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15
3부 133화
사실 지금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다. 평원 인디언들 사이에 퍼진 두창은 정황상 달아난 우리 백성들이 퍼뜨린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 부분에 관한 정호찬의 보고나, ‘조선인들이 지나가고서 병이 왔다’라는 잠들지 않는 독수리의 증언으로 미루어봐도 분명했다.
우리 잘못을 타인에게 덮어씌우는 내 죄를 하늘이 용서하기만을 빌…기는 개뿔! 하늘에서 날 내려다볼 천녀 따위한테 용서를 빌 생각은 절대 없다. 그러고 보니 천녀가 자기 윗선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윗선이 있다는 뉘앙스는 풍기긴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한 적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천녀의 윗선이 있다면 그건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하느님? 천제? 상제? 그 이름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으려나? 어쩌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지도?
어쨌든 있거나 말거나다. 하늘이 보건 말건 내 양심에만 충실하겠다고 결심한 지도 이미 몇십 년이다. 그리고 이 천연두 유행 건을 백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데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 백인들이 이 인디언들에게 천연두를 옮길 건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이미 중남미는 스페인발 천연두가 몽땅 휩쓸었다. 북미에서도 미시시피가 무인지경이 된 게 스페인발 천연두 탓이다.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세균전까지 벌인다. 아직 안 터졌어도 곧 터진다. 그런데 내가 누명을 좀 씌운다고 해서 백인들이 억울해할 거 있나?
내가 지금 하려는 건 그 천연두 대유행을 사전에 막는 일이다. 분명히 숭고하고 인도적인 의도로 벌이는 일이니만큼, 그 과정에 아주 약간의 거짓이 들어간다고 해도 그 정도는 딱히 내 좋은 의도를 먹칠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우리 임금께서는 그 흉한 병, 두창이라 하는 병을 막아낼 수 있는 묘약을 가지고 계신다오. 아직 걸리지 않은 자의 몸에 넣으면 병을 막을 수 있고, 이미 발병한 자의 몸에 넣으면 증세를 완화할 수 있는 실로 신비한 영약이오.”
인디언들이 아예 천연두를 모른다면 종두도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우리 땅에서 도망간 도망자들이 이미 천연두를 옮긴 탓에 저들은 천연두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종두를 전해서 천연두를 막아주는 우리 힘은 저들에게 엄청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여기, 우리 폐하께 무릎을 꿇은 다섯 부족 사람들은 모두 그 약을 맞아 그 병을 피할 수 있게 되었소.”
김대송과 김주마가 적극적으로 인정했음은 물론이다. 여기에 상희가 세운 의학교에 재학 중인 미억족, 올로내족 의학생 8명 ? 원래 9명인데 1명은 자퇴했다 ? 도 불러왔다. 이들은 이제 의학교 2년 차로, 한참 이론수업과 실습을 병행하면서 조선 의술을 배우고 있다.
“이들은 그대들과 같은 미주 토인이지만, 우리 임금께 충성을 맹세한 덕분으로 그 역병을 막을 수 있는 비법 외에도 온갖 치료술을 배우고 있소. 그대들도 우리 임금, 서쪽의 위대한 아버지께 엎드려 절한다면 배울 수 있소. 물론 계속 내려지는 선물은 덤이오.”
완전히 병 주고 약 주는 셈이지만,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이미 천연두 때문에 고생해본 경험이 있거나 지금 곤란을 겪고 있는 부락에서 온 몇몇 인디언들이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도움을 청했다. 확실히 후진국에 영향력을 확대할 때는 의술이 가장 치트키인 듯하다.
“좋소. 그대들을 돌려보내는 길에 호송을 맡을 군사들과 더불어서 우리 의원을 몇 사람쯤 보내 그대들에게 종두를 놓아주게 하겠소. 그럼, 이제 신나게 먹고 마시면서 우리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빌도록 합시다!”
특별히 준비하게 한 술과 고기가 줄줄이 날라져 들어왔다. 아무리 기근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지만, 이런 자리에서 쩨쩨하게 굴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손님을 불러 놓고 초라한 상을 내놓는다면, 그건 위대한 아버지의 위신 문제다.
예상했던 바지만, 인디언 중 상당수가 이미 술맛을 알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모피값을 대신해서 주는 술 말고, 우리가 파는 술도 교역망을 따라 이미 상당히 퍼진 상태인 탓이다.
내 지시에 따라 잔치 자리에는 술과 고기가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자리에 모인 백 명이 넘는 인디언들은 밤이 새도록 신나게 주연을 즐겼다.
– 16 –
인디언들은 20일 가까이 지선성에서 머물다가 의원 세 사람과 호위병 2백 기를 대동하고 떠났다. 이들은 말 3백 필에 실어야 할 만큼 막대한 재물을 받아 돌아간 터라, 도중에 혹시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안전을 보장하려면 호위가 필요했다.
