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08
3부 126화
성시균은 그전에는 웬만하면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크게 뭐라지 않고 좋게 말했었다. 헌데 본국에 다녀온 뒤에는 상당히 깐깐해졌다. 처음 칙사로 와서 영국에서 나하고 만났을 때처럼, 엄하고 딱딱한 성품이 도로 표면으로 나왔다. 특히 권한 침해 문제에 엄격했다.
“소관의 생각도 같습니다. 사실 전하께서 권 감관을 보내 남미주 일대에서 신착민들이 잘 대우받는지 살피게 하신 일도, 엄하게 따지면 전하께서 폐하께 부여받으신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소관도 전하께서 이번 일은 행동을 삼가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형부 부장 윤형기, 예부 부장 안형운 등이 잇달아 성시균을 편들었다. 내 밑에 있는 본국 출신 관리들 대다수가 이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나선 거다.
“일단 도총관에게 시정을 청하시고, 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본국에 글을 올려 폐하께 조정을 청하십시오. 그것이 법도입니다.”
“…알고 있소.”
알지, 알지, 잘 알지. 내가 보위에 올라 있을 때도 만약 부여주 병마사가 속말주에서 터진 일에 개입해서 멋대로 이래라저래라했으면 당장 역모죄를 걸어서 그놈 목부터 날렸을 거다. 그러니 형황이 보낸 관리들이 내게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당장 피해를 보고 있고 앞으로 또 건너와서 피해를 볼 본국 출신 신착민들은?
“내년에 오는 백성들은 동변으로 보내야겠소.”
내 입이 떨어지는 순간 권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곧바로 환성이 터졌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허나 동변은 너무 척박한 황무지가 많으니, 대상을 조직하여 원미주 방면으로 백성들을 보내소서. 그리고 이를 막는 토인은 철저히 무찔러 우리 대한의 위엄을 보이는 것이옵니다.”
“내, 그 일은 더 논하지 말라 하지 않았는가.”
그만 입을 다물라고 눈치를 줬는데도 권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동안 내 옆에서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왔으니, 이참에 내게 자기 뜻을 재차 강조하고 싶어진 모양이다.
“다시 한번 생각하시옵소서, 전하. 원미주를 정벌하면 주민이 없는 새 땅을 신착민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완전한 새 땅인지라 선주자들이 가하는 차별과 억압도 없을 거고, 편안히 정착할 땅을 얻은 신착민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황실의 은혜에 길이 충성할 겁니다.”
적당히 좀 해라. 벼슬도 없는 백두(白頭)한테 아파치 토벌에서 세운 공을 인정해서 정6품 정위 자리를 줬으면 ? 동변관리사는 정3품까지 토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 일단 그 정도로 만족하면서 차분히 기다릴 일이지, 이건 재촉이 너무 심하잖아.
“서장관 정호찬이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기로 하였잖은가. 동원할 군사도 없고 저편 사정도 모르는데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가? 지금은 본국에 양곡을 보내는 중대한 일에 집중해야 할 때일세.”
장희재의 군사는 있지만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그래도 권율을 생각하면 권율의 적장손인 권훤한테 함부로 대하기는 조금 그렇다. 최대한 좋은 말로 점잖게 다독였다.
하지만 권훤은 아직 젊은 탓이라 그런지 말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자기 못지않은 확장파인 호부 부장 송영진도 대놓고 맞장구치지 않고 눈빛으로만 동조하고 있건만, 말을 그치지 않았다.
“전하, 소관도 일거에 원미주 전체를 얻자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미주대하 기슭에다 작은 거점이라도 세우고, 그 주변으로 조금씩 세력을 넓히면 되지 않겠습니까? 소관에게 그 일을 맡겨주시면 과거 충장공께서 삼성부를 지키셨듯이 지켜내 보이겠습니다.”
권율이 해서부 대군을 상대로 치러낸 삼성부 방어전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격전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길이 남게 만든 장본인 역시 정철이다. 당시 삼성부 안에 머물며 향군장 노릇을 하던 정철이 쓴 『삼성별곡(三姓別曲)』 덕분이다.
