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Hero is an Academy Honors Student RAW novel - Chapter (806)
전설급 영웅은 아카데미 우등생 805화(806/844)
805.
‘남자 친구라고?’
레아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룬이 남자 친구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룬은 많은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누가 보더라도 넋을 잃을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카일에 대한 상실감으로 인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눈은 묘하게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그래서일까? 룬의 압도적인 강함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호기롭게 룬을 직접 지켜주겠다는 소리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룬에게 남자 친구라 부를만한 존재가 있을 리 없다.
‘룬에게는 카일이 있으니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
카일을 향한 마음은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룬이 남자 친구라니?
‘착각한 건가? 그러고 보니 첼시가 말했지. 레오라는 남자와 함께 움직였다고.’
자신의 정보에는 없는 사람이다.
첼시의 말로는 엄청난 실력자이고 룬과도 제법 친해 보였다고 했다.
첼시가 레오에 대해 말할 때 레아는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저 첼시와 일리아나가 이룬 극적인 변화에 대해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가 아주 뜨겁던걸?”
레이나의 말에 레아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를 잘못 보고 오해한 모양이네.’
룬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레아는 몬스터 군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이것들을 빨리 해결하고 룬에게 합류해야 해.’
룬이 혼자가 아니라고 하긴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란 건 변함 없다.
소환술을 사용하려던 레아는 문득 구축된 방어선의 배치를 바라보았다.
‘급조한 것 치고는……. 효율이 좋네.’
“과연 레이나님이세요. 방어선을 굉장히 효율적으로 구축하셨네요.”
“응? 이거 내가 안 했는데?”
“네?”
“저기 칼이 했어.”
“칼이요?”
레아가 조금 놀란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 아까 네가 준 마나 포션. 몇 병 더 있어? 있으면 좋은 말 할 때 내놔.”
“아니, 너 지금 삥뜯냐? 그리고 시간과 노력! 돈을 들여서 만든 엄청 귀한 거거든!”
“뒤져서 나오면 한 병당 한 대다?”
“진짜 없어! 시제품으로 한 병만 만든 거라고!”
“루니아 양, 방금 정말 깡패 같았어요.”
질겁하는 칼과 당당한 루니아.
그리고 옆에서 지적하는 에이란.
‘칼은 이런 대규모 전투 경험이 없을 텐데?’
본능적으로 이러한 배치를 구상했다니.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적을 상대할 수 있는지 자연스레 알고 있는 거다.
그때.
레아의 마법을 뚫고 몬스터 군단이 방어선에 도달했다.
레아는 한발 물러서서 전장의 상황을 살폈다.
잠시 후.
칼은 전장의 흐름을 읽어나가며 전투원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입학 때부터 서포터 지망이었던 칼의 움직임은 전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어느 순간부터 칼은 영웅인 레이나를 필두로 몬스터들과 싸우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지휘하고 있었다.
넓은 시야. 빠른 상황 판단.
그리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는 능력.
‘지휘관.’
강력한 영웅은 많다.
하지만 그 영웅들의 능력을 끌어내고 개성 강한 영웅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능력은 강한 영웅보다 드물다.
‘저 아이에게……. 저런 능력이 있었다고?’
레아의 눈이 흔들렸다.
‘난 대체……. 1년 동안 뭘 봤던 거야?’
잘 지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루메른에서 자신이 보지 못한 가능성을 꽃피운 첼시와 일리아나.
영웅으로서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퇴를 권유했던 칼의 예상치 못한 능력까지.
‘난…… 아이들의 뭘 보고 있었던 거야?’
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갈 때.
번쩍! 파바바바바밧-!
몬스터 군대 사이로 거대한 빛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룬이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룬까지 합류했으니 이건 이긴 싸움이네!”
레이나가 히죽 웃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모두! 저 징그러운 괴물들을 섬멸하자!”
“와!”
사기가 치솟았다.
