렸다.
레오는 귀찮다는 듯 그런 루나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그럼 나랑 너도 친구인 거 아니야?”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하는 루나를 보며 칼이 볼을 긁적였다.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렇지. 이 건방진 놈 말고 난 친구가 또 있었으면 좋겠어.”
루나는 자신의 얼굴을 밀어대는 레오의 손을 꼬집으며 툴툴거렸다.
“우리 귀염둥이들은 날 너무 깍듯이 대하거든.”
레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루나가 첸 시아와 에이란에게 다가가 양팔에 껴안았다.
에이란은 무척이나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첸 시아는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저 같은 놈이랑 친구가 되도 되겠어요?”
“네가 어때서?”
“전 마법 재능도 그닥이고 영웅이 될 가망성도 없는데요?”
“그게 뭐가 중요해?”
루나가 피식- 웃었다.
어깨동무를 푼 루나가 웃차- 하고 레오 곁에 섰다.
“넌 우리가, 또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영웅들의 힘만으로 세계를 구한 줄 아니?”
“아닌가요?”
에이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땡!”
루나가 경쾌하게 웃으며 말하자 에이란이 귀를 축 늘어트렸다.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이 힘을 모았으니까 가능했던 거야. 나나 레오. 아르온과 드웨노는 물론이고 리시나스조차 우리 힘만으로 세계를 구했다고 생각하는 녀석은 없어.”
타인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은 분명히 있다.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고 그 길로 안내하는 사람.
어둠 속에서 한 발짝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존재를 가리켜 사람들은 영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길을 따라오는 건 사람들의 몫이지.”
루나가 손가락 끝으로 머리카락을 살살 꼬며 말했다.
“우리를 지탱해준 건 결국 많은 사람이니까.”
시대를 짊어졌다고 그 시대가 짐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쓰러지려 할 때 쓰러지지 않게 일으켜 세워준다.
도움을 주는 만큼 도움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루나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너와 내가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루나가 다시 한번 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루나 루비넌스라고 해. 넌?”
루나의 말에 칼이 그 손을 맞잡았다.
“칼 토마스라고 해.”
루나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에 칼은 여러 가지 사정을 털어 버리기로 했다.
‘뭐가 됐든 고객이 원하면 그에 맞춰주는 게 상인이고 전장에서 싸우는 영웅이 원하면 그에 맞춰주는 게 서포터니까.’
“그런 의미에서.”
칼이 품에서 아공간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촤라락-!
“헉?!”
“와.”
에이란은 경악성을 내질렀고 첸 시아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칼이 꺼낸 건 다름 아닌 컬렉션 북이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것으로 유명 영웅들의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종류별로 넣은 앨범이었다.
“이거 굉장히 비쌀 텐데요?”
첸 시아가 완성된 컬렉션 북을 보며 묻자 칼이 씩- 웃었다.
“비싸지.”
에이란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오오, 예쁜데?”
루나는 자신의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칼은 품에서 펜을 꺼냈다.
“친구로서 부탁하는 건데. 사인 좀 해줘.”
“사인?”
루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응. 친구라고 존경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 난 마법사로서 성운의 시조 루나 루비넌스를 굉장히 존경해.”
칼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에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 하나하나에 정성들여 사인했다.
“그런데 사인을 하면 좋은 게 있어?”
이런 문화에는 문외한인 루나가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그 물음에 칼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지. 이건 날 부자로 만들어 줄 거거든.”
그 말에 첸 시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칼 군.”
“응.”
“천벌 받을 거예요.”
“괜찮아. 친구로서 부탁이니까.”
칼은 뻔뻔하게 말했다.
사인을 모두 받은 칼이 기분이 좋다는 듯 소리쳤다.
“좋아! 그러면 저녁은 내가 한 턱 쏘지!”
“오오오! 그래도 괜찮아?”
루나가 손뼉을 치며 묻자 칼이 웃었다.
“응. 난 부자가 됐거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루나와 칼이 걸어갔다.
첸 시아와 에이란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오가 미소 지었다.
***
휘오오오오오-!
이제는 엘프들의 영역이 된 혹한의 땅인 대륙 북부에는 수많은 국가가 있다.
하지만 엘프의 국가에는 인간들의 국가처럼 왕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재앙의 시대 당시.
가장 강력한 종족이라고 평가받으며 대륙에서 막강한 세력을 지녔던 엘프가 타르타로스의 공세에 맥없이 무너진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혈통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엘프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을 이루었지만 그 중앙 권력이 타락하자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재앙의 시대가 종식된 후.
세계를 재건하는데 앞장섰던 페어리 나이트 베르키아 에르사르는 엘프 사회의 신분을 폐지했다.
정통을 부르짖은 이들이 있었지만 엘프왕과 하이 엘프는 이미 몰락했다.
모든 엘프가 평등하다는 이념 아래에 엘프 사회는 다시 재구축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뜻은 무뎌지는 법.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고 엘프는 다시 특별함에 도취 되었다.
다른 종족보다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마법 능력과 정령 친화력은 엘프들로 하여금 엘프가 다른 종족보다 특별하다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세이룬이 등장하며 엘프가 마법의 종주가 되자 엘프들은 더욱더 자신들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순혈회’ 라는 것이 탄생했다.
하지만 그 순혈회 역시 얼마 전에 힘을 잃었다.
다름 아닌 그들이 탄생하게 된 원인인 ‘세이룬’ 이라는 존재에 의해서.
