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31
3부 1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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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화창한 봄이다. 16년 만에 맞이하는, 정말 즐겁고 기분 좋은 도성의 봄이다. 창문 밖에는 봄을 즐기러 거리에 나온 남녀가 흥겹게 오가고 있었다. 야간 통행이 금지되는 인정(人定)까지는 아직 1시진 반(3시간)쯤 남았으니, 저들이 즐길 시간은 넉넉하다.
“옛날이었으면 지금쯤 여의도에 화려한 벚꽃이 피어서 밤 벚꽃놀이를 하러 갔을 텐데.”
“어린이대공원 벚꽃놀이도 괜찮았어. 우리 학교랑 가까워서 많이들 다녔지.”
“그렇구나, 우리는 여의도에 주로 갔는데.”
나와 상희가 말하는 ‘옛날’이란 당연히 우리 두 사람이 살았었던 주관적인 과거, 21세기를 의미한다. 시계열을 엄밀히 따지자면 과거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두고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전에 살았던 삶이니까 ‘과거’다.
“제주도랑 전라도에 가면 토종 벚나무가 있긴 하겠지만…그걸 여기다 갖다 심자고 하면 그런 필요도 없는 짓을 왜 하느냐고 난리가 나겠지.”
서울에서 벚나무를 흔하게 보게 된 건 20세기 일제의 유산이다. 일본인들이 여기저기에다 대량으로 심은 게 기원이었으니까 말이다. 일본인들은 원체 벚꽃을 좋아하고, 오다가 우리 사신들과 벚꽃놀이를 즐긴 전례도 있다. 음, 히데요시도 원균이랑 벚꽃놀이 즐겼다던가.
잊고 있다가 생각났는데, 그때 원균을 생포하지 못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잡으면 단단히 혼을 내줬을 텐데, 전장에서 화살을 맞고 고통 없이 편하게 죽었다니 말이다. 에휴, 아까워라.
어쨌든 벚꽃놀이 배경이 그러하니 일제 잔재라고 현대에도 난리가 났었다. 다만 조선에서 난리가 난다는 건 일본문화라서가 아니다. 벚꽃 자체가 조선에서 인지도가 별로 없어서다. 조선에서는 진달래나 연꽃, 국화, 매화를 좋아한다. 화전 부쳐 먹는 꽃도 진달래다.
“맞아. 정 길에 나무를 심을 거면 먹을 것도 별로 없는 벚나무보다는 차라리 매화나무나 감나무, 대추나무를 심자고 할걸?”
“열매 따려는 사람들 때문에 가지가 남아나지를 않겠는데, 그거.”
농담 섞인 상희의 제안에 내가 웃자 반촌주점 2층 별실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어차피 양옆에 늘어선 다른 방들도 손님들의 재담과 웃음으로 차 있어서 별다른 티는 나지 않았다. 방음도 여전히 확실하고.
“조선에서는 정원수 개념은 있어도 가로수는 아직 개념이 없으니까 일단 유실수를 심어서 가로수라는 물건 자체를 친숙하게 다가오게 하는 건 나쁘지 않겠다. 도로변에 5리마다 심는 오리나무나 20리마다 심는 시무나무는 가로수라기보다는 이정표 역할이잖아.”
정원수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장조 때까지 조선에서 정원을 꾸미는 법은 옛날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은 변화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에 귀화한 유럽계 도래인이나 상업, 외교와 같은 업무 관련으로 주재하는 일부 유럽인들의 영향이다.
연이가 서양인 후궁을 둔 탓이었다고 하지만 황궁 안에도 네덜란드식 정원이 꾸며져 있을 정도다. 그러니 양반가 정원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하다.
물론 애초에 양쪽 취향이 전혀 다르니 서양식 정원을 그대로 갖다 놓지는 않았다. 서양식 정원의 인공미는 조선에서 별 공감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분수 같은 장식적인 요소가 약간 추가됐을 뿐이다.
“유럽에서도 조선식으로 정원을 만드는 사람은 없다고 했지?”
“조선 기와로 정자 지붕을 얹은 사례까지는 봤는데, 정원 자체를 조선식으로 구성하지는 않더라. 아무래도 양쪽 세상이 추구하는 취향이 다르니까.”
유럽에서 유행하는 조선 풍속은 ‘한풍’이라고 한다. 아마 한국어로 ‘~풍(風)’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유래한 것 같다. 도자기 외에 나전칠기나 놋그릇, 차 같은 게 한풍으로 유행하는 물건들이다. 파티 등에서 여흥으로 조선 의상을 걸치기도 한다. 최고 스타는 물론 인삼이다.
