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10
3부 128화
– 9 –
전임 부왕 겔베 백작의 정식 후임자인 호세 사르미엔토 드발라드레스(Jose Sarmiento de Valladares)는 사실 진짜 ‘목테수마 백작’은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목테수마 여백작의 부군’으로, 자기가 백작인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의 아내인 3대 목테수마 여백작 마리아 헤로니마(Maria Jeronima Moctezuma y Jofre de Loaiza)는 아스텍의 마지막 군주였던 목테수마 2세의 진짜 후예다. 내가 미주에 오면서 멕시코시티에 들렀을 때는 스페인에서 체류하는 중이라, 만날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만나더라도 별로 신통할 일도 없었지….’
멕시코에서 아스텍 독립운동 같은 사건이 일어날 것도 아니고, 그 가문이 뭔가 실질적인 힘을 쥐었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만나봐야 큰 의미가 없다. 하다못해 미녀라서 눈이 즐거울 일도 없다. 여백작은 이미 60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니까 말이지.
“여기 있습니다, 전하.”
“어디, 읽어볼까.”
손에 받아든 새 부왕의 친서는 말끔한 스페인어로 적혀 있었다. 천천히 읽어보니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작년에 식량을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바로 돕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새 부왕의 편지에 따르면, 유럽에서 계속된 전쟁의 영향으로 누에바 에스파냐에서도 별로 사정이 좋지 않다고 했다. 프랑스 사략선들이 카리브해 일대를 습격한 데다, 멕시코에서도 계속 흉년이 들어 작황이 좋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럼 작년에 그렇게 답을 보냈어야지. 개종을 운운하며 패악질을 잔뜩 부려 놓은 주제에, 인제 와서 변명이랍시고 하면 우리가 곱게 들을 것 같은가.”
멕시코 쪽 사정을 모르고 우리가 무리한 부탁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쪽과 직접 경계를 맞대지 않았으니 소식이 늦어도 별수 없다. 우리 남쪽에는 올로내가 있고 멕시코 북쪽에는 푸에블로를 비롯한 인디언 부족들이 있다. 국경 양쪽에 모두 완충지대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우리와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면 멕시코 쪽 상황에 관심이 덜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파치 토벌이니 본국의 대기근이니 하는 중대사가 이어졌고 보니, 더더욱 멕시코 내부 상황에는 별로 관심이 안 생겼다.
“작년에 임시 부왕이 그런 답을 보냈던 건, 아무래도 그 본분이 승려이다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본래가 승려이니만큼, 자기 종파를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조정에 섭섭한 감정을 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부 부장 안형운은 내가 넘겨준 부왕의 친서를 읽고 임시 부왕이었던 미초아칸 주교에게 약간 동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 자신은 천주교도가 아니면서도 말이다.
“승려라 해도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일반 동네 사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교라는 직책은 관찰사와 비슷한 급의 교회 벼슬입니다. 그 정도 고위 벼슬아치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함부로 떠벌려서는 안 된다는 점 정도는 알아야지요.”
도리어 천주교도인 호부 부장 송영진이 미초아칸 주교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멕시코에서 예수회가 딱히 박해를 받고 있지도 않은데, 그렇게까지 그 주교를 싫어할 필요가 있나 싶긴 하지만 말이다. 안형운이 주교의 역성을 드는 모습이 뭔가 우스웠다.
“송 부장, 그렇게까지 나쁘게 보지 마시오. 그 주교가 비록 전하의 서한을 받고도 방자한 태도를 보이긴 하였으나, 그 외에 딱히 우리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잖소. 외수사가 필리핀에 배를 보내서 쌀을 수입하는 길도 막지 않았고.”
분명히 미초아칸 주교는 멕시코에서 미주에 식량을 보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형운이 말했듯이, 우리 본국과 필리핀 사이의 교역은 전혀 막지 않았다. 내 걱정은 기우였다.
“그야 임시 부왕이라서 필리핀까지 제대로 챙길 능력이 없어서였겠지요. 그자에게 제대로 업무를 수행할 여유와 권한이 있었다면, 분명 미곡 교역을 금지하고도 남았을 거요. 그러면 우리 발목을 거는 거나 마찬가지였겠지요.”
