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Hero is an Academy Honors Student RAW novel - Chapter (529)
529.
터벅- 터벅-
레오는 복도를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체는 이미 수습되었지만, 사방에 가득한 혈흔이 이곳에서 어떤 참상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레오는 말없이 바닥과 벽에 튄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그런 레오의 뒤에는 첸 시아가 서 있었다.
원래 이곳은 외부인은 들어 올 수 없다.
하지만 레오는 멜리나의 권한으로 어렵지 않게 이곳을 조사할 수 있었다.
현장 조사를 마친 레오가 입구로 돌아갔다.
스릉-!
그리고 검을 뽑았다.
첸 시아가 그런 레오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볼 때였다.
스윽-!
레오가 허공에 천천히 검을 휘두르며 전진했다.
사악! 스악-!
느렸지만 허공이 검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 모습을 본 첸 시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었던 일을 재연하고 계신 거야.’
레오의 검이 훑고 지나간 곳에 피가 흩뿌려져 있다.
복도를 지나 회의실 내부까지 도달한 레오의 검이 뚝 멈추었다.
그리고 검을 늘어뜨린 채 눈을 감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레오는 베르키아의 검술을 모두 알고 있다.
‘내가 가르쳤으니까.’
베르키아의 검술과 마법의 틀을 만들어준 건 아르온과 루나지만 그 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지도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다.
그렇기에 이 참상을 일으킨 범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베르키아다.’
“레오 도령, 명령을 내려주세요. 그림자들을 부를까요?”
그림자는 배신자를 찾아 추격하고 말살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랬기에 추격에 능한 자들이었다.
“아니.”
첸 시아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찾아낸다고 해도 위험해.”
레오의 말에 첸 시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첸 시아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이 참상을 일으킨 게 누구인지.
“일단 에르사르 가문으로 가서 에이란과 합류하자.”
“에이란 양에게는!”
레오의 말에 첸 시아가 다급히 말했다.
“에이란 양에게는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
그 말에 레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루니아처럼 에이란 역시 레오가 선택한 영웅 후보생이다.
루나의 유지를 이을 자이자 미래에 함께 싸울 동료.
강한 의지를 가진 소녀라는 것도.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망설여졌다.
‘에이란은 베르키아와 닮았어.’
단순히 선조와 후손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두 사람은 닮은 게 없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외적인 모습은 이어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성격이 비슷한 것도 아니다.
가문으로 이어져 내려온 검술과 마법을 이어받긴 했지만 그건 후천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에이란과 베르키아의 공통점은 엘프라는 것과 마검사라는 것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가 에이란을 보고 베르키아를 떠올리는 이유는 티 없이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그런 에이란에게 과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선조가 증오에 불타는 망자로 부활했다는 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오였다면 이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에이란이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을 테니까.
하지만 베르키아가 저렇게 된 모습을 보고 있자면.
레오로서도 망설여졌다.
침묵하던 레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아니야.”
***
타타타탓-!
에이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에르사르 가문 저택의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달리는 와중에도 에이란의 손은 덜덜 떨려왔다.
오래전 마족들에 의해 부모님을 모두 잃은 에이란이다.
룬이야말로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
게다가 그녀의 할아버지는 세이룬에 입학하고 철없이 학교를 떠나 집에서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는 에이란을 이해해주던 자상한 이였다.
‘내가 또 철없이 내 생각만 하는 동안……!’
눈을 질끈 감은 에이란이 룬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그 앞을 지키는 가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에이란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거칠게 문을 열었다.
쾅!
“할아버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에이란의 절친, 루니아가 룬의 침대 앞에 앉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루니아를 보며 에이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루, 루니아 양. 할아버지는……?”
“에이란? 에이란이 왔느냐?”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누워 있던 룬이 무거운 목소리로 에이란을 찾았다.
“네! 할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몸은 어떠신가요? 괜찮으…….”
다급히 침대로 달려가던 에이란의 얼굴이 굳고 말았다.
룬의 손에 있는 몇 권의 책을 발견한 것이다.
“에이란, 나는 네 독서 취향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꽤 과격…….”
“꺄아아아악!”
얼굴이 빨개진 에이란이 비명을 내지르며 룬에게 달려가 황급히 책을 낚아챘다.
그런 에이란을 보며 룬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할애비는 다 이해한다. 네 엄마도 이런 책을 자주 읽었지. 취향은 달랐지만. 어쨌든 그래서 이른 나이에 네가 생긴…….”
“아아악! 아악! 아악!”
에이란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룬의 목소리를 덮어 버렸다.
루니아는 민망한 듯 시선을 치웠다.
긴장이 풀린 에이란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마, 많이 아프신 거 아니셨나요? 분명 큰 부상을 입었다고…….”
“언제 적 상처인데 그걸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할까? 상처는 다 나았지. 하지만 나도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후유증 때문에 시름시름 앓고 있지. 에구구. 늙으면 죽어야지.”
룬이 탁탁- 허리를 두들기며 말했다.
인간이었다면 미청년의 외모를 한 룬이 그런 모습을 하면 적응을 잘 못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엘프인 루니아와 에이란이 보기에는 말 그대로 늙은이의 투정으로 보였다.
그 태연한 모습에 에이란은 영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책들은 어떻게 찾으셨어요?”
“할애비가 손녀 방을 정리할 수도 있지.”
“하지 마세요! 저도 사생활이 있다고요!”
“걱정마라, 일기장은 안 읽었으니까.”
“당연한 거라고요!”
룬의 말에 발작하던 에이란이 심호흡을 하고 진정하더니 루니아를 보았다.
