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19
3부 1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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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황이 침상에 누운 중전의 손을 쓰다듬었다. 중궁전에 중전을 위문하러 와있던 손님 중 딸인 영선공주만 태황의 옆에 앉아서 함께 모후를 위로했다. 시누이인 두 장공주와 동서인 예왕비, 후궁인 귀비 박씨, 진빈 홍씨, 미인 백씨 등은 상감이 오자 모두 자리를 비켰다.
“기운을 차리시오, 중전. 이만 일어나서 국모로서 백성들을 돌보아야 하지 않소.”
“예, 폐하….”
공주는 부황은 차가운 사람이라고 늘 생각했다. 외동딸인 자신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고, 모후에게 대하는 태도도 무뚝뚝했다. 관심을 쏟는 사람은 자기보다 한 살 더 많은 오라비인 태자뿐이었다. 두 살 아래 동생이 병으로 죽고 나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하지만 거의 두 달 동안 모후를 간병하면서 보니 부황이 정말 목석과 같은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궁에서 자라던 어릴 때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 자신이 자라서 혼인도 하고 자식도 낳고 나니 보였다. 부황 나름의 방식으로 모후에게 표하는 애정도 엿볼 수 있었다.
이윽고 위로를 마친 태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하느라 따라나선 공주가 부황을 따라 걷고 있는데 부황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동궁에는 좀 들러보았느냐.”
멈칫하던 공주가 역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아바마마.”
지금 동궁에는 황태자비 허씨 혼자뿐이다. 간택을 거쳐 혼인한 지 7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동안 자식을 얻지 못한 탓이다.
“태자비는 어찌 지내고 있더냐.”
“김 선시와 홍 숙녀를 데리고, 처소에 둔 십자고상 앞에서 온종일 기도를 드리는 데 정을 쏟고 있습니다. ‘태자께서 비록 몸은 살지 못하였으나, 혼은 꼭 천당에 가셔야 한다’면서요.”
태자비가 천주교에 귀의한 건 올해 초였다. 그동안 황실 여인 중에 불교 신자는 많았으나 정식으로 천주교를 믿게 된 사람은 태자비가 처음이었다. 태황은 이를 알고 있었으나, 굳이 믿지 못하게 할 일도 아니기에 놓아두었다.
선시(?侍)와 숙녀(淑女)는 태자가 거느리는 후궁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들 두 명 역시 태자비와 같은 처지로, 자식 하나 없이 평생 개가도 하지 못하고 늙어갈 상황이 되었다.
“역시 기도 같은 건 쓸데없는 짓이야. 의원 한 사람이 승려 열보다 낫다.”
부황이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알 수 있었기에, 공주는 굳이 맞서지 않았다. 부드럽게,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아바마마, 승려를 찾고 기도하는 이를 너무 어리석게 보지만은 말아 주소서. 죽는 사람을 살리지는 못할지 몰라도. 남은 사람의 마음에는 위안을 주는 일이니까요.”
태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공주가 물었다.
“아바마마, 이제 오라버니의 장례도 끝났는데 혹시 동궁비 마마를 내보내실 것인지요?”
“동궁에 새 주인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왜 내보낸단 말이냐. 한동안 그대로 지내게 해줄 것이고, 동궁에 들어갈 사람이 장차 정해지면 그때 가서 새로이 거처를 마련하여 내보내도 늦지 않다. 그동안 네가 자주 들러보고 달래 주어라.”
역시 부황은 마음속에서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공주는 부황을 존숭하는 마음을 담아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예, 아바마마.”
공주를 만나 과부가 된 맏며느리에 관한 대화를 나눈 태황은 쓸쓸히 창덕궁 대조전으로 향했다. 늘 꼿꼿이 서 있던 등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굽었고, 얼굴에는 지친 빛이 완연했다. 눈가에는 눈그늘이 검게 드리웠다.
“명에 따라 대령하였습니다.”
두 신하가 대조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중추원 판사 강기석이고 다른 하나는 신임 금위사장 김창균이다. 작년 가을에 박중현이 금위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그 자리에 새로 올라온 사람으로, 의금부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수사관 출신이다.
태황이 박중현을 해임한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한 사람을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 앉혀두었으니 조직이 타성에 젖었을 것이고, 이제 누적된 문제점들을 찾아 청소할 시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중현이 충직하고 유능한 금위사장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같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관성 때문에 빠트리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태황은 박중현을 호성후에 봉하여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하고, 외부 출신인 김창균으로 하여금 금위사를 뒤엎게 했다.