플라이 마법으로 하늘에 서 있던 룬이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레아를 노려보았다.
‘저 녀석!’
환생하고 만난 후.
룬은 몇 번이고 레아에게 카일에게 마음이 없었냐고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카일과 가장 오래 함께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레아였으니까.
누구보다도 카일의 가능성을 믿었으며 곁에서 지켜봤을 때 가장 카일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마음이 있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끈질긴 물음에도 레아는 몇 번이고 부정했다.
카일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숨긴 것보다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은 섭섭함이 더 컸다.
그래서 이 자리에 레오보고 오지 말라고 했다.
골이 나서 심술을 부린 것이다.
그렇게 레아를 노려보던 룬이 멈칫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
하지만 룬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오늘따라 많이 힘들어 보이네.’
전생에 친자매처럼 지냈던 사이다.
그런 만큼 룬은 다른 동료들보다 레아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더 많이 봤었다.
룬의 시선이 레아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칼을 발견했다.
‘레오는 레아가 칼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고 했었지.’
룬은 재작년, 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던 레아를 떠올렸다.
‘진학을 할 수 있는 실력이지만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고 했던가?’
흔들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레아를 노려보던 룬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마음 편하게 미워하지도 못하겠네.”
***
평화로운 시골 영지에서 일어났던 몬스터 대군의 습격.
플로브 영지의 주민들은 동화 속에서나 들어봤던 재앙에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구원하듯 영웅들이 몬스터 대군을 모두 물리쳤다.
그에 플로브 영지 주민들은 영웅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작은 축제를 열었다.
“오, 이거 맛있겠네요.”
레이나는 통으로 돼지를 굽는 주민들 앞으로 가 눈을 빛냈다.
그 앞에서 입맛을 포크와 접시를 든 채 입맛을 다시고 있던 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라? 레이나님은 귀족분들에게 초대받은 거 아니셨나요?”
“나는 그런 딱딱한 분위기 딱 질색이야. 이런 분위기가 더 좋아.”
빙긋 웃은 레이나 주변으로 플로브 영지의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레이나님이면 화염의 마녀님이시죠?!”
“너무 예쁘세요!”
“몬스터들이 무섭진 않나요?”
화염의 마녀의 명성은 시골 영지에도 퍼져 있었다.
“예끼. 이놈들! 영웅님들 귀찮게 하면 안 돼.”
그때 돼지를 굽던 주민 중 노인이 혼을 내자 레이나가 까르르 웃었다.
“괜찮아요. 아이들이 귀엽네요.”
“언니도 예뻐요!”
“동화책 속에 나오는 공주님 같아요! 누나!”
“오호호호호호호! 보는 눈이 있네.”
기분이 좋아져서 웃는 레이나를 보며 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은 아줌마 나이…….”
“너 아까도 느낀 거지만 은근히 용감하다?”
“예? 무슨?”
“나보고 아줌마 나이라고 생각했지?”
“컥? 독심술이라도 있으세요?”
“찍어 본 건데 사실인가 보네?”
덥석-!
“히이이익!”
칼이 자신의 어깨를 잡는 레이나를 보며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들의 파티에 초대받지 않은 다른 로드렌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귀족의 사치스러운 파티에는 신물이 나 이런 소박한 파티가 더 좋은 이들이었다.
웃던 그들은 레이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평화롭네.”
“뭐랄까, 아까 전 상황이 악몽 같아요.”
“그러게. 그나저나 역시 룬 선배야. 에레보스의 조각을 패퇴시키시다니 말이야.”
“레오님도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아까부터 레오님이 안 보이시네요?”
루니아와 에이란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에레보스의 조각이 깨어났는데 앞으로 괜찮은 걸까?”
“괜찮아, 괜찮아. 그깟 조각 하나가 뭐 대수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루니아 옆에 룬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커다란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푸하! 맛 좋~다! 끄윽!”
