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36
3부 1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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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예왕의 방문은 정탐에 주요 목적이 있었다. 자기가 나를, 예왕비와 장옥정이 상희와 올랭카를 상대로 담화를 나누는 사이에 예왕이 데려온 문객은 행랑채 안팎을 돌아다니며 내 집 사정을 살폈다.
“우리 하인들 상대로 이것저것 묻다가 뒷간 간다고 나가고, 마차고에 말이랑 마차 살피고 온다고 갔다 오고…마치 쥐가 풀 방구리 드나들듯 했더라. 아마 우리 행랑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구조는 어떤지, 방비 상태는 어느 정도 갖췄는지 그런 거 확인한 것 같아.”
만약에 예왕이 계유정난을 시도한다면, 내 집은 당연히 1순위 목표다. 여자나 애들까지는 죽이지 않겠지만, 나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거나 죽일 건 분명하다. 죽일 가능성이 조금 더 크다. 그게 수습도 편하고 뒤탈이 덜하니까.
“그런 역할을 맡을 정도라면 상당한 예왕 측근이겠네. 네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야?”
“없지. 성친왕 그 개초딩이 예왕 본인도 아니고 그 집 문객이나 하인 따위한테 별 관심을 기울였을 리가 없잖아.”
예왕 본인 이외에 성친왕의 기억에 있는 예왕 측 사람은 예왕비 하나밖에 없었다. 예왕이 혼인한 해가 성친왕이 견서사로 떠나기 4년 전이었던지라, 출국하기 전에 만나볼 기회가 꽤 여러 번 있었던 탓이다. 그래도 예왕비에게까지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다.
아직 어려서 그랬나 보지만, 성친왕은 여자 문제로는 별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성친왕을 소재로 한 로망스가 팔릴 수 있는 듯하다. 임해군처럼 숱하게 강간을 벌이고 다닌 색마였다면 글쟁이들이 아무리 미화하려고 해도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기는 불가능했겠지.
“처음 개인적으로 만나본 예왕은 어떤 사람 같았어?”
“그게, 이제까지처럼 적대감만 품기가 좀 어렵네.”
상희가 던진 질문은 나를 좀 난감하게 만들었다. 이제껏 언제 나를 죽이려고 들지 모르니 경계해야 할 적수로만 생각하던 상대의 이제껏 보지 못한 인간적인 면을 본 까닭이다.
“보름 전에 궁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밉살맞기만 했는데, 처자식 데리고 있는 가장으로서 보이는 모습은 좀 달랐어. 점잖고, 교양도 넘치고, 처자식들한테도 신사적으로 대하고. 자식 넷도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머릿속도 잘 자리 잡았더라. 딸들도 예쁘고.”
“그렇구나. 우리랑은 좀 달랐네. 예왕비는 계속 내 신경을 긁으려고 들었거든.”
상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두 눈에서 살짝 광채가 일었다.
“식사 중에 예왕비가 빈 포위전이랑 올렝카 이야기 꺼냈었지?”
“그랬지.”
그거 그냥 밥 먹으면서 나눈 잡담 아니었나? 그런데 상희에게 들으니 그게 아니었다.
“식사 끝나고 담화 나누면서도 계속 올렝카를 칭찬하더라. ‘유주부인으로 인해 성친왕께서 마음을 잡고 개심하셨고, 그 뒤에 덕을 쌓아 정진하신 덕에 조상의 영전에 부끄럽지 않은, 예전보다 훨씬 훌륭한 황자가 되셨다’라고 말이야.”
“어, 그건 좀.”
10년 가까운 올렝카의 내조 덕분에 망나니 성친왕이 제대로 된 인간이 되었다는 건 이미 도성 안팎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다. 당장 내가 미주에 있을 때 태후가 보내준 편지에서도 그 언급이 있었을 정도니까. 그래서 유주부인이라는 작위도 받은 것이고.
시중에 파다하게 퍼진 로망스도 결국은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거다. 하지만 이 로망스가 실제 상황과 달라진 부분은, 올렝카가 내 정처가 아니라 첩이 되었다는 부분이다. 춘향전이 현실이었다고 해도 춘향이가 절대 이몽룡의 정처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와 올렝카를 소재로 한 시중의 로망스들은 대부분 올렝카가 내 정처로 책봉되어 친왕비가 되는 결말을 만든다. 일부 작품에서는 아예 작중의 성친왕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 국왕의 부마가 되어 유럽에 정착하기도 했다. 글 쓴 놈이 혹시 천주교도인가?