15년 만에 금위사장을 바꾼 효과는 확실했다. 그동안 알고서, 또는 모르고서 넘어가던 꽤 많은 문제점이 줄줄이 쏟아져나왔다. 병석에 누운 태자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면서도 태황은 그 모든 사안을 일일이 점검했다. 그렇게 금위사를 쇄신했다.
“말해 보라.”
안에 들어온 태황이 푹신한 보료 위에 반쯤 누웠다. 지시를 받은 김창균이 가져온 문서를 펼쳤다. 그 옆에 앉은 강기석은 태황을 보면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태후께서는 폐하께서 다시 후사를 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새로이 태자를 세워 장차 보위를 잇게 하실 심산이십니다.”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태황이 지친 목소리로 받았다.
“비록 모후께서 원하시는 일이라 하나, 짐은 후궁을 더 들일 생각이 없다. 생과부가 이미 셋이나 생겼는데, 하나 더 늘려서 뭐에 쓰라는 말이냐.”
쌓이는 국정으로 인한 피로 때문에, 중전이나 다른 후궁들과의 부부관계도 이제는 끊어진 지 오래다. 여색을 즐기지 않은 지도 오래고, 이제는 미녀를 보아도 별로 동침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모후께서 말씀하시기도 전에 내가 말을 꺼낼 수는 없겠지. 하지만 혹시 모후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정도를 넘어 성친왕 혼사 때처럼 내 배필을 찾겠다고 여기저기 물색하시는 기미가 보이거든 바로 보고하라. 내가 직접 그만두시라고 청할 테니.”
“예, 폐하.”
김창균이 다음 문서를 들었다. 그 사이 강기석이 조심스레 한마디 꺼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태자마마처럼 영특하신 황자를 다시 얻으실 수도 있으니 그리 예단하심은….”
가장 아끼는 총신의 진언이었지만 태황은 고개를 저었다. 명백한 거부 표시였다.
“짐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후궁을 들여 황자를 얻고, 그 아이가 옥좌에 오를 만한 재주가 있더라도 짐은 그 아이가 다 크기도 전에 명을 달리하리라. 그러한 어린아이가 과연 대한의 2400만 백성을 짊어질 수 있겠는가?”
어린 임금은 얕보이기 쉽다. 유력한 종친이 옥좌를 넘볼 수 있고, 권신이 득세하여 어린 임금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도 있다. 대한을 만만하게 보고 외적이 침노하기도 더 쉽다.
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권위만 있을 뿐 조정 내에 확실한 세력이 없는 태후가 수렴청정하면 필연적으로 외척이 발호한다. 태후에게는 자기 혈육만큼 든든하게 기댈 수 있는 지지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태후의 본가인 덕수 이씨나 중전의 본가인 양씨 집안이 외척이라는 지위를 발판으로 방자하게 굴 집안은 아니다. 아니, 방자하게 굴고 싶어도 그럴 재간이 없는 집안이다. 어찌 감히 충무대왕의 집안이 세도가가 되겠으며, 기반도 없는 양씨가 조정을 휘어잡겠는가.
“어마마마께서는 자식을 잃은 아들이 안쓰러워서 어떻게든 내 피를 이은 후손을 남기고자 하시는 거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로마가 가장 번성하던 시절은 황통을 혈연으로 잇지 않고 양자를 들여서 이어가던 백여 년이 아니던가.”
태황도 로마사라면 꽤 읽었다. 정철 시절에 사전청에서 번역한 로마사 서적은 사대부라면 다 읽는 것이고, 웬만한 사건은 바로 언급할 수 있을 정도다. 송구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두 신하 앞에서 태황의 독백이 이어졌다.
“지금의 사정은 그렇지 않으나, 본래 보위란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이를 찾아 물려주면 족한 자리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넘길 때 그리하였고,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또한 그리하였다. 그저 혈통에 따라 보위를 넘기는 것이 어찌 바람직하겠느냐.”
태황이 죽은 태자를 아꼈던 건 그저 맏아들이라서가 아니었다. 태자에게 군주로서 충분한 자질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태자가 태황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다면, 태종의 예에 따라 폐태자를 선언하고 양자를 들이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그러시다면 다음 태자는 어찌하시렵니까. 역시 성친왕 전하 소생 왕자 중 하나입니까?”