세이룬의 한마디는 순혈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순혈회의 근간이 흔들렸고 몇몇 주축 엘프의 배신 행각이 드러나며 순혈회의 위상은 더더욱 추락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천 년 동안 엘프 사회에 뿌리 잡아 온 그들이 하루아침만에 모습을 감춘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용납할 수 없소. 엘프의 보물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 엘프가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세이룬님께서 레오 플로브를 후계자로 인정했다고 하지만…… 코메테스는 엘프의 보물입니다.”
“몇몇 천치들은 세이룬님의 지팡이이니 세이룬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하지만…… 코메테스는 본디 루나님의 것. 세이룬님의 의지만으로 그걸 인간에게 넘긴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이번 황혼의 축제에 맞추어 사절단을 레오 플로브에게 보냈습니다. 코메테스의 반환을 정식으로 요청할 생각으로 말입니다.”
순혈회의 회의에서 열띤 토론이 한창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한 엘프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나는 왜 이곳에 부른 거요?”
룬 에르사르.
현재 세이룬의 교장 대행이자 원로 엘프 중 한 사람이었다.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 엘프다.
하지만 일평생을 순혈회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아니, 오히려 그는 순혈회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엘프였다.
그의 사고방식은 엘프 사이에서도 굉장히 진보적인 편에 속했다.
그렇기에 룬은 현재 기분이 굉장히 언짢았다.
‘에이란의 편지를 읽고 있었거늘!’
손녀가 보내온 편지를 읽다가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불려 나왔으니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순혈회의 해산 같은 건설적인 회의인 줄 알았건만.’
불쾌감을 드러내는 룬을 향해 순혈회 엘프가 말했다.
“룬님께서는 엘프의 위인인 베르키아님의 후손이시지 않습니까?”
“루나님의 제자인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혈회의 말에 룬이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세이룬님이 자신들을 부정했으니 이제는 베르키아님을 전면에 내세울 생각인가?’
애초에 엘프의 3대 위인이라 평가 받는 베르키아가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이유 역시 순혈회 때문이었다.
세계를 재건한 베르키아는 다른 종족과의 유대를 강조한 엘프였다.
선조의 가르침은 당연하게도 순혈회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루나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음에도 베르키아는 엘프 사이에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다.
에르사르 가문은 여전히 명가였지만 베르키아의 업적가 위상을 생각한다면 입지가 좁은 편이었다.
물론 에르사르 가문은 대대로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선조의 뜻에 따라 진보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하지만 세이룬이 순혈회를 부정한 지금.
순혈회에서는 자신들이 받드는 엘프 영웅을 베르키아로 바꿀 생각이었다.
자신들을 부정한 세이룬보다야 5000년 전 인물인 베르키아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는 게 편할 테니까.
선조를 모독하려 드는 순혈회를 보며 룬이 싸늘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끼이이이익-!
회의실 문의 소리가 갑자기 열렸다.
“종족의 중대한 논의를 하는 중이거늘! 어찌 함부로 문을 연단 말인가!”
가장 상석에 있던 순혈회 엘프가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칠 때였다.
처벅- 처벅-
무언가 젖은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쥔 엘프 여성이었다.
“무, 무슨!”
“네년은 대체 무엇이냐!”
순혈회 여기저기서 경악과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강력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이들은 모두 강력한 별의 마법사.
사상이 뒤틀리고 문제가 있다고 해도 하더라도 그들의 실력까지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푸확-!
하지만 마법이 미처 완성되기 전.
찰나의 순간 엘프 순혈회의 목이 날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 순간부터는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전율스러운 속도로 순혈회를 참살한 엘프 여성의 검이 마지막으로 룬에게 향했다.
카가강-!
하지만 룬은 그녀의 검을 방어했다.
그리고 검과 검이 맞닿은 순간.
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푸확-!
룬의 가슴에 피가 튀었다.
찰박-
엘프 여성은 가슴을 쓸어보았다.
아마 룬이 작정하고 검을 휘둘렀다면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베였을 것이다.
그만큼 룬은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는 차마 검을 다 휘두르지 못했다.
물론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다…… 나보다는 마이드를 많이 닮았구나.”
안도와 씁쓸함이 묻어난 목소리로 엘프 여성은 발걸음을 옮겼다.
철벅-
그런 엘프 여성을 보며 룬이 몸을 일으켰다.
“너는 변절자가 아니니까. 비켜 주지 않겠니?”
인자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룬이 울컥 피를 토하며 말했다.
“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잖니?”
쓴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며 룬이 고개를 저었다.
“위대한 선조시여…… 이건…… 이건 아닙니다. 제가 아는 당신은 이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룬이 절박한 목소리로 베르키아에게 말했다.
“비하르랑 같은 말을 하네.”
같은 스승을 둔…… 평생을 어둠 속에 살았던 친구를 떠올렸다.
“예전에 나를 보던 비하르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알고 있다.
눈앞의 후손이 고결한 영웅이란 걸.
누구보다 찬란한 빛으로 세상을 감싸 온 영웅으로 살았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하지만…….
“미안하지만. 이게 나야.”
베르키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끼이익-
털썩-!
룬이 쓰러졌다.
베르키아는 순혈회를 빠져나갔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망시켜버렸네.’
끝내 검을 휘두르지 못한 룬을 떠올리며 베르키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베르키아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박- 사박-
눈이 내린다.
그녀의 몸에 닿은 눈은 녹지 않았다.
사박-
손바닥 위로 눈송이가 떨어졌다.
처음 하얀 눈을 봤을 때 얼마나 신기했던가?
“용납할 수 없어.”
베르키아의 눈에 시커먼 감정이 어렸다.
“그분들의 희생을 모욕하고…… 살아가는 자들을…… 난 용납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