이런 부분에서 작중의 성친왕 ? ‘성’자는 참 다양하게도 바꿔서 썼더라 ? 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나한테 모티브만 따서 창작한 인물이라는 면피가 성립하기도 했다. 물론 내 야설 쓴 놈들은 이런 글자놀음 같은 거 다 무시하고 추려내서 털었지만 말이다.
“그거 네 기분 상하게 하려고 작정하고 긁은 거 아냐…?”
“그렇지.”
춘향전을 읽고 온 손님이 이몽룡의 정처 앞에서 첩인 춘향이의 정절을 칭찬한다면 면전에 있는 이몽룡의 본처가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예왕비가 무슨 생각으로 그 화제를 줄기차게 꺼냈는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답이 나왔다.
“너하고 올렝카 사이에 싸움 붙여서 우리 집안에 분란 일으키려고 한 건가?”
“잘 아네. 내가 보기에도 그랬어.”
하지만 상희는 딱히 화를 내거나 기분이 상해 있지 않았다. 생글거리며 웃었을 뿐이다.
“뭐, 예왕비 나름대로는 연장자다운 태도로 점잖게 굴더라. 임석한 사람 중에서 친왕비인 내가 가장 신분이 높다는 것도 잘 아니 격에 맞게 처신했고. 그런데 아주 자연스럽게 나랑 올렝카 사이에 이간질을 시도하더라고.”
상희는 태후나 중전과는 원래 잘 아는 사이였다. 태후와 집안으로 얽혀 있다 보니 중전도 여러 번 접했고, 태자비 후보로도 꼽혔던 까닭이다. 하지만 예왕비와는 면식이 없었다. 함께 어울릴 나이도 아니고, 다른 고리도 없었다.
“그게 예왕의 등극에 무슨 도움이 되나? 너랑 올렝카가 감정이 상해서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게 되더라도 그건 집안일일 뿐이잖아.”
시앗 싸움이 벌어지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사적인 내 집안일이다. 예왕비 입장에서는 눈앞에 다가온 황위를 가로챈 내가 밉긴 하겠지만, 내 집안을 어지럽게 만든들 남편과 아들에게 별 도움도 안 될 텐데?
“그게 전부가 아니지. 아직 ‘네’ 과거 평판은 그대로잖아. 여기에다가 ‘자기 집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딱지까지 붙으면, 대원왕 노릇을 제대로 할 거라고 세상에서 인정해주겠어?”
“그건 생각 못 했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가 그렇게 걸리는 건가.”
자기 집안도 제대로 잘 꾸려나가지 못하는 친왕이 대원왕 노릇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다. 평소라면 별문제가 아니지만, 아직 저울추가 아슬아슬한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자칫 컵에서 물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날 미주로 보내려는 속셈이 드러났긴 해도, 예왕은 참 점잖은 모습만 보여주고 갔는데 예왕비는 작정하고 똥을 뿌렸네. 예왕 인간미 보고 약해졌던 마음이 갑자기 강퍅해지는데.”
예왕비는 한껏 돌려가면서 말했지만, 그 요지를 직설적으로 풀면 이랬다고 했다. 예전의 그 망나니 성친왕을 사람 만들어 놓은 건 올렝카고, 상희는 완전히 개조된 인간을 건네받아 거저먹었다고 말이다. 대놓고 이렇게 말한 건 당연히 아니라지만, 요지는 그랬다.
“에이, 너무 화내지 마. 예쁜 애가 열심히 악의는 없는 척 연기하는 거 보니까 귀엽던데.”
여자들 대화 이야기를 듣고서 내가 표정이 변하는 걸 본 상희가 웃음보를 터트렸다. 하긴 예왕비가 상희보다 9살 연상이라고 해봐야 그건 ‘민지영’보다 9살 연상인 거지, ‘김상희’랑 비교하면 거의 70세 가까이 연하다. 귀여워 보일 만도 하다.
“걔보다는 예왕이 더 밉네. 자기는 점잖은 척, 군자답게 너하고 고담준론 주고받고 자상한 아빠인 척 딸 목마 만들어준 이야기 하며 허허거리면서 정작 우리 집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지저분한 공작은 마누라한테 시킨 거잖아. 치사한 새끼.”
상희의 분노는 타당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약간 빗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연 그런 태도가 시켜서 나올 수 있는 걸까?
“예왕비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런 태도를 드러내는 게 상대한테 도발이라는 생각도 못 할 수도 있지. 사람 성격이란 건 알 수 없는 거니.”
그놈의 로망스 소설들이 그런 인식을 강화했을 수도 있겠다. 뭐, 그래도 예왕네 자식들이 멋지고 예쁘게 잘 큰 걸 보니 예왕이 패배를 인정하고 고개 숙이고 얌전하게 살기로 하면 자객 건을 비롯한 원한은 잊고 그냥 지금처럼 살게 해줄까 하는 생각은 든다.