“그나저나 루니아 양은 왜 우리 집에……?”
“교장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면담 중이었어.”
“아, 제가 방해를 했군요.”
“응, 괜찮아. 네 이야기도 하고 있었으니까?”
“제 이야기요?”
“응, 네 유별난 독서 취향에 대해 물으시길래…… 커헉? 커허헉!”
울상을 지은 에이란이 발작하듯 루니아의 목을 졸랐다.
***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나서야 진정한 에이란이 룬에게 물었다.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바로 알려주지 않으신 거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에이란의 말에 룬이 빙긋 웃었다.
“에이란, 엘프 내에서 내 지위가 결코 낮지 않다는 건 너도 잘 알 것이다.”
룬 에르사르는 엘살베키아의 의회장이자 임시라고는 해도 세이룬의 교장직을 맡고 있다.
“현재 세이룬은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세이룬, 아니 종족 자체가 내부적으로 소란스러워질 게다. 나를 이해해주려무나.”
룬의 말에 에이란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건 에이란도 알고 있다.
비단 세이룬뿐 아니라 엘프 사회 전체가 현재 짧은 시간 내에 너무도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그 변화는 분명 좋은 쪽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루나님의 강림이 시작이었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사상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5000년 전 세계를 구했던 대영웅의 강림이라니?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 덕분에 종족의 자부심이 강한 엘프들은 더욱 콧대가 높아졌다.
대영웅 중에서도 왜 루나만이 현세로 돌아왔을까?
엘프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닐까?
기적을 목격한 엘프들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엘프 우월주의자인 순혈주의자들의 입지가 강해졌다.
에이란은 세이룬에서 그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때쯤이었다.
엘프의 전유물로만 생각되었던 별의 마법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게 만드는 ‘별의 마법 입문서’ 가 등장한 것은.
렌이 저술한 그 마도서는 세상에 등장하자마자 엘프 사이에서 금서로 지정되어 규탄받았다.
수천 년 동안 엘프는 마법의 종족이라 불렸다.
그 이유가 바로 루나가 남긴 별의 마법 덕분이었다.
그리고 렌의 마법 이론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엘프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엘프는 별의 마법 입문서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원래부터 외부와의 교류를 지양하던 엘프들은 더더욱 다른 종족과 벽을 세우려는 기미를 보였다.
그때였다.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이.
혜성의 마법사 세이룬의 강림.
성운의 시조의 후계자라 불리는 그 위대한 엘프의 위인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원래라면 엘프 우월주의자들의 콧대를 한껏 세워 줄 수 있었던 대사건.
하지만 그 역사적인 순간은 세이룬에 의해 지금의 엘프 사회를 부정당함으로써 산산이 부서졌다.
자신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세이룬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아닌 루메른의 학생을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다.
그에 따라 엘프 사회의 격변은 혼란으로 바뀌었다.
넓은 시야를 가진 이들은 변화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위대한 선조가 자신들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충격과 자신들이 이때까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엘프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러는 와중에 또다시 성운의 시조가 재림했다.
그리고 그 루나와 순혈회 간에 충돌이 있었다는 목격담이 이어지자 엘프 사회는 더더욱 큰 혼란을 맞이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혼란을 수습하고 종족을 이끌고 나아갈 영웅들은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엘프 의회의 원로, 룬 에르사르였다.
그런 그가 피바다가 된 순혈회의 회의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엘프 사회가 뒤집히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룬의 손녀인 에이란에게도 소식이 닿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그래도 저에게는 이야기 해주실 수 있잖아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떨리는 목소리에 원망이 깃든다.
하지만 눈에는 룬에 대한 걱정 때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래서, 범인은 누구인가요?”
눈물이 맺힌 에이란의 눈에 보기 드물게 살기가 맺혔다.
그걸 보며 룬이 얼굴을 굳혔다.
범인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손녀에게 전해도 될까?
잠시 고민하던 룬이 이내 화제를 돌렸다.
“범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레오 학생은 함께 오지 않았니? 분명 같이 와 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은데.”
“레오님이라면 잠시 들를 곳이 있다고 가셨어요?”
“들를 곳?”
룬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사건 현장에 다녀온다고 했어요.”
“사건 현장이라.”
룬이 나직이 중얼거릴 때였다.
똑똑-
“가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들라 하라.”
룬의 말과 함께 문이 열리며 레오와 첸 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오님!”
“오, 오셨…… 아. 아니. 왔어? 레오?”
에이란이 반갑게 레오를 맞이했고 루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레오를 맞이했다.
룬은 그런 루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룬과 눈이 마주친 루니아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룬이 레오에게 물었다.
“사건 현장은 잘 보았나?”
“네.”
“그래. 안타깝게도 그분이 한 일이네.”
“그분?”
“할아버지, 범인을 아세요?”
룬의 갑작스러운 말에 루니아와 에이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첸 시아도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는 말없이 빤히 룬을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하지만 눈앞의 원로 엘프는 무언가를 깨달은 게 분명했다.
깊은 연륜이 느껴지는 룬의 눈동자가 지혜롭게 빛난다.
“잠시 레오 학생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른 학생들은 나가 있어 주게.”
룬이 빙그레 웃으며 세 소녀에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세 소녀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방을 나섰다.
끼익- 쿵-!
문이 닫히자 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킨 룬은 마법을 이용해 방 내부의 목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방비를 끝마친 룬이 레오에게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에르사르가의 38대 가주, 룬 에르사르가 위대한 시작의 영웅께 인사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