정철이 쓴 그 서사시 덕분에, 만약 경인왜란이 없었다고 해도 권율은 후대에 길이 이름이 남았을 거다. 권훤이 현조부의 그런 위업을 자기도 달성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고 해서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대의 의기는 칭찬할만하나, 아직은 원미주를 칠 사정이 되지 못한다. 아직 우리 인근에 백성들이 살 만한 비옥한 땅이 많이 있으니, 그쪽으로 보낸다.”
기둥에 걸쳐둔 등채(지휘봉을 겸하는 말채찍)를 들어 탁자 위에 있는 지도를 짚었다. 내 회의실 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는 커다란 미주 지도를 깔아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투명한 판유리를 덮어서 미주 전역이 한눈에 들어오게 해두었다.
“그대들도 알고 있을 거요. 북미주는 위말강을 남쪽 경계로 하고 있고, 남미주는 위타구산 이남을 그 권역으로 하고 있소. 그 가운데 땅은 남미주에도, 북미주에도 속하지 않아 오직 토인들만 살고 있을 뿐이오.”
동변관리사가 담당한 구역은 ‘미억산령 동쪽, 미주대령 서쪽’이다. 대부분은 이 규정에서 미억산령 동쪽만 생각하니 네바다, 유타, 아이다호 일대만 내 구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북 미주 관할이 아닌 오리건 해안지대도 분명 ‘동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남미주 밖, 북미주 밖’은 다 동변이다. 고로 중미주도 동변이다.
“이쪽은 논을 갈기는 어려울 거요. 하지만 밭은 충분히 일굴 수 있고, 바다에서 가까우니 본국과 연락하고 먼저 개척한 남북 미주에서 도움을 받기도 쉽소. 이제 처음으로 백성들이 개척하러 들어가니 먼저 터를 잡은 이들이 텃세를 부릴까 염려할 필요도 없소.”
전에도 언급했지만, 이 지역에 드나드는 조선인들은 오직 모피를 수집하는 상인들뿐이다. 채집을 주로 하고 수렵을 일부 병행하는 원주민들도 성향이 거칠지 않고, 인구밀도도 매우 낮아서 우리 이주민들이 들어가 정착할 여지도 충분하다.
“미주대분지만큼 비옥한 옥토는 아니나, 아파치처럼 거친 토인도 없고 정말 가서 갈기만 하면 되는 땅이 바로 옆에 있는데 어찌 우리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원미주부터 개척하려고 욕심들을 내는 거요. 내년에 건너오는 백성들에게는 다른 길을 안내합시다.”
등채로 지도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 위말강 이남, 위타구산 이북을 일단 중미주(中美州)라 칭합시다. 하지만 이는 아직 본국에서 지사를 보내고 구획을 정하지 않은 곳이니, 우리 동변관리사가 맡아서 다스리도록 함이 옳소. 그럼 이 지역에서 우리가 직접 백성들을 돌보아 정착시킬 수 있지 않겠소.”
권훤이 원미주의 장점이라고 주장하던 여러 요소, 특히 텃세를 부릴 선주민이라는 요소는 여기에도 없다. 고로 중미주에 이주한 백성들은 정말 스스로 모든 기반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 총관은 우리 동변관리사에서 백성들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으로 받아들일 거요. 자기도 그 백성들을 돌보고 지낼 곳을 찾아 밀어 넣느라 이미 머리가 깨질 지경일 테니까 말이오.”
내가 내 의도를 설명하자, 고위급 부하 중에서 유일한 미주 출신인 공부 부장 홍순철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끼어들었다.
“하온데 전하, 내년에 신착민으로 올 백성들을 미주 총관부가 아닌 중미주에 받아들이고 우리 동변에서 돌본다고 하면, 정착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도 모두 우리가 부담해야 합니다. 수만 명이나 되는 백성을 돌볼 재정이 있겠습니까?”