내가 유럽에 있었을 때도, 조선제 놋그릇 식기 세트는 귀족들 사이에서 은그릇 못지않은 귀중품으로 취급받았다. 물론 조선에서 쓰는 것 같은 국그릇 밥그릇 세트가 아니라, 주문을 받아 제작한 유럽식 식기 일습이다. 젓가락 대신 나이프와 창숟가락을 넣기는 했지만.
“나이프는 당연하다 치고, 왜 그냥 숟가락이 아니고 군용 창숟가락이었어?”
“유럽인들은 젓가락도 쓸 줄 모르는 야만인들이니까, 이걸로 찍어서 먹으라고 창숟가락을 넣었대. 우리 쪽 기술자들은 높으신 양반들이 식기를 안 쓰고 맨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거지.”
베르사유에도 포크나 젓가락이 없었다. 집주인인 루이 14세가 젓가락도 포크도 안 썼기 때문에 베르사유에 그런 물건을 하나도 안 뒀다. 하지만 초대를 받아서 간 귀족 저택에서는 가끔 창숟가락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 사절단이야 젓가락을 그냥 휴대하고 다녔고.
“어, 벌써 어두워졌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등화군(燈火軍)이 돌아다니며 가로등을 켜기 시작했다. 저 가로등들은 통금이 시작되는 인정(人定, 현대 시계로 22시 30분)까지는 켜 두지만, 자시가 되면 다시 끄기 시작해서 자정이 되기 전에 다 끈다.
가로등을 밤새 켜놓지 않는 이유는 별것 아니다. 일단 비싼 기름이 많이 들고, 불을 계속 켜두면 가로등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는 사람이 나와서 그렇다고 한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의 고사에 따라 가로등 불빛으로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는 모양이다.
“나리, 술과 음식이 왔습니다.”
“오, 들여라.”
밖에 있는 보리스가 문을 열어주자 여급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무럭무럭 김이 오르는 피자, 아니 남만전 접시와 거품이 나는 맥주잔 두 개가 얹혀 있었다. 여급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젓가락 두 벌과 맥주를 우리 앞에 하나씩 놓고 피자를 가운데 놓았다.
피자는 젓가락으로 집어 먹기 좋도록 주방에서 작게 썰려서 나왔다. 막걸리집에서 파전을 썰어서 내놓는 모양과 똑같다. 먹는 방법 때문에 그렇겠지만, 반촌주점에서 파는 피자에는 테두리가 거의 없었다.
“수고가 많다. 자, 넣어두어라.”
은화 한 닢을 슬쩍 쥐여주자 여급이 반색했다. 그리고 허리를 푹 숙이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종만 울려 주시옵소서. 바로 달려오겠나이다.”
“알겠다, 알겠어. 어서 가서 일 보아라.”
나랑 상희 모두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평복 차림이라서, 도성에 단 한 사람뿐인 친왕과 왕비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그냥 기생 데리고 놀러 나온 한량인 줄 안 모양이었다. 여급이 거듭 인사를 하며 나가자 상희가 내게 슬며시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행하(行下: 팁)를 주려면 그냥 탁자 위에 얹어놔도 되는데 굳이 손에 쥐여줬네? 우리 연산이 마음에 혹시 색귀가 돋아났나아아아~?”
“손 내밀라고 해서 손바닥에 떨어트려 주는 거 다 봤으면서 그런다. 내가 정말로 흑심을 품었으면 나 혼자 나왔지, 너 보는 앞에서 수작을 부리겠어?”
한숨을 쉬며 대답하자 상희가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 알아. 농담이야.”
상희는 내게 딱히 밖에서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말라거나 첩을 더 들이면 죽여버리겠다거나 같은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 면전에서 이렇게 은근히 한마디씩 던져서 내가 긴장하게 만들곤 한다.
애초에 나한테도 첩을 더 들일 생각 같은 건 없다. 상희와 올렝카 두 사람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게 지내고 있고, 둘에게 불만도 없다. 후사가 더 필요하지도 않다. 그런데 왜 여자를 더 늘려서 골치를 썩일 거리를 만들어야 하는가.
“시원하다. 반촌 맥주 맛은 9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주석잔에 담긴 체코식 맥주는 내가 기억하는 맛 그대로였다. 상희도 잔에다 입술을 대고 살짝 맛을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맛이 변할 법도 한데 유지가 잘 되고 있어.”
‘반촌그룹’ 소유주는 우리 손자 회령후 이홍진이다. 원가 절감해서 조금 더 벌겠다고 맥주 질을 떨어트리는 속 좁은 인간은 아닌 모양이라 다행이다. 역시 우리 후손이다.
“정말 다행이다. 올해는 풍년이 들 것 같아서 맥주도 이렇게 마실 수 있고….”
