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05
3부 123화
– 3 –
미처 챙기지 못하는 사이에 내 주변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자식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거다. 이번에는 딸이다. 전체로는 셋째, 딸로는 첫째다.
“정말 예쁘구나.”
“엄마를 쏙 빼닮았는데요?”
축하하러 찾아온 부인네들이 아이가 예쁘다고 칭찬하는 소리를 벽 너머에서 듣고 있으니 입이 절로 귀에 걸린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나 네덜란드어로 하는 인사말과 축복도 들린다. 오늘 산모에게 찾아온 손님들은 지선성에 거주하는 유럽계 부인들이다.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눈동자는 보석 같네요. 어쩌면 이렇게 예쁜 아기가 다 있담.”
“머리카락 색깔도 엄마랑 똑같고.”
“왕비께서도 참으로 기쁘시겠습니다. 이런 아이를 만나게 되셔서요.”
“다들 예쁘게 봐주셔서 고마울 뿐이랍니다.”
쾌활하게 답례하는 상희와 얌전하게 웃음 짓는 올렝카의 목소리를 들으려니, 나도 저기에 앉아서 대화에 한몫 끼고 싶어졌다. 현대 한국이었다면 내가 끼어들어도 그렇게 큰 실례는 아닐 텐데. 팔불출이라고 뒤에서 웃음거리는 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아직은 남녀 간에 내외해야 하는 시대다. 유럽계 집안들이야 그런 데서 제약이 좀 덜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황친이다 보니 예법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시면서 옆방에서 엿듣기는 하시옵니까? 친왕께서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집사 박종선이 옆에서 변죽을 올렸다. 계면쩍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칭찬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은데 어쩌겠는가, 허허.”
지난번 생에서 얻은 마지막 딸이 숙원 정씨 소생 옹주였다. 숙원 정씨는 내가 장난스럽게 들인 후궁이었던지라 크게 총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옹주에게는 아버지 노릇은 하려고 노력했었다. 그 애가 무술년(1598) 생이었으니 딱 98년 전이다.
98년이라고 해도 중간에 죽었다 깨어나면서 뛰어넘은 시간 74년을 빼면 24년 만에 얻은 딸인 셈인데…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들인 은이와 준이가 태어났을 때보다 좀 더 설렌다. 내가 딸바보 기질이 있나 보다. 하기야 지난번 생에도 혜연이한테는 꼼짝을 못하긴 했지.
“계집애들이 귀엽기는 합지요. 키워서 시집 보낼 생각 하면 앞이 캄캄합니다만….”
박종선도 그동안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낳았다. 그래서 신나게 딸 키우는 이야기를 했다. 박종선은 내 집사에, 노비 출신이기까지 하니 분명 격이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14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지내다 보니, 그냥 동네 형님처럼 느껴진다.
옆방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수다를 들으면서 나도 박종선과 잡담을 나눴다. 한참 있으려니, 의자 밀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부인.”
“왕비 전하,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들 가세요. 유주부인, 내가 배웅하러 나갔다 오지. 자네는 아이와 같이 있게나.”
“예, 전하.”
문이 덜커덕거리며 열리고, 별당 복도를 지나가는 부인네들의 웃음소리와 발소리가 방문 앞을 지나갔다. 나와 박종선은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박종선 말마따나, 친왕으로서의 체통이 걸려 있지 않은가.
“전하, 객들이 모두 갔으니 인제 그만 나오시옵소서.”
“고맙소, 왕비.”
문밖에서 나는 상희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여니, 드레스 차림을 한 상희가 웃으며 복도에 서 있었다. 손님들과 드레스 코드를 맞추느라 일부러 양장으로 입은 모양이다.
“그냥 들어오지 그러셨습니까. 어차피 다들 구면이실 텐데요.”
“예전에 그랬듯 부군(夫君)들과 동반으로 만나는 자리라면야 괜찮겠으나, 지금은 내 집에 있는 내실(內室)이니 여인네들을 만나기는 좀 그렇지 않겠소? 허허.”
물론 문을 꼭 닫고 단둘이서만 있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지만, 그래도 시중에서 입방아에 오를 일은 안 하는 게 제일이다.
“자,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루라도 아이를 보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으시니, 손님들이 없을 때 마음 편히 보세요.”
“고맙소, 왕비.”
옆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제 28일 된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올렝카의 흰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기쁨과 사랑으로 빛나는 그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이를 돌보느라 늘 수고가 많소, 부인. 왕비가 은이와 준이를 낳을 때 곁에서 도와주고 아이들을 챙겨 준 것만 해도 고마웠는데, 또 돌보아줄 아이가 생겼으니.”
“제 기쁨인걸요, 전하.”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내 품에 안겨주면서 올렝카가 얼굴을 붉혔다.
“뵐 때마다 말씀드리지만, 이 아이를 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이랍니다.”
“그러게나 말이오. 정말 하늘이 내려주신 아이요.”
꼬물거리는 아이를 안아서 내 볼에 살짝 댔다. 부드럽고 폭신한 아기 피부가 주는 감촉은 언제나 행복을 준다.