송영진이 날카롭게 지적했듯, 필리핀은 우리 조선에 상당한 양의 식량을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식량으로만 얽힌 땅이 아니다.
작년 한 해 동안 필리핀에서 본국에 보낸 쌀은 적어도 80만 석은 될 거다. 재작년에는 단 10만 석밖에 안 들어갔지만, 작년에는 외수사가 작정하고 쌀을 사들였다. 덤으로 좀 복잡한 사연이 있기는 해도, 우리 백성들 일부도 필리핀으로 이주한 상황이다.
필리핀은 스페인령이다. 그리고 스페인은 조선인들에게 필리핀 이주를 허용한 적이 없다. 필리핀 내에서 조선인 인구가 늘어나면 원주민에 비해 극히 소수인 자신들의 지배력이 더욱 약해질 것이고, 자국민이 다수라는 핑계로 조선이 필리핀을 빼앗으려들 위험성이 있어서다.
형황 역시 타국 영토에 우리 백성들이 밀거주함으로 인해 외교적인 분쟁이 생기기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리핀 이민 같은 건 허락한 적도 없다. 하긴 실제 역사에서 조선도 개인이 함부로 국경을 넘는 건 허용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나 틈은 있는 법이고, 이쪽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조선에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가 만주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듯이, 이쪽 세계에서는 남쪽 바다를 건너 필리핀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연히 본국에서 직접 필리핀에 가는 건 아니다. 대남으로 이주한 이들 중, 대남에서보다 필리핀에서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자들이 남몰래 빠져나가서 필리핀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대남도에 이주하는 난민들이 받는 정착 조건도 미주 이주 때와 비슷하다. 다만 이쪽에선 지주들에게 선대금을 받고 머슴으로 보내는 게 아니다. 호부에서 직영하는 사탕수수나 차, 커피 재배 농장에서 5년 동안 의무적으로 일해야 한다. 그래야 토지를 받는다.
이런 관유농장은 호부 수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농장들을 처음 설치할 때는 중원에서 유입되는 묘노나 왜노, 반항하는 대남도 토인들을 부렸었다. 하지만 고된 노동에 지친 노비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면서, 그 자리에 대신 이주민들을 집어넣게 되었다.
물론 우리 백성인 이주민들한테 노비 부릴 때처럼 가혹하게 채찍질하면서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의무적인 5년 기한부 노동을 마친 뒤에도 사망률은 1할이 채 되지 않는다.
그래도 미주보다는 높은 사망률이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환경 차이다. 대남도에는 이미 독성이 강한 열대성 말라리아가 만연해 있다. 동의보감에 따라서 거주지 주변에서 웅덩이를 말리고 모기장을 철저하게 치며 방제한다지만, 그 정도로는 완전히 막아낼 수가 없다.
이런 강제노동을 거부하는 자들이 당연히 다수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자들은 산속으로 도망쳐 아직 복속하지 않은 생야인들의 부락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가 필리핀으로 가기도 했다. 강제노동도, 토지를 받은 이후의 세금도 모두 피하기 위해서다.
조선 수군은 대남도 이북 바다만 확실하게 챙긴다. 남중국해는 해적과 밀수꾼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 그러니만큼 대남도를 떠나려는 백성들이 필리핀으로 건너가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밀수선을 구해 타기만 하면 엿새 안에 필리핀에 가서 닿는다.
“정가 놈이 그 사업도 한다고 하였지?”
“그렇습니다, 전하.”
이런 월경자들이 이번 기근부터 나타난 건 당연히 아니다. 한참 전, 최소한 경신대기근 때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정지룡도 그때부터 밀출국을 주선했다. 건너간 백성들은 필리핀 토인들과 싸워서 땅을 차지하고 그 자리에 마을을 세워 농사를 짓는다.
