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21
3부 1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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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는 간만의 차가 심한 데다가 갯벌이 긴 포구라, 배가 바로 물가에 닿지는 못한다. 본선은 깊은 바다에 닻을 내리고, 물자건 사람이건 밀물인 동안 거룻배를 사용해서 내리는 게 보통이다. 이 거룻배는 썰물 때 개펄에 얹혀도 상관없는 평저선, 한선이다.
“이런 배도 오랜만에 타네.”
말이 좋아 짐 나르는 거룻배지, 거의 판옥선만큼 큰 배가 동현 옆에 붙었다. 장조 시절에 경기수영 훈련 참관하러 나가서 타본 뒤로 처음이다.
짐을 최소한으로 가져온 덕분에, 이 거룻배 단 한 척으로 우리 가족들과 시종들, 짐까지 몽땅 실었다. 배에 남은 안용복이 싣고 온 나머지 화물을 하역하는 동안, 우리는 상륙해서 세관을 거쳐 인천도호부로 간다.
“절차는 지켜야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내가 친왕이라고 해도 법은 지켜야 한다. 입국자가 지켜야 하는 규정대로 세관에서 신분 확인을 받고, 가져온 물품에 대한 조사도 받고, 세관 소속 의관에게 검역까지 받아야 한다. 세관이 사실상 출입국관리소 기능 전체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절차를 지키는 건 좋은데, 40일 동안 격리까지 되어야 하는가?”
“그건 남만에서 오는 양인들에게나 해당하는 일이고, 전하께는 해당이 없을 겁니다. 승선 전에 미주에서 검역을 받고 확인서를 발급받으셨잖습니까? 세관리가 그것만 확인하면 격리 없이 바로 상륙하실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조선에 입국하려는 외국인에게는 40일간 월미도 소재 검역소에서 대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각종 전염병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조치다. 현시대 의학 수준에서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고.
물론 이 법은 본토에 있는 색주가에서 실컷 놀고 싶어 하는 외국인 선원들에게는 당연히 인기가 없다. 하지만 정식 허가증 없이 상륙했다가 잡히면 태형과 막대한 벌금 중에 하나를 택일해야 하므로, 아득바득 참는 게 보통이다.
안용복이 딸려 보낸 사관은 조선에 들어갈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나 세관원들의 방자한 태도 같은 것을 열심히 설명했다. 귀국하는 도중에도 몇 차례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 한 번이라도 더 들어두는 편이 당연히 낫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거룻배가 부두에 닿았다. 육지에 발을 내딛기 전, 내 뒤에 있는 두 사람을 돌아보면서 단단히 다짐했다.
“잊지 말게. 그대들은 없는 사람들이야. 알겠는가?”
“예, 전하.”
얼굴에 칠을 하고 낡은 옷으로 신원을 숨긴 두 사람이 조용히 대답했다. 하나는 김종건, 다른 하나는 이진원이었다.
“무슨 일인가?”
귀국 채비를 하느라 바쁜 어느 날이었다. 박종선을 다그쳐 가며 급하게 짐을 싸느라 한창 바쁜데, 이진원이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이진원도 올해 환갑, 무척 나이가 들었다. 인생의 3분지 1을 성친왕을 수행하면서 보낸 가엾은 사람이다.
“전하, 요즘 많이 지치신 것 같아 보약을 준비하였습니다. 한 사발 드시면 어떨까 하여….”
“보약? 자네가?”
이진원은 외과 전문이다. 조약(調藥)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전문 분야는 아니다.
그동안 미주에서 지내면서 내가 보약을 먹은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면 늘 상희가 의학교를 세우면서 초빙한 교수들이 지은 걸 먹었지, 이진원이 보약을 가져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전문 분야가 아니잖은가.
약간 의구심이 일었다. 본인이 따로 구하려면야 당연히 구할 수 있겠지만, 본래 외과의인 이진원이 일부러 보약을 챙긴다는 상황이 어색했다. 게다가 손도 약간 떨고 있다.
17년 ? 실질적으로는 15년 ? 이나 내 곁에 함께 있던 사람이 설마 무슨 수작을 부릴까 싶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거다.
더구나 이진원은 이형준이나 정호찬이 그런 것처럼 성친왕과 오랜 인연이 있지도 않다. 홍상훈처럼 들여다보기 쉬운 사람도 아니다. 김종건처럼 내게 은혜를 입고 감사하는 마음에 모든 것을 자백하지도 않았다. 박종선처럼 내 손에 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내게 약사발을 내밀었다…수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바보다. 그리고 이런 행동에 의심이 생겼다면 확인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그래도 15년간 쌓은 정이 있으니, 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보자.
“이리 주게. 약 한 사발 정도야 후딱 마시면 그만이지.”
냉큼 받아들었다. 설마 이럴 줄 몰랐는지 멈칫한다. 실눈을 뜨고 반응을 살피면서 입으로 약사발을 가져갔다. 사발 끝이 막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이진원이 소리쳤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전하!”