“우리 루시아, 장래 얼마나 멋진 처녀로 자랄까.”
자라다 보면 색깔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내 첫딸의 머리카락은 금발이고 눈은 파랗다. 엄마인 올렝카와 똑같은 색깔이다. 엄마만큼 착하고 예쁜 아가씨로 자라면 좋겠다. 한국식 이름은 명주(明珠)로 정했다.
내가 올렝카가 임신한 줄 안 건 양력으로 올해 7월, 임신 6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본국에 보낼 식량 조달이나 선박 마련, 인디언들에게 협력 요청 등 바깥일이 워낙 많다 보니 계속 밖으로 나돌았는데, 짬을 내서 집에 들렀더니 올렝카의 배가 남산만 해져 있는 게 아닌가!
“이런 기쁜 소식을 왜 알려주지 않았소!”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올렝카가 나와 만난 지 올해가 14년째다. 그동안 관계한 횟수를 최소한으로 어림해 봐도 천오백 번은 될 터인데, 그렇게 해도 안 생기던 아이가 덜컥 생겼으니 올렝카 자신도 바로 믿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확실해지면, 더 건강하게 자리가 잡히면 전하께 알려야지 하다가 그만 오늘까지 소식을 알려드리지 못했어요. 너무 기뻐하다가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제 탓인 것만 같아서 너무 슬플 것 같았어요.”
“그래, 그래. 잘 생각했소.”
올렝카가 마침내 임신했다는 이야기에 너무 흥분해버려서, 올렝카가 내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응, 응’하면서 대답만 했다. 그만큼 기쁘고 고마웠다.
“전하, 유주부인에게 정말 기쁜 일이 생겼으니 소첩도 기쁩니다. 그동안 소첩이 무척이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이제 그 보은을 할 차례입니다.”
옆에서 상희가 웃었다. 올렝카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왕비께서는 소녀에게 이미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본국에서 가져온 귀한 약재로 제게 보약을 지어주시면서 장복(長服)하라고 하셨는데, 그 약이 효험을 보아 이리 아이가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왕비가 아이 들어서는 약을 지어주었다고…?”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상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들딸을 골라서 수태하는 것은 하늘의 뜻인지라 약으로 이룰 수가 없으나, 몸을 보하여 아이가 들어서기 쉽게 해주는 정도는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처치입니다. 1년 정도 꾸준히 들도록 하였더니 효험이 있었습니다.”
“오오, 그렇구려. 정말 고맙소.”
1년 동안이나 올렝카가 약을 먹는 줄도 몰랐으니 나도 참 한심한 남편이었구나. 올렝카도 굳이 자기가 보약 먹는다고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듯하긴 하지만, 어떻게 이 큰 저택에서 아무도 내게 귀띔 한번 해주지 않았단 말이냐.
“소녀가 왕비께 다른 이들은 모르게 해달라 부탁드렸사옵니다. 왕저 안에 소문이 퍼지면 제가 너무 부끄럽겠기에….”
그럼 상희가 부탁을 받고 집안 입단속을 했다는 이야기인가. 가솔 전원이 상희의 지시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는 거니, 하인들에 대한 장악력은 나보다는 상희가 더 강한 셈이라 볼 수 있겠구나. 역시 집안의 실세는 바깥일에 바쁜 대감마님이 아니라 안방마님인 거였다.
“알겠다. 괜찮으니 출산일까지 몸조리 잘하거라. 왕비, 부탁하겠소.”
“맡겨주시옵소서, 전하.”
“그리고 전하께서는 또 밖으로 나가 출산일 직전에야 돌아오셨지요.”
“나랏일이 너무도 급하니 어쩔 수 없었잖소.”
“저희가 뭐라고 하였습니까?”
상희와 올렝카가 함께 웃었다. 나도 계면쩍게 함께 웃었다. 공적으로 어떤 용무가 있었건, 사적으로야 함께 있어 주지 못한 데 대해 올렝카가 서운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니 말이다. 그리고 나를 놀림감으로 삼더라도 좋으니, 둘이서 친하게 지내는 게 훨씬 낫고.
“음, 그러고 보니 다음 배편으로 폴란드에 편지를 보내야겠소.”
“폴란드에 말인가요, 전하?”
올렝카가 눈을 크게 떴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리 장인어른께 드디어 외손녀가 태어났다고 알려드려야 하지 않겠소? 세상 반대편에서 지금 한참 고생하고 계실 텐데.”
지금 폴란드 왕 노릇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끝날 때까지 아직 3년은 더 남았을 거고, 그동안은 실컷 고생해야 할 거다. 얀 소비에스키가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인, 그대가 드디어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폴란드에 계시는 폐하께서 얼마나 기꺼워하시겠소? 조금은 늦었지만, 이제라도 알려드립시다.”
“감사합니다, 전하.”
올렝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의도치 않게 분위기가 좀 무거워지려는 참에 상희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전하, 아직 유주부인이 꾼 태몽에 관해서는 듣지 못하셨지요?”