웬만큼 가뭄이 드는 정도로는 반촌이 한적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을해년부터 정축년까지, 지나간 3년 동안은 경신 연간을 연상시키는 지독한 기근이었다. 굶주리는 이가 사방에 널려 있는데 맥주나 남만전 같은 걸 제대로 팔 수 있었을 리 없다. 커피야 수요가 꾸준하지만….
하지만 올해는 봄부터 비가 넉넉히 내렸다. 날씨도 정상적인 날씨로 돌아왔다. 그 지독한 기근이 완전히 끝났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단 올해 한 해는 기근이 쉬어가는 해가 될 게 분명했다.
덕분에 올해는 도성 거리가 다소 흥청거리고 있다. 우리도 마음 편하게 평복을 입고 밖에 나와 잠시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사방에 굶주린 백성들이 쓰러져 허덕이고 있다면 우리가 돈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노닥거릴 수 있겠는가.
“어떻게 딱 우리가 돌아온 해에 날씨가 풀린 덕분에 정말 한시름 놨어. 봄에 애들 데리고 동물원도 가고 말이야.”
동물원이라는 건 인왕산 밑 응방 이야기다. 우리 애들은 배를 탈 때부터 악어와 호랑이, 코끼리를 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이나 밖에서 돌아다녀야 할는지 모르니만큼 겨울 중에는 나들이를 미뤘고, 두 달 전에 비로소 날짜를 정해 응방에 갔다.
당연하겠지만 아이들은 열광했다. 특히 은이와 준이는 만담쇼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준아, 준아! 호랑이가 좋아, 코끼리가 좋아?”
“코끼리가 좋아.”
“준아, 준아! 원숭이가 좋아, 코끼리가 좋아?”
“코끼리가 좋아.”
“준아, 준아! 악어가 좋아, 코끼리가 좋아?”
“코끼리가 좋아.”
“준아, 준아!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코끼리가 좋아.”
준이는 형의 유도심문에 빠지지 않고 지조를 굳게 지켰다. 그래서 우리 둘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상은 코끼리가 되었다.
“다른 애들도 같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정말 귀엽더라. 은이, 준이랑 어울려서 어찌나 잘들 뛰어노는지.”
응방에서는 내가 처자를 거느리고 가겠다고 했더니 그날 하루 문을 닫고 일반 입장객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왕 상황이 그렇게 된 거 기회가 온 참에 여섯 카자크들에게도 가족을 모두 데려오라고 했다. 권훤도 부르고.
카자크들이 혼인한 것도 다 미주에서였고 보니, 십여 명이나 되는 그 일곱 집 애들도 다 은이랑 준이 또래다. 미주에서, 배 위에서 늘 같이 어울려 놀던 꼬맹이들이 코끼리, 호랑이, 악어 우리 앞에 몰려서 악악대며 떠드는 모습을 보니 혼란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뒤엉켜 놀면서 같이 자랐으니까, 자라서도 한층 깊은 유대가 생길 거야. 애비들이 나한테 충성하는 것보다, 그 애들이 우리 은이랑 준이한테 충성하는 게 더 강할걸.”
귀한 핏줄을 타고난 자식에게 신분이 낮은 놀이 친구를 딸려주어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게 하는 건 동양이건 서양이건 똑같이 존재하는 오래된 관습이다. 친구를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는 충신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말이다.
물론 내가 은이의 친위대를 확보하려고 카자크들을 혼인시킨 건 아니다. 내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상전으로서 해줘야 할 당연한 도리를 지키려고 한 거지. 동자공을 수련하는 것도 아닌데 혼인도 안 시키고 10여 년을 끌고 다닐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은이에게 좋은 친구들이 무더기로 생긴 셈이다. 공부에는 좀 도움이 안 된다만, 주변을 둘러싸고 지키는 데는 최강의 근위대가 될 거다.
“나중에 은이가 귀한 자리에 오르면 경호를 걔들한테 맡기면 되겠지. 그런데 그 자리에 정말 올라가긴 하는 거야? 소문만 도는 거 아니고?”
“그걸 확실히 모르겠어.”
귀국한 지 어느새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형황을 서너 번쯤 알현했는데, 후계가 확실해진 탓인지 기근이 가라앉은 탓인지 몰라도 어째 건강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나를 만나서 하는 질문도 순 유주랑 미주 사정에 관한 것밖에 없었고 말이다.
“말했잖아? 늘 들어갈 때마다 승정원 승지들이 죽 앉아 있고 사관까지 임석해서는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 전부 속기로 적고 있어. 후계자를 어떻게 하겠다고 형황이 말하지도 않는데 내가 물어보기도 참 곤란한 분위기야.”