“왜 성친왕의 아들이 태자가 되리라 생각하는가?”
“폐하께서 성친왕을 소환하셨으니, 당연히 성친왕 슬하의 두 아들 중 하나를 고르시리라 주변에서 짐작하지 않겠습니까.”
태황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매서운 눈길이 번쩍이자 두 신하가 일제히 바닥에 두 손을 짚고 엎드렸다.
“그대는 그게 마땅찮은 모양이구나. 허락할 테니 의견을 말해 보라.”
잠시 생각을 정리한 강기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 장조께서 명종대왕 밑으로 입적되실 때 보령은 13세셨습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만 제대로 사리를 판단하고 군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을 품었는지를 주변에서 판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4세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원자인 제안대군을 제치고 즉위했는데, 그때 성종의 나이도 13세였다. 그 정도 나이면 임금으로 즉위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는 증거다.
“진짜 황자가 6세라면 상관없겠으나, 새로이 입양하는 종실 소생 태자가 6세라는 건 너무 어립니다. 물론 법도대로 하면 성친왕 전하 소생 중 하나를 양자로 들여 보위를 물려주심이 옳겠으나, 현실적인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 다른 방안을 고려해 주십사 청하는 바입니다.”
“그 다른 방안이란 무엇인가?”
태황의 눈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보통 사람이 보았으면 등골이 섬?했을 광경이지만, 이미 그 눈길에 익숙해진 강기석은 차분하게 발언을 계속했다.
“예왕 전하의 장남 경평공을 양자로 들이시면 어떻겠습니까. 평판이 자자한 예왕 전하의 인품과 학식은 소신이 굳이 밝힐 필요가 없을 정도이며, 경평공께서도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원숙한 인품과 학식을 갖추셨으니, 훌륭한 태자가 되실 것입니다.”
더구나 경평공은 나이도 딱 16세다. 정말 적당한 나이가 아닌가.
“영해공은 사냥꾼, 강녕공은 난봉꾼이라 도저히 제위에 올릴 사람이 못 됩니다. 삼성공은 두 형보다는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으나, 경평공보다 낫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그 형제들이 불량하니, 보위에 오른 친아우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경평공이 좋겠다는 건가.”
“예, 폐하.”
경평공이 예왕의 장남이라는 건 문제가 안 된다. 본가의 대를 잇기 위해서 양자로 들이는 거니까 말이다. 당연히 본가가 분가보다 우선이다.
“분명 법도에 따르자면 성친왕 전하 소생 두 왕자 중 하나를 양자로 들이심이 옳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법도보다 실리를 택해 주시옵소서. 연소하여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성친왕의 자제들이 어찌 태자가 되어 그 큰 짐을 짊어지겠습니까.”
강기석의 발언은 태황이 얼마 살지 못한다고 전제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태황이 오래 살 거라면 어린 이은이나 이준을 양자로 들여 시간을 두고 제왕으로서 교육해도 되는 거니 말이다. 조회 자리였다면 대역무도하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태황 스스로가 방금 자기 입으로 ‘나는 앞으로 얼마 못 살 테니 새로 황자를 낳지 않겠다’라고 토로한 상황이다. 태황은 강기석을 나무라지 않았다.
“사직을 굳건히 지키기 위한 선택이오니 부디 깊게 생각해 주시옵소서.”
강기석은 성친왕의 아들들이 본국이 아니라 미주에서 자랐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미주는 본국과 비교해서 모든 것이 낙후된 곳이다. 이형준이 함께 있다고는 하나, 사실상 아무것도 안 배운 상태나 마찬가지일 게 뻔하다.
“알겠다. 그대는 그만 나가 보라.”
“예, 폐하.”
강기석이 예를 올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태황이 아직 남아 있는 김창균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왕저에 요즘 누가 드나드는가?”
“수일 전에 승상이 몰래 다녀갔습니다. 예왕 전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확실치 않사오나, 필시 동궁이 빈 지금 상황을 놓고 의논을 벌인 듯하옵니다. 공식적으로 명부에 오른 끄나풀 셋은 아무 보고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예왕저에 펼쳐진 금위사 감시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금위사장 교체에서 얻은 성과였다. 태황은 김창균에게 예왕의 뇌물을 받은 금위사 관원들에 관해 보고를 받은 뒤에도 그들을 그대로 두라고 명했다. 그리고 감시만 강화했다.