어깨로 입가를 닦던 룬이 가볍게 트름을 하자 루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루, 룬 선배. 체통을 지키세요.”
“응? 체통? 그게 밥 먹여 줘?”
“……취하셨어요?”
“나는 이 정도로 안 취해!”
루니아와 에이란이 잔뜩 풀어진 모습의 룬을 보고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술냄새를 풀풀 풍기고 눈이 살짝 풀린 룬은 누가 보더라도 취해 있었다.
하지만 이내 즐거워 보이는 룬을 보며 두 엘프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깔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룬이 문득 파티장 한쪽을 바라보았다.
야외 파티의 구석.
그곳에 누군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음침하게 저게 뭐하는 짓이야?”
작게 인상을 찡그린 룬이 맥주잔을 두 개 들고 레아에게 다가갔다.
“혼자서 궁상맞게 뭐해?”
“아! 룬.”
레아가 룬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런 레아 옆에 털썩 주저앉은 룬은 맥주잔을 떠넘기듯 레아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꿀꺽꿀꺽- 맥주를 마셨다.
레아는 맥주잔을 쥔 채 물끄러미 그걸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룬. 난……. 틀린 걸…….”
“야, 이 망할 사기꾼 도마뱀아.”
“응?”
룬이 레아를 빤히 노려보았다.
“너 카일 좋아했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다 알았어. 너도 카일을 좋아했다는 거.”
레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런 레아를 보며 코웃음을 친 룬이 말했다.
“왜 솔직하게 말을 안 한 거야?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해?”
“……미안.”
레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기분이 더 안 좋아질까 봐 그랬어.”
“흥. 내 남자 보는 눈이 글러먹진 않았네. 너도 그 개자식을 좋아했던 거 보면.”
“혹은 둘 다 글러먹은 게 아닐까? 그런 등신을 좋아한 거 보면.”
“……그런가? 병신 자식.”
룬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반쯤 빈 맥주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아.”
“응.”
“난 네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
“그냥 조금 헤매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
룬이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쏟아질 듯 빛나는 별이 보였다.
“5000년 전이라면……. 단 한 번의 실수가……. 짧은 헤맴이 세계의 멸망과 직결되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
“5000년 전처럼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 혼자 짊어지기에는 5000년 전보다 더 무거워졌으니까. 우리랑 나눠 들자. 그게 아니라면…….”
룬은 고개를 들었다.
5000년이 흘러 세계를 위해 목숨을 거는 영웅들과 그 새싹들이 보였다.
“후대와 함께 나눠 짊어줘도 되지 않을까?”
“네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네.”
“나도 최근에 깨달았어. 어리석었지.”
“…….”
레아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카일에 관한 건 숨겨서 미안해.”
“괜찮아. 내가 날카롭게 굴기도 했잖아?”
“그건 그래.”
“사실 네가 경쟁 상대가 되면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신경 쓰였던 거지만…….”
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고개를 살짝 깔고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픽- 하고 웃었다.
“생각해보니 넌 너대로 장점이 있고 난 나대로 장점이 있더라고. 전혀 꿀릴 게 없을 것 같아.”
“……너 지금 어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룬은 말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레아의 가슴팍을 콕콕 찔러보았다.
그리고 아주 측은한 눈빛을 레아에게 보냈다.
“전생보다 더 가난해졌구나?”
레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입매는 사납게 일그러지기를 반복했다.
“죽여버린다, 망할 주정뱅이 귀쟁이.”
“이제야 너 답네.”
룬이 깔깔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런 룬을 보며 관자놀이를 누른 레아가 말했다.
“그나저나 내가 카일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훗. 그건 기업 비밀이야.”
룬이 우쭐한 표정을 지은 후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 룬을 보며 레아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세상에 자신이 카일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증거는 두 가지뿐이다.
첫 번째는 전생에 자신이 수기에 남긴 카일에게 전하는 마지막 편지.
그건 오로지 카일만이 열람할 수 있도록 봉인했다.