내가 한숨을 쉬며 맥주를 들이켜자 상희가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두 팔로 턱을 괴었다.
“혜민서에서도 사람들이 뒷전에서 계속 수군거려. 은이가 태자가 되지 않겠냐고. 계속 못 들은 척하기도 쉽지는 않아.”
상희도 그동안 나름대로 바빴다. 아이들은 양소목과 올렝카에게 맡겨두고 혜민서에 나가 의료봉사를 했기 때문이다. 기근과 질병으로 혜민서를 찾는 환자는 늘어났는데 환자를 돌볼 일손은 언제나 부족했고, 돕겠다고 나서는 손길은 언제나 환영받았다.
이번 생에서는 상희도 집안 체면이 있다 보니 의시에 응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희가 원체 어려서부터 의학 신동이라고 소문이 나 있다 보니 상희에게 침통을 잡지 못하게 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빈민을 상대하는 혜민서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예왕비는 돈으로 운동하고, 너는 침이랑 뜸으로 운동하고…형제간은 서로 눈치만 보는데 동서들끼리만 뒤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그렇지?”
“그걸 알면 빨리 폐하하고 담판을 짓기나 해.”
예왕비는 난민들에게 돈과 곡식을 뿌리며 구휼하는 자선사업에 겨우내 열중하고 있었다. 남편, 자식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행동인 게 우리 눈에는 빤히 보였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남편 내조하느라 참….”
“연산, 말은 바로 해야지. 나는 네가 태제 되거나 은이가 태자 되는 거랑은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어서 혜민서에 나가는 거야. 미주에서도 그랬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야. 물론 도움이 될 거라는 건 알지만.”
“알지, 알아.”
미주에서 내가 동변 각지로 출장을 다니는 동안, 상희는 지선성에서 혜민원에 나가 환자 치료를 돕는 게 일상이었다. 가끔은 나랑 같이 인디언 마을에 가서 의료봉사도 했다. 지금 혜민서에 나가는 것도 상희에게는 그때 활동의 연장일 뿐이었다.
“환자를 생각하는 것밖에 머리에 없으신 우리 민 박사님께 건배!”
“놀리기는.”
잔이 비었다. 종을 울려 맥주 두 잔을 더 가져오게 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래도 형황이 날 의심하는 것 같아. 저놈이 정말 개심(改心)했는지, 그냥 개심한 척만 하고 본성을 숨기고 있는지. 만약 후자라면 태황이 되든 대원왕이 되든 나라를 말아먹고 말 거라고 걱정할 수 있긴 할 거야.”
본국에 돌아오니 17년, 아니 이젠 18년 전에 성친왕이 어떤 성품이었는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태황이라고 해도 그런 놈이나 그런 놈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줘야 할 상황이라면 분명히 심각하게 고민할 거다.
과연 형황이 언제쯤 후계 문제를 확정할지 추측하면서 두 번째 잔도 다 비웠을 때쯤 문밖 복도에서 중노미 한 놈이 소리를 치며 지나갔다.
“9시 반입니다! 9시 반! 2각 뒤면 인정입니다! 퇴점하실 분들은 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셈을 치르십시오!”
30분 후 통금이 시작되니 집에 갈 사람은 얼른 가라는 경고다. 지금 안 나가면 내일 아침 4시 ? 조선 표준시는 현대 한국 표준시보다 30분 늦다 ? 가 되어 파루(罷漏)를 쳐야 집에 갈 수 있다. 밖에만 안 나가고 시끄럽게만 안 굴면 가게 안에서는 자유롭게 놀 수 있다.
“집에 가야지?”
“가야지, 그럼. 애들이 우리 기다려.”
2주 전에 수리를 마치고 입주한 우리 집이다. 강씨를 위해서 굿도 하고, 원각사에 불사도 청하고, 마포 성당에 미사도 청했다. 셋 중에 한 군데 정도는 효험이 있겠지.
오늘 데이트는 집 정리를 마치고 처음 함께 나온 데이트다. 처가에서 지내는 동안은 왠지 눈치가 보여 애들만 두고 둘이서만 놀러 나올 수가 없었다. 상희는 부모님이나 오빠의 시선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내가 신경이 쓰였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니 여기저기 선 건장한 흑인이나 백인, 혼혈 사내들이 눈에 띈다. 행세깨나 하는 양반님네들이 자기 위세를 드러내는 시종으로 외별기 출신을 선호하는 덕에 나타난 현상이다.
“뭐, 덕분에 보리스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으니 좋은 일이지.”
안 그랬으면 보리스만 봐도 사람들이 성친왕 전하라고 난리가 났을 게 아닌가. 나한테는 편해진 변화라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 집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니까, 느긋하게 걸어도 집에 갈 시간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