“왜 그러나?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마시고 이야기하세.”
고개를 갸웃거려 보인 뒤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내 입에 닿은 약사발이 살짝 기울어지는 순간 이진원이 손을 뻗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움직임을 보면서 살짝 몸을 틀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피했고, 약사발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자네 왜 그러나? 갑자기 무슨 짓이야?”
내가 놀란 목소리로 추궁하자 노인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부들거리며 떨었다.
“기껏 보약을 마련해 줬으면서 왜 쏟게 한 건가? 아깝게스리…. 혹시 약이 다른 사람 것과 바뀌기라도 했나? 그래서 먹지 말라고 했어?”
태연하게 묻자 이진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 떨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방금 전하께 올린 것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이진원이 예왕, 아니 ‘어둠 속의 누군가’가 보낸 2호 자객이었다. 다만 이진원은 김종건이 자기처럼 나를 죽일 임무를 청부받은 줄은 몰랐다. 김종건과 별개로 ‘성친왕이 귀국 지시를 받았을 때’ 죽이라는 청부를 그 역시 받았을 뿐이다.
‘당시에는 돈도 급했지만…황실 체면에 먹칠할 게 분명한 망나니 황자 같은 건 일찌감치 사라지는 게 세상을 위해서도 좋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견서사 파견 초기에도 같은 생각이라 하루빨리 전하를 없애고 귀국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역시나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없을 리가 없었다. 순전히 나 때문에 유럽으로 쫓겨났으니 나를 해치우고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가 나올 수밖에.
이진원은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까지 가면서 ‘내’가 벌이는 꼬락서니를 보고 이 난봉꾼 황자를 없애야겠다고 확실히 결심했다고 했다. 그 결심을 바꾼 계기는 빈 포위전이었다.
‘당연히 그런 변덕을 부린 대가로 돌궐군의 칼에 돌아가시리라고 생각하고, 소인의 손을 더럽히지 않게 되었으니 잘됐다고 여겼사온데….’
그런데 내가 대승을 거두고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때 내가 예전의 그 성친왕이 아니라는, 어딘가 달라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고 했다.
그 뒤로 이진원은 어딘가 달라진 눈으로 나를 살폈다. 그리고 내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고 동조하면서 차츰 자신이 받은 살인 청부는 잊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켕기는 감정이 남아 있었고, 그 탓으로 나를 비롯한 누구와도 감정적인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하지만 뒤이어서 건너온 상희까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자신을 친절하게 대하고, 의학교에 출강까지 시키며 마치 일가를 대하듯 하자 그 망설임도 무너졌다. 그리고 영원히 내 옆에서 머물며 의관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미주에 계속 머무른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지.’
살인 청부 조건은 ‘성친왕이 귀국할 때’였다. 오랜 기간 연락이 없어서 이젠 취소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미주에 있는 동안 두 번이나 연락이 들어왔다. 일반 편지로 위장한 협박 서신이 왔다. 만약 배반한다면 가족이 불탈 각오를 하라는.
처자식의 목숨만 걸린 게 아니었다. 대대로 물려 내려온 의원(醫院)과 그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 그리고 입원한 환자들까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청부한 자의 정체를 모르니 내게 고변할 수도 없었다. 잘못 고변하면 선금 50냥과 중도금 100냥, 합쳐서 150냥을 이미 받고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동조하는 글을 쓴 사실이 드러나 자신만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미주 유배가 오래 계속되기만 바랐다.
그런데 어떤 예고도 없이 귀국 명령이 떨어지자 이진원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밤에 몰래 죽이자니 카자크 형제들이 밤새 지키는 내 침실에는 범접할 수가 없고, 그래서 자기도 함께 죽을 각오로 대낮에 독살을 노렸던 거다.
‘하지만 막상 저를 믿고 약사발을 받으시는 전하를 보니, 도저히 드시게 할 수가 없었….’
이진원은 통곡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자백은 거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했으니까 굳이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분명 15년 동안 날 속이긴 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이 되기 전에 자백하고 용서를 구한 것도 사실이므로 그 점에서는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그게 지금 이들 두 사람이 나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 세관에 내리려는 이유다.
“자네들 둘은 모두 내가 미주에서 채용한 이주민이라는 걸 잊지 말게. 동변 병부 부장인 정령 김종건은 마침 지선성으로 온 정령 홍상훈과 교대해서 골로강 전선을 수비하러 갔고, 의관 이진원은 역시 골로강에 군의관으로 갔으니까.”
“예, 전하.”
과연 이들 두 사람에게 나를 죽이라고 청부한 놈(들)이 암살 실패를 인정해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귀국은 숨길 수 없어도 이들의 존재를 숨길 수는 있다.
‘내 측근이 나를 암살하려 했다는 추문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는 없는 법이거든.’