인디언들에게 종두를 놓으라고 보낼 의원은 총관부 의원 중에 뽑았다. 민간 의원이었다면 절대 안 갔겠지만, 이들은 일단 관원이니만큼 관의 명에 따를 의무가 있었다. 회견 자리에 나오기는 했어도 회견이 진행되는 내내 침묵했던 이종덕도 이런 일은 확실히 도와주었다.
“객사도 내주었으니 감사히 여겨야지. 돈은 내가 냈지만.”
이 의원들은 잘 말린 두묘(痘苗) 딱지를 한 보따리 메고 갔다. 말린 두묘는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떨어져서 접종해도 면역이 생기지 않을 위험이 있다. 하지만, 우두 걸린 소를 끌고 그 험한 길을 돌아다니기도 어려우니 이게 최선이었다.
“약이 채취한 지 오래되어 효험이 약해졌으니, 혹시 듣지 않을 수도 있다고 접종 전에 꼭 말해두어야 할 텐데.”
“전하께서 몇 번이나 강조하셨으니 잊지 않고 그리할 것입니다. 그만 염려 놓으시지요.”
“알겠소.”
종두 접종 파견은 일회성인 시혜 행사가 아니다.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의료진을 내보내서 인디언들이 우리 덕분에 천연두를 피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저들은 자연스럽게 친조선이 되고, 이미 친프랑스나 친스페인을 택한 부족들도 점차 친조선으로 성향이 바뀌게 될 거다.
“훗날의 일이오, 훗날의 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의원을 데려가는 이 토인들이 정말 임금에게 충성을 서약한 건 아니다. 장조 시절에 내게 찾아왔던 오금족 대표들과는 다르다.
오금족 대표들은 말 그대로 결정권을 쥔 대표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를 찾아온 평원 인디언 대표들에게는 부족의 방침을 결정할 결정권이 없었다. 서쪽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전하는 역할만 맡았을 뿐이다.
“아마 저들이 방침을 정하려면 2년은 걸릴 것이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부족회의를 소집하고, 한참 동안 논의한 뒤에야 부족 전체의 의견을 모아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게 될 터이니까요.”
“그래도 기다려야지 별수 있겠는가? 아직은 저들이 우리를 먼저 친 적도 없고, 우리한테 군사가 넉넉하지도 않으니 장조께서 야인 토벌하셨듯 할 수도 없는데.”
생각보다 유럽세의 진출이 빨랐다. 처음 생각한 것처럼 느긋하게 굴다가는 원미주 전체가 우리 손을 떠난다. 그 지경이 되면 전쟁을 벌이는 방법 말고는 유럽인들을 미국 중부에서 내몰 수단이 없다. 그건 되도록 피하고 싶다.
오금족에게 했었듯이, 끌어들일 수 있는 부족들한테는 무슨 미끼를 던져서든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겠다. 그래야 우리가 들이는 수고도 희생도 더 줄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내가 아무 것도 안 해서 다행일세. 참으로 다행이야.”
그동안 원미주에 우리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할 수 있는데도 내가 하지 않은 일은 전혀 없었다. 원미주 상황을 정확하게 알기나 하고 나서야 손을 뻗든지 말든지 할 텐데, 애초에 그 단계까지도 가지 못했던 게 우리 상태였으니 말이다.
원미주를 먹고 싶었다고 해도 어차피 그동안 무슨 진전을 볼 수는 없었다. 아파치에 기근 등등 앞길을 막는 장애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탐미군을 좀 더 일찍 보내는 정도야 할 수 있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민단을 보내거나 할 수도 없었다. 여건이 안 됐잖나.
탐미군이 귀환하면서 비로소 원미주 지역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지금도 미주 총관부가 통할하는 거대 미주 식민지 따위는 생겨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커다란 덩치가 단합해서 본국에 반기를 들면 그걸 대체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하지만 미주를 여러 조각으로 분할하고, 서로가 경쟁하게 만든다면 이놈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반기를 들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든다. 일부 지방이 반기를 들려 해도 다른 지방에서는 반발이 일어나 협력이 안 되겠지. 그새 진압군이 오면 되고.
그런 전제를 둔다면 원미주 지역에 대한 태도를 다르게 취해도 된다. 꼭 독립된 인디언 연방이 아니라고 해도, 미주총관부가 통제하는 대신에 인디언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자치령 정도만 되더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원미주 일대를 당장 우리 영토로 선언한다거나 할 수는 없겠지.”
“예, 전하. 아마 불랑국 정부가 이미 영토라고 선포한 후일 것입니다.”
탐미군이 여행한 루트 대부분은 프랑스인들이 이미 다녀간 뒤였다. 따라서 미국 중부지역 대부분이 프랑스가 주장하는 루이지애나에 속한 땅일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로서는 프랑스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지역을 우리 땅이라고 선포해서 충돌을 초래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 곧 시작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만 해도 프랑스 편에 서서 이득을 얻어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 땅 본래 주인인 인디언들의 권리를 강조하는 거다. 분명 땅 주인은 예로부터 살아온 이들인데 외지인들이 멋대로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건 적반하장이라고 말이다.