봉인한 레아 본인도 열람할 수 없으며 수기는 현재 자신이 보관 중이다.
‘마지막은……. 드래고니아에 묻었던 혼인서약서.’
물론 그건 작년에 있었던 마물 여왕 실라투나의 침공으로 인해 드래고니아가 초토화되면서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카일이 실존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었기에 레아로서는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발견된 거라면 카일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어.’
“혹시 나랑 카일의 혼인서약서라도 발견한 거야?”
“푸흡? 커헉! 케헤헤엑! 쿨럭! 쿨럭! 쿨럭!”
맥주를 들이키다 사례가 들린 룬이 미친 듯이 떨기 시작했다.
룬은 입을 뻐끔거리며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레아는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룬이 쌍심지를 켰다.
“혼인? 호오오오온이이이이인 서약서어어어어?! 그 개자식이랑 어디까지 갔어!”
맥주잔을 내팽개친 룬이 레아의 머리를 쥐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레아가 말했다.
“카, 카일이 먼저 하자고 했어! 카일이!”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판단한 레아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 개자식! 내 순정을 희롱해! 죽여버릴거야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레아 너!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눈이 돌아간 룬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날뛰기 시작했다.
그에 겁이 질린 레아가 도망쳤다.
룬이 그런 레아를 쫓아가려 할 때.
갑작스러운 소란에 루니아와 에이란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왜, 왜 그러세요!”
“루, 룬 선배님! 진정하세요!”
“이거 놔!”
자신을 붙잡은 루니아와 에이란을 떨쳐내며 룬이 레아를 쫓아가려 할 때.
덥석-
누군가 뒤에서 껴안듯 룬을 끌어 앉았다.
“진정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껴안는 레오의 행동에 룬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분노로 인해 레오의 팔을 깨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레오가 빨랐다.
우득-!
“끄륵?!”
레오가 순간적으로 룬의 목을 살짝 꺾어버렸다.
축- 늘어진 룬을 보며 한숨을 쉰 레오가 안절부절못하는 루니아와 에이란에게 룬을 넘겼다.
“데려가서 재워.”
“룬 선배, 괜찮으세요?
“네, 넵.”
루니아와 에이란이 룬을 데리고 갔다.
쯧쯧- 혀를 찬 레오는 레아의 뒤를 쫓았다.
***
털썩-
“하아……. 진짜. 이게 무슨 난리람.”
레아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조금 전 싸움이 있었던 장소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가만……. 그런데 왜 내가 도망쳐야 하지?”
생각해보면 억울했다.
“카일은 임자가 없는 몸이었잖아?”
물론 혼인서약서 자체는 자신이 카일을 속여먹은 거긴 했다.
‘그래도 룬이랑은 관계없잖아. 억울하면 자기가 빨리 행동하던가.’
물론 차마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 될 테니까.
“하아.”
한숨을 푹 쉰 레아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멀리 파티가 열리는 곳에서 신나는 음악이 들려왔다.
댄스 타임인 모양이었다.
흥겨운 노래가 울려 퍼지는 파티.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마물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전장.
5000년 전의 힘든 싸움을 이겨낸 직후가 떠올랐다.
“……힘들다, 카일.”
닿지 않을 말이라 생각하며 레아가 작게 중얼거릴 때.
저벅-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레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쫓아 왔어? 어느새?’
룬이 쫓아온 거라 생각한 레아가 다급히 도망가려 할 때.
“분위기 좋네.”
처음 듣는 목소리에 레아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 누구시죠?”
자신의 감각을 피해 바로 뒤까지 도달한 소년을 레아는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얀 머리카락의 소년은 그런 레아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아 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감상하던 레오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실까요?”
“그러니까, 누구…….”
“사기꾼 도마뱀 아가씨?”
“…….”
레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레아의 눈에는 소년의 영혼의 색깔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
목소리가 떨렸다.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