이들은 골로강 요새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하지 않는다. 중간 어딘가에서 사라졌는데 그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암살 시도에 대한 응징으로 은밀하게 살해해서 황야에 버렸기 때문이다. 대략 이런 시나리오다.
누군가 미주에서 이들 두 사람의 행방을 추적하더라도 내가 이들에게 화를 냈었고, 이들 둘이 골로강으로 가는 도중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이상은 알아낼 수 없을 거다. 그놈들이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 사실을 알고서도 가족들의 신변에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
이들을 정말 죽이거나 미주에 남겨두고 오지 않은 건, 필요할 때 바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 영원히 은폐하고 들키지 않아야 할 존재라면 죽여버리는 게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길이지만, 언젠가 터트릴 증인이라면 살아있어야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터트릴 증인으로서의 가치까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들 두 사람이 지난 15년 동안 내게 바친 충성을 생각하면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말했듯 일을 저지르기 전에 자백도 했고 말이지.
“걱정하지 말라고. 다 잘 될 거야.”
이들의 위장 신분을 아는 건 모두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견서사 멤버들뿐이다. 하인들은 이 두 사람을 잘 모르는 자들과 입이 무거운 자들로 신중하게 골라 데려왔다. 그러니 우리 내부에서 비밀이 샐 염려는 안 해도 좋다.
딱 하나 유감스러운 점은 이들에게 내 암살을 청부한 놈의 정체는 물론 연락처도 여전히 모른다는 문제다. 예왕 일파라는 추측만 있을 뿐, 확증은 전혀 없다. 이것도 마저 캐내려면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 3 –
“성친왕 전하께서 이곳으로 오실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해변에서 곧바로 마중하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소서!”
세관으로 달려온 인천도호부사 남호석이 내 앞에 넙죽 엎드렸다. 얼마나 벌벌 떠는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대한을 다스리는 가장 고귀하고도 존엄하신 태황 폐하의 친아우께서 귀국하셨는데 감히 마중하지 않고 관아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던 죄, 백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부디 용서하시어 이 부끄러운 이름이 묘당에서 거론되지 않게 해주소서.”
응, 형황한테 이르지 말란 말이지. 알겠다. 그 정도야 뭐.
“본연의 직무에 매진하는 귀 부사의 태도는 참으로 훌륭하다. 수령으로서 처리해야 하는 기본적인 공무를 처리함이 당연히 우선이지, 사전에 통보도 없이 들이닥친 손님을 환영하지 못했다 해서 벌을 주면 어찌 타당하다 하겠는가? 아무 염려 말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전하!”
인천도호부사가 저렇게 벌벌 떠는 모습을 보니, 옛날 도성 일원이 시끄러웠다는 성친왕의 장난 수준이 짐작이 간다. 분명히 세상천지 자기 마음대로 들쑤시고 다니다가, 혹시 마음껏 놀지 못하게 하거나 엄하게 구는 사람이 있으면 ‘엄마한테’ 일러바쳤겠지.
“험, 커험.”
내 눈길을 받은 이형준이 이 시점에서 난데없이 헛기침하는 것만 봐도 알 만하?? 자기도 떠올리기 싫은 옛 추억이라도 생각난 모양이다.
“도호부사에게 묻겠다. 본왕이 귀국을 했으니 어서 도성에 들어가 폐하께 인사를 드려야 하겠는데, 탈것을 마련해줄 수 있겠는가?”
집에 가는 건 황궁에 들러 형황에게 귀국 신고를 한 뒤다. 상희는 일단 자기 친정에 가서 거기다 짐을 풀고 내 집에는 천천히 가보자는데, 그건 일단 집 상태부터 내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 결정했으면 싶다. 아무래도 처가살이는 기분이 좀 그렇단 말이지.
“전하, 이미 유시(17~19시)가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채비를 차려 출발한다고 해도 도성에 닿으려면 한밤중에나 될 것이니, 객사에서 쉬시고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시지요.”
“그대가 그리 권한다면 그렇게 하지.”
대신 도호부사는 당장 파발을 띄워 황궁에 내 도착을 알리겠다고 했다. 그럼 황궁에서는 내 도착을 준비할 여유가 생길 거라면서 말이다.
“도성에 가시면 바로 폐하를 알현하셔야 할 텐데, 전하 혼자이시라면 몰라도 왕비 전하를 비롯한 일행이 모두 파발마처럼 빠르게 달리기는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부디 여유를 가지고 움직이시옵소서.”
“알겠다. 그럼 편안한 잠자리를 부탁하겠다.”
세상 반대편에서 동생네 식구가 왔는데 밤을 새워서 달려오지 않고 인천에서 하루 자고 간다고 트집을 잡아서 성질을 부릴 만큼 형황이 속이 좁은 좀팽이는 아니겠지.
그나저나, 도성에서 나를 ‘맞이’할 여유를 준다고 생각하니까 부담감이 확 밀려오는구나. 과연 어떤 ‘환영’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