당연히 뱃삯은 공짜가 아니다. 정지룡의 해적단을 포함한 밀수선들은 배에 태워 준 값을 철저하게 받아낸다. 승선하기 전에 재물로 받거나, 필리핀에 정착한 뒤에 농작물로 받는다. 아니면 아예 사람으로, 즉 승선한 난민 중 일부를 데려가기도 한다. 특히 젊은 여자들.
그렇게 넘어가 필리핀에 정착한 우리 백성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조정에서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분명히 남의 땅인 필리핀에 가서 밀입국자 숫자를 조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마닐라에 있는 스페인 총독부 역시 조선인 밀입국자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조선인들은 주로 루손섬 북부에서 마을을 이루어 거주하는데, 스페인인들은 반대편에 있는 수도 마닐라에 몰려 있다. 파악이 허술할 수밖에 없다.
부황 때부터 시작된 일이라곤 해도 조정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아예 논하지 않는 이유는 모르겠다. 기근 와중에 공연히 스페인 당국과 말썽을 일으켜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어쩌면 골치 아픈 존재들이라고 없는 셈 치고 묻어버릴 생각이라서일지도.
하지만 이 불법체류자들이 현지에서 꽤 번성하는 건 분명하다. 공식적으로는 필리핀에서 수입한 것으로 되어있는 양곡 80만 석 중에, 실제로는 이 불법체류자들에게서 사들인 쌀이 30만 석이라는 소리를 내달상단을 통해 들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이 문제는 일단 미뤄두고라도, 필리핀은 우리 본국과 여러모로 얽혀 있다. 그리고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에 임시로 취임했던 미초아칸 주교 돈 후안은 필리핀과 우리 본국 관계에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단 서반아 측에서 작년 일에 유감을 표해 왔으니, 우리도 우호적인 답을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양곡은 사들이지 못한다 해도, 다른 교역은 계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옛날부터 이어온 교류도 끊지 않고 이어가야 하고 말입니다.”
안형운은 대다수 사대부와 같은 관념을 품고 있었다. 스페인은 과거 우리 조선에 호의를 많이 베푼 나라이니, 마땅히 그 은혜를 기억하여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인식이다.
“물론 서반아가 우리 대한의 강역을 침노한다거나 하면 마땅히 맞아 싸워야지요. 하지만 저들이 먼저 무도한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먼저 지켜야 할 도리를 잊고 무지한 야만인처럼 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사과했으니 일단은 된 겁니다.”
“소관도 신서반아와의 교류를 아예 끊자는 건 아닙니다.”
송영진도 마지 못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신서반아에 어물과 모피, 인삼, 봉밀(蜂蜜), 목재 등을 팔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가 은을 충분히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은을 얻으려면 신서반아와 계속 교역해야 합니다. 새 부왕이 먼저 사과 의사를 비쳤으니, 관대한 답신을 보내시는 건 괜찮습니다.”
후송이나 동남아에서 본국에 필요한 양곡을 사들이려면 은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 땅에서는 태호은광 외에 유망한 은광을 더 찾아내지 못했다. 괜히 누에바 에스파냐 당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켜 교역이 끊어지면 은 공급도 끊어진다.
내 휘하 부장들은 일단 스페인 측이 보낸 유감 표시를 받아들이자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 주교 놈이 보인 모욕적인 태도는 언젠가 갚아줄 날이 올 테니 그때 가서 보자고 말이다.
– 10 –
봄이 오자 본국에서 첫 번째 배가 왔다. 1천 톤급 배 3척이 난민 4천 명을 싣고 바다를 건너 무사히 도착했다.
“세 척을 합쳐 3천 톤인데 타고 온 사람 숫자는 고작 4천 명이라니, 예전에 동현이 싣고 온 인원과 비교하면 절반밖에 안 되지 않나.”
동현은 1천 2백 톤인데 3천 명을 싣고 왔다. 톤당 2.5명을 태운 셈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톤당 1.33명, 정말 거의 절반이다.
안용복이 차분한 태도로 설명했다. 천 톤짜리 배에다 3천 명을 실으면, 그건 대서양에서 흑인 노예를 수송하는 노예선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말이다. 노예선에 관해서는 장 바르에게 들었다고 했다.