이미 예왕의 손아귀에 들어간 끄나풀들도 모두 그대로 놔두었다. 공연히 빼내거나 없애서 예왕 측이 경계하도록 만들 필요는 없었다.
“시첩 장씨의 친정을 통해 집어넣은 시비가 들키지는 않았으나, 장씨 주변에만 매여 있고 아직 미숙한 탓에 접할 수 있는 첩보가 좁습니다. 이번에도 승상이 방문했다는 사실까지는 알았으나, 대화 내용은 전혀 엿듣지 못했습니다.”
예왕이 기근 중에 수시로 술판을 벌인 것, 장씨를 감히 ‘귀비’라고 부른 것 등이 모두 이 시비를 통해 태황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태황은 별다른 조처를 명하지 않았고, 예왕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밖에서는 군자연하더니 집에서는 남몰래 술상을 차려놓고 퍼마셨다고는 하나, 이는 딱히 죄악이랄 것도 없는 행동이다. 밖에서는 온갖 점잔을 다 빼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 겉과 속이 다른 사대부가 어디 한둘이던가?
시첩을 귀비라고 부른 일은 확실히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뱉었을 때 예왕이 잔뜩 취해 있었던 건 분명했다. 태황은 보고를 받으면서 그 점도 분명하게 확인했다.
“예왕은 여전히 토끼가 기둥에 부딪히기만 기다리고 있는가?”
“예, 그러합니다. 이제까지 계속 그리하였듯, 예왕께서는 어떤 행동도 나서서 하지 않고 사람을 모아서 작당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일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굴러가기를 그저 앉아서 기다릴 뿐입니다. 행동으로 역심을 보인 바는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
“바깥에서는 여태까지와 똑같다는 말이렸다.”
김창균이 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예, 폐하. 애초에 뇌물을 받은 자들이 담당한 업무도 예왕저 내부 동정을 은밀히 살피는 일이었습니다. 외부에서의 행동은 다른 관원들이 확인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모두 샅샅이 기록해서 보존하고 있습니다. 문제 될 부분은 없습니다.”
솟을대문 밖에서의 예왕은 여전히 옛날과 같은 군자였다. 단지 집안에서는 방만한 행동을 일부 행하고 있음이 들통이 났을 뿐이다.
태황이 문서를 넘겨받아 직접 읽었다. 잠시 기다리던 김창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외람되오나 신이 한 마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라.”
“옛날 무종께서 지금 예왕이 하는 바를 보셨다면, 당장에 의금부 뇌옥에 수감하고 엄하게 문초하시어 역심을 품었다는 사실을 토설하게 만들고야 마셨을 겁니다. 시첩에게 지껄인 그 한마디만으로도 처단하고도 남을 일인데, 어이 용납하시는지요.”
김창균은 이런 점에서 박중현과는 달랐다. 박중현이 충실하게 태황의 명을 따르기만 하고 일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김창균은 서슴없이 의견을 말하고 태황의 의도를 물었다. 태황은 싫은 기색 없이 그에 답하고는 했다. 물론 매번 그러지는 않았다.
“예왕도 황자다. 사람은 욕심을 품게 마련이니, 황자로 태어난 이가 보위에 오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진대 어찌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 처형하겠는가.”
태황이 눈을 감았다. 김창균은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역당을 모아 뭔가 꾸미기라도 했다면 모르되, 그런 것도 없다. 승상을 맞아 술상을 차린 명분도 태자를 기리는 의도였다고 했다. 짐이 태봉의 미친 중놈도 아닌데 어찌 관심법으로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고 심판한단 말인가.”
‘태봉의 미친 중놈’이란 궁예를 말한다.
“증거도 명확하지 않은데 예왕을 치고 그 일가들을 모조리 처형하거나 폐서인에 처했다고 하자. 그랬다가 만약 성친왕이 대동양에 가라앉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다음 임금으로 대체 누구를 앉혀야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소관이 어리석어 폐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김창균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태황이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그만 나가보아라.”
“예, 폐하.”
짐을 챙겨 나온 김창균은 지나가는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지친 상감의 깊은 속을 한순간이나마 엿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