고로 인디언들이 나서서 프랑스의 영토권 선언은 무효라고 선언하게 부추긴다. 그리고는 이들이 독립국임을 승인하고, 교섭하여 신하로 받아들이거나 이웃의 도리로서 나라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다. 프랑스와의 외교적인 뒤처리가 좀 골치가 아프긴 하겠지.
다만 이건 무척 장기적인 계획이다. 인디언들에게 프랑스의 행동이 부당하다는 인식부터 안겨줘야 하고, 프랑스군을 몰아낼 무기도 줘야 한다. 하루 이틀에 될 일이 아니다.
“소관이 지나간 지역에 사는 토인은 기껏해야 30만을 절대 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 적은 숫자가 과연 불랑국에 맞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서장관, 원미주에 있는 불랑국인 숫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적지 않은가.”
사람이 넘쳐나고 산업화도 이루어진 19세기 미국이 상대라면 몰라도, 지금의 유럽인들을 상대로 싸운다면 인디언들이 이길 수도 있다. 무기와 탄약만 누가 대준다면 말이다.
“차라리 우리가 싸워서 불랑국인들을 몰아내는 쪽이 결과가 확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병부, 그건 우리를 잘 대접해준 불랑국왕에게 너무 미안한 일일세. 직접 쳐서 뺏는 것과 자기 발밑으로 굴러온 호박을 받아주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니.”
외교적인 승인이 전부가 아니다. 인디언국이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도록 조선인 이민을 보내서 농업, 공업 기반을 구축하도록 돕는다. 물론 그렇게 형성되는 경제권은 우리가 쥔다.
문제는 본국 조정에 이제까지 내가 해온 말을 바꾸는 건데…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없다고 해도, 일부 표현이라도 달라지면 트집을 잡을 인간들이 한둘이 아닐 거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나.
“일단은 기근을 해결하는 문제가 더 급하니, 본국에서 겨우 이 정도 일을 가지고 전하께 꼬투리를 잡아 괴롭게 굴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군. 감리사의 말이 옳소. 올해 본국에서는 날씨가 을해년과 병자년보다는 낫다고 하나, 그래도 가뭄이라 힘든 건 매한가지라 하였으니.”
을해년(1695)부터 계속된 기근은 3년째 가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외국에서 오는 식량 공급량이 늘어나고 취약지구로 식량을 운반하는 공급망도 계속 확충되면서 아사자는 격감하고 이주자는 늘었다. 하지만 본국에서 기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건 분명하다.
“미주에서 거둘 올해 수확은 천만 석은 되리라 하였지. 적어도 절반 이상은 본국에 가야 한다. 식량을 모아 본국에 보내는 일에 혹시 소홀함이 없도록 그대들 모두 최선을 다하라.”
내가 강조하자 내 측근인 동변관리사 소속 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어느새 미주에도 가을이 왔다. 본국에서 쉬지 않고 오는 배들은 계속 부두에 배를 대고는 이주민들을 5백 명, 1천 명씩 쏟아냈다. 미주 총관부와 남북 지사부 관리들은 이들을 모아 정착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중미주를 맡은 동변관리사도 마찬가지였다.
8만 명에 달하는 이민을 그렇게 처리하느라 관원들 전부 진이 빠질 지경인데 형황에게서 내 앞으로 서한이 왔다. 내릴 지시가 있으면 늘 동변관리사 앞으로만 보내던 양반한테 무슨 바람이 불었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어쨌든 칙서는 칙서이니만큼 겉으로는 별 티를 내지 않고, 예를 갖춰 칙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칙사가 입을 열어 칙서 내용을 읊는 순간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날벼락이 눈앞에 떨어졌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호, 혹시 본국에 엄청난 흉사가 벌어지기라도 했는가?”
너도 모르게 목소리가 부들거렸다. 내 옆에 늘어서서 함께 칙서 내용을 듣던 내 수하들도 경악했다. 하지만 칙사는 이 일이 일상이라서인지는 몰라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감정의 동요라곤 없이 차분하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전하, 소인은 그저 황명을 받들 뿐이옵니다. 들은 대로 그대로 따르소서.”
처지가 처지니 칙명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몸을 곧추세워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도로 무릎을 꿇었다.
“아, 알겠네….”
내가 왜 이렇게 당황하느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칙사가 방금 낭독한 칙서에는 단 한 줄,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성친왕 이현을 동변관리사 직에서 해임한다. 수행하던 모든 사무를 감리사 성시균에게 인계한 뒤에 즉시 환국하라.』
뭐지? 뭐지? 해임에 귀국이라고? 형황이 내 지나친 월권을 마침내 처벌하기로 했나? 예왕 이 망할 자식이 나를 모함하는 데 드디어 성공했나? 아니면, 태후가 나를 보고 싶다고 조른 끝에 형황이 날 귀국시켜 백수로 만들어주기로 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전혀 모르겠다. 만약에 1번이나 2번이라면 부르는 대로 본국으로 돌아가서 목이 잘리는 대신 짐을 챙겨 멕시코로 도망이라도 쳐야 할 텐데, 그렇게 행동하는 게 맞을까? 과연 내가 처한 상황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