“본국에서 배에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작년에 소관이 건너올 때는 사람을 마치 짐짝처럼 선창에 채웠습니다. 사실, 편하게 바다를 건너려면 천 톤짜리 배에 5백 명쯤 태우면 적당하고 지금 저것도 많은 편입니다. 저희도 이번에 가면 저 정도 태우겠지만요.”
동현은 지금 지선만 안에서 정비 중이다. 어느덧 이 녀석도 건조한지 정확히 10년이나 된 상태라, 대대적인 정비가 필요하다. 요 몇 년 동안은 거의 쉬지도 못하고 굴렀으니, 더더욱 손을 봐야 한다. 알렉상드르 같은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곧 작업을 끝낼 수 있으니, 마치는 대로 바로 본국으로 떠나겠습니다.”
“도중에 하와이에 보급 임무도 좀 부탁하겠네.”
“예, 전하.”
하와이에서는 마우이가 수많은 마누라와 자식들을 거느린 채 국왕으로서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와이아케아에 있는 우리 군사들은 아예 하와이에 눌러앉을 모양이고, 오아후에 있는 본국 수군에 대한 보급도 우리가 맡게 되었다.
지금 수군에 있는 여유 군선은 모조리 남만과 미주를 오가면서 난민과 양곡을 나르느라고 바쁘다. 하와이 주둔군 보급 같은 태평한 임무에 따로 배를 할애할 형편이 아니다. 그래서 미주에서 본국에 가는 배가 잠깐씩 들러 필요한 물자를 보급하고 있다.
“이번에 도착한 4천 명 모두 중미주로 보내 정착하게 하겠습니다.”
“난민들을 맞아 정착시킬 준비는 다 되었겠지?”
“예, 전하.”
오리건 쪽 지리를 정확하게 몰라서 내가 준비한 정착지가 현대의 어느 도시에 해당하는지 잘 모르겠다. 강을 따라 내륙으로 좀 들어가다가 나오는 평지인데.
아직은 더 내륙으로 들어가지는 않기로 했다. 정착에 필요한 식량을 북미주에서 실어와야 하는 만큼, 첫 정착지는 강변에 만들 필요가 있다. 그편이 식량을 비롯한 물자 보급에 훨씬 편리하다. 인원과 물자가 갖춰지면 내륙으로 확장하면 된다.
“동현이 본국에 가는 편에 조정에 글을 올려, 중미주를 동변 관할로 하도록 청하여 이를 조정에서 논의케 한다. 받아들여지면 좋겠구나.”
내 말을 들은 김종건이 우려 섞인 답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하오나 전하, 예로부터 종친에게 군권을 주지 않은 것이 우리 대한의 법도였습니다. 혹시 본국에서 중미주도 총관부 예하에 둔다고 나오더라도, 너무 크게 실망하지는 마시옵소서.”
“물론이다. 내가 어찌 그걸 모르겠느냐.”
형황과 조정이 풍기는 분위기를 보면, 내게 실권을 주지 않으려고 작정한 듯하던 예전의 기색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월권 여부에는 그만큼 더 민감해졌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황족이다. 그렇다면 안 준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대상이 있으면 최대한 안 받고 안 해야 생이 무탈하다. 이번에 저지른 월권도 기근 때문이라고 해서 성시균을 통해 꾸지람만 좀 받고 말았지만, 앞으로는 피해야겠지.
“전하, 전하께 온 우편이옵니다. 역에서 가져왔습니다.”
“내 것은 이미 따로 받지 않았느냐?”
나한테 오는 우편물이라야 조정에서 나오는 공식 서한이거나 태후가 보내는 편지뿐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일반우편물과 별도로 구분했다가 역을 거치지 않고 내게 바로 온다.
“보낸 이가 일반 백성이라…혼선이 있었던 모양이옵니다. 송구하옵니다.”
“그러하냐.”
두툼한 봉투를 보니 겉에 도성에 사는 대송인 박 모라고 적혀 있다. 내가 대송인한테 뭘 받을 게…아, 그 건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