“음, 듣지 못하였소. 어떤 내용이오? 누가 꾸었고?”
태몽이라는 건 꼭 산모가 직접 꾸는 건 아니다. 그런데 올렝카는 자기가 직접 꾸었다더니 조금 망설이면서 그 내용을 이야기했다.
“두 분 전하와 함께 바다를 건너 대한에 날아갔어요. 그리고 도성 여기저기를 구경하다가 도성 한가운데 있는 황궁에 갔지요. 한참 신기하게 여기저기를 구경하는데, 갑자기 산통이 시작되더니 궁전 안에서 아이를 낳았지 뭐겠어요.”
황궁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에 상희가 들려준 적이 있다고 했다. 궁궐을 묘사한 책이나 그림과 같은 물건은 절대로 시중에 유포되지 않기 때문에, 올렝카로서는 들은 대로 상상할 수밖에 없다.
“혹시 우리가 대한 본국으로 가게 되는 징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함부로 입 밖에 내면 효험이 사라질까 봐 오늘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역시 꿈은 꿈이었어요. 전하, 이런 게 한국어로 ‘개꿈’인가요?”
“어, 음, 그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올렝카는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궁궐 안에서 애를 낳을 수 있는 건 태황과 태자의 후비(后妃)들 뿐이다. 즉, 올렝카는 내가 태황이 되는 꿈을 꾼 거다. 어디 가서 함부로 입 밖에 냈다가는 자칫 내 목이 달아날 수 있는 꿈이다.
“전하, 소첩이 유주부인에게 잘 해설할 테니 전하께서는 그만 사랑채로 가시어 남은 일을 돌보시옵소서.”
내 난처한 기분을 눈치챈 상희가 살짝 끼어들었다. 덕분에 곤란한 설명을 내 입으로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안도하면서 루시아를 올렝카에게 돌려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일 또 오리다. 무리하지 말고 루시아는 여기 왕비와 유모에게 맡겨두고, 유주부인 그대는 좀 넉넉히 쉬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올렝카가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소녀 시절의 발랄함에 원숙함이 더해진 그 예쁜 얼굴이 정말 아름다웠다.
– 4 –
폴란드에 편지를 보낸다지만, 미주에 도착하고 6년이 지나는 동안 폴란드에서 우리한테 보낸 편지는 딱 2통이었다. 외갓집 식구들 소식을 전하는 올렝카의 외숙부가 쓴 편지가 한 통, 그리고 얀 소비에스키가 쓴 편지 한 통이었다.
여기 미주에서 폴란드까지 편지를 보내려면 1년 이상 걸린다. 그리고 유럽에 가는 도중에 적어도 4번은 배를 바꿔 타야 한다.
먼저, 우리 연락선이 태평양에 면한 항구도시인 아카풀코까지 간다. 거기서부터는 육로로 멕시코를 횡단해서 대서양 쪽 항구인 베라크루스로 간다. 거기서 다시 스페인 배에 실려서 카디스로 가고, 카디스에서는 예수회 네트워크를 거쳐서 폴란드까지 간다.
아직 오스만과 벌이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소식은 그 경로를 역으로 해서 전해졌다. 그리고 그 길로 누에바 에스파냐에 새 부왕이 곧 정식으로 부임한다는 소식도 왔다.
“미초아칸 주교는 전임자인 겔베 후작이 급거 귀국하는 바람에 임시로 부왕직을 대행하는 참이었습니다. 서반아 본국에서 후임자가 오는대로 부왕 자리를 내놓고 성직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성직자는 성직에나 신경 쓰고 속세 일에는 끼어들지 말아야 하는 법일세. 모든 승려들이 우리 알망주 신부처럼 신자들의 영혼에만 신경 쓰고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라미츠는 요즘 이형준과 함께 은이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는 중이다. 이형준도 슬슬 몸이 따르지 않아 이제는 각지 향교를 순회하는 활동은 멈추고, 지선성 향교에만 나가면서 여기 찾아오는 이들만 가르친다. 그러면서 은이에게도 기본적인 교육을 시작했고 말이다.
두 사람에게는 은이가 이제 겨우 만으로 4살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너무 무리한 교육은 삼가라고 말해두었다. 적당히 놀면서, 머리를 제대로 개발할 만큼만 가르치라고 말이다.
“새 부왕은 적어도 골치 아픈 문제를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길 바라네. 종교를 내세워 엉뚱한 소리나 하지 말고.”
우리가 기분이 나빠서 그렇지, 식량 공급 자체는 멕시코가 없어도 잘 이루어지고 있다. 작년에 4백만 석이었던 남미주와 북미주에서의 식량 수확은 올해 6백만 석으로 뛰어올랐다. 올해 본국에서 건너온 일손까지 동원하면 내년에는 9백만 석은 거둘 수 있으리라.
배도 5백 톤급 상선을 올해 한 해 동안에만 17척이나 건조했다. 이토록 일이 순조로우니, 다소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유럽 쪽 사정을 살펴볼 여유도 생겼다. 그쪽도 꽤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