공부는 유타까지 가는 도로 개설과 추가적인 광산 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었고, 그 작업에 쓸 경비도 부족해서 곤란을 겪고 있다. 본래 예정대로 했으면 미주 총관부 재정에서 보조를 받았어야 했는데 그 보조가 다 날아간 상황이니 말이다. 본국에 쌀을 보내야 하니까.
나라고 돈 문제에 둔감할 리는 없다. 생각해둔 바를 차분히 설명했다.
“물론 10만 명이 건너오리라 하는 난민 전부를 우리가 부담할 수는 없고, 일부만 감당할 수밖에 없을 거요. 하지만 몸은 좀 고될지 몰라도 선주민, 아니 선착민들에게 노비라도 된 듯 혹사당하기보다는 그 백성들에게도 나을 거요. 어쨌건 자기 일을 하는 거니까.”
여차하면 내 주머니를 좀 더 털어도 된다. 본국에 양곡을 보내지 못하는 대신 중미주에서 정착하는 이들을 더 돌보는 것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선택이니 말이다. 어차피 예왕이랑 이 구휼곡 문제를 가지고 돈지랄로 경쟁하기는 틀려먹었고….
“이 부장, 지금이 겨울이기는 하나 병부 소속 관원들을 보내서 중미주에서 백성들을 보낼 만한 곳을 물색하시오. 그리고 그 주변에 사는 토인들과도 충돌이 생기지 않게 미리 교섭해 두도록 하시오. 저들이 우리 백성들에게 땅을 내주는 데 대한 대가도 치러야 하니까.”
돈을 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철제품과 포목, 화약 정도는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개척이 진행되고 농장이 수확을 올리기 시작하면 수확물을 어느 정도 분배해 줄 필요도 있다. 이쪽 맛을 본 토인들이 아예 수렵과 채집 대신 땅이 덜 필요한 농업으로 돌아서 주면 더 좋고.
“전하께서 착안하신 바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중미주라 칭하신 그 지역은 분명 총관부가 관할하는 구역 밖이니, 손대셔도 월권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괜찮다고 하실 겁니다.”
성시균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다른 본국에서 온 예부, 호부, 형부 부장 세 명도 잠시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더니 찬동하는 뜻을 밝혔다. 김종건이야 내가 하는 일에는 뭐든지 찬성이니 물어볼 것도 없고, 홍순철도 천천히 손을 들었다.
“만약 소관이 반대하면, 남미주에 넓은 농장을 가지고 있는 제 친지들의 이익을 생각해서 반대한다는 비난을 당하겠지요. 그러니 소관도 찬성하겠습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그 규모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조절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물론이오. 이 총관과 논의해서 적절히 나누도록 하겠소.”
부장들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본국에서 오는 피난민을 오리건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순전히 인도적인 목적에서만은 아니다.
첫째, 방금 회의에서 누차 언급했듯, 대평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아직 개척할 토지가 많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다스릴 인구 확보다.
지금 미주 인구가 60만을 채웠다지만 이건 순전히 이종덕이 담당하는 남북 미주 인구다. 내 관할 구역인 동변관리사 인구는 60만은커녕 6천 명도 안 된다. 그나마 태반은 지난해에 아파치 토벌전 과정에서 복속한 파이우트족과 유트족 인구다.
동변구역 전체로 따지면 인디언 인구가 3만~4만 정도는 될 거다. 하지만 제대로 파악해 호적에 올릴 수 없는 인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디언들은 아직 조선 황실에 대한 충성심도 없고, 당연히 세금도 내지 않는다.
동변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며 속오군으로 복무해줄 정착민 인구가 필요하다. 이번 기근을 통해서 본국에서 새로 건너오는 백성들이 바로 그런 존재로 들어와 줄 수 있다. 북미주 쪽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정착은 어렵지 않으리라고 예상한다.
처음부터 내가 확실하게 통제해서 제대로 건설하면, 중미주는 남미주나 북미주와는 아예 다른 형태로 만들 수 있다. 속오군만 해도 기강이라곤 없는 민병대인 지금의 미주 속오군과 전혀 다른, 본토 수준 기강과 전력을 유지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도 남북 미주 사이, 조선령 미주 한가운데 말이지….’
금과 쌀이 넘쳐나는 남미주만큼 부유하지는 않겠지만, 황실에서 직접 챙기는 식민지로서 훨씬 충성스러운 수천 군사를 거느릴 수도 있다. 내 사병이 아니라 엄연한 관군이다.
물론 장희재가 거느리는 1만여 정예병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병사들은 병마사 휘하에 있는 정규 둔전병이고, 동변 외곽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내게는 지휘권이 없다. 하지만 후방인 오리건에 주둔하는 속오군이라면, 충분히 내 손에 들어올 수도 있다.
당연하지만, 이런 속내까지 부장들 앞에서 다 드러내지는 않았다. 드러내서 좋을 게 전혀 없지 않은가. 내가 여기 권훤 같은 애송이도 아니고.
“이 호소문을 쓴 자는 일반 백성이라 하였던가?”
“예, 전하.”
자기가 들고 온 바로 이 호소문 한 장 때문에 이 회의가 시작되었건만, 정작 자기 의견은 짓밟히고 말았다. 시무룩해져 있던 권훤은 내 질문을 받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소관이 친왕 전하의 명을 받아 왔다는 소문을 듣고, 백성 하나가 은밀히 객사 담을 넘어 내밀고 갔습니다. 들키면 주인에게 멍석말이를 당한다면서 말입니다.”
“못된 선착민 지주 놈 같으니.”
혀를 차면서 다시 한번 호소문을 처음부터 읽었다. 다시 한번 읽어도 어처구니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놀라운 구석은 있었다.
“지금 이 백성이 처했다고 하는 상황이 참으로 기가 막힌다만, 일반 백성이 쓴 글치고는 이 호소문은 제법 사리가 맞고 조리가 있구나.”
호소문은 한자라곤 하나도 없이 순 국문으로 괴발개발 적었다. 하지만 글자를 못 알아볼 정도로 악필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용도 두서없이 늘어놓지 않고서 제법 짜임새 있게 썼다. 체계적으로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 쓴 것 치고는 꽤 잘 쓴 글이었다.
“이자는 글을 어디서 배운 것인가? 한자가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제대로 글방에서 배운 건 아닌 듯한데.”
“사지가 멀쩡한 사내들은 다들 초모됐을 때 군영에서 글을 배웁니다. 그 이후에야 조보나 소설을 통해서 계속 글을 접했겠지요.”
“아, 그렇지.”
18세가 되어 징병당하면 6개월 동안 군영에서 기초훈련을 받는다. 물론 가장 많이 하는 훈련은 제식과 진법이지만, 교련장에 나가지 않고 실내에서 교육을 받는 교과로 습자(習字)와 병훈(兵訓)이 있다.
습자 시간에는 국문을 자유롭게 읽고 쓸 정도로 교육을 받는다. 입영하기 전에 이미 글을 익힌 자들은 조교로 다른 군사들을 가르치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병훈 시간에는 군사로서 임금을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품고 복무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즉, 정신교육이다.
‘쉽게 말하면 같은 거지.’
이런 체계가 완비된 것도 선조, 연이 때다. 정말이지 내가 손자 하나는 잘 둔 모양이다.
“군영에서 글을 익힌 자들이 좋은 글만 읽으면 좋겠지만, 본래 배우지 못한 자들은 별로 좋지 못한 천박한 글월에 끌리는 법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옆에 앉아 있던 형부 부장 윤영기가 한숨을 쉬었다. 어느 정도는 동감하는 바다만, 정말 건전한 것만 보고 살아야 한다면 그 세상 재미없어서 어떻게 사냐. 가끔 한눈도 팔고 하며 그렇게 숨도 쉬고 사는 거지.
※작가의 말:
* 위말강 : 컬럼비아강
* 위타구산 : 샤스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