“그래도 괜찮겠어?”
“미우나 고우나, 일단 그놈도 내 자손은 자손이니 말이지. 따지고 보면 예왕이 꾸민 일은 죄다 실패했고, 내가 실제로 뭘 당한 건 없으니까 참으려면 못 참을 것도 없어.”
예왕도 장조의 4대손, 내 후손은 후손이다. 막상 죽인다고 하면 기분이 좀 찝찝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예쁜 아내와 첩, 귀여운 자식들과 함께 나름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모습까지 보았으니, 안 죽여도 된다면 굳이 죽일 건 없지 않은가.
– 12 –
예왕이 가족을 데리고 성친왕저를 찾아 함께 식사와 환담을 즐겼다는 소문은 그날 안으로 도성 전역에 퍼졌다. 도성 백성 누구나 보기만 하면 아는 예왕저 소유 육두마차들이 줄지어 성친왕저를 찾았으니, 소문이 안 날 수가 없는 일이다.
방문이 비밀스러웠던 것도 아니다. 도성 백성 수천 명이 북촌에 있는 예왕저에서 동촌에 있는 성친왕저로 가는 마차 행렬을 보았다. 거기 누가 타고 있을지는 빤한 일이었다.
“어제 일 들으셨습니까? 드디어 예왕 전하께서 대세를 인정하신 모양입니다.”
“다음 태자는 성친왕 전하의 장자분이 되시리라는 예측 말입니까?”
“너무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마시오.”
후계자 문제에 관한 태황의 의중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중신들은 이 문제를 누가 나서서 공론화하느냐를 놓고 아직도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김 대감께서 나서서 상주해 보시오. 아무래도 여기서 가장 연장자시잖소.”
“어허, 그런 건 원래 조정의 우두머리인 재상이 해야 하는 일이요. 공연히 이 늙은이에게 미루지들 마시오.”
비록 임금이 건강이 나쁘다 해도, 아직은 명백히 올바른 정신으로 정사를 돌보고 있는데 후계를 운운하는 행위는 반역으로 취급될 위험이 있다. 비록 금상이 근거도 없이 신하들을 의심하는 암군은 아니라지만, 함부로 꺼내기는 곤란한 화제다.
과거 세조 때는 계유정난에 동참한 정난공신이었던 양정이 세조에게 양위하라고 청했다가 세조의 분노를 사서 처형당한 사례가 있다. 명군이었던 장조도 딱 한 번이기는 해도 넌지시 양위를 거론하여 조정 전체가 바짝 엎드리게 하면서 충성심을 확인한 전례가 있었다.
“선제께서도 태자를 두 번이나 새로 봉하시지 않았습니까. 장래 국본이 되실 분의 자리가 비면 채우는 것이 도리이니, 조금 난감하다 하여 계속 미루기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승상께서 나서셔서 폐하께 태자를 봉하시라 청하시옵소서. 이젠 때가 되었습니다.”
태자가 사망한 지도 오늘로써 정확히 1년이 되었다. 오늘은 태황이 처음 맞이하는 아들의 제삿날이고, 그래서인지 조정에도 나오지 않았다. 쉰다는 통보는 사전에 있었다.
본래 대한의 법도에 따르자면 태황과 황후의 제삿날만 국가적인 휴일로 공무를 쉬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 법도를 들어 태황에게 조정에 나오라고 요구할 간 큰 신하는 없었다.
대신 조정에서는 중신들만 마주 앉아 후계 문제를 놓고 토의하고 있었다. 태자가 죽은 지 이제 꽉 채워서 1년이 되었으니, 망자에 대한 의리는 충분히 지킨 셈이다. 이제는 태자위가 비어있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가 더 심각하게 다가왔다.
“좌승상께서도 태자를 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강기석은 민성윤이 우승상으로 복직할 때 함께 좌승상을 제수받았다. 질문에 대해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강기석이 잠시 눈을 감았다.
“좌승상께서 나서심이 옳겠습니다. 승상 대감이나 우승상 대감 모두 여기서 나서서 말할 처지가 아니니까요.”
형부대신 권정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하기는 내각승상 김세룡은 예왕의 장인이고 우승상 민성윤은 성친왕의 장인이니 두 사람 모두 쉽게 입을 열기 힘든 게 당연했다.
그러나 강기석은 성친왕과 인연을 맺기는 했으되, 이미 20년이나 지난 옛일이다. 더구나 그 끝이 매우 좋지 않았다. 딸을 잃고 나서 강기석이 얼마나 침통한 표정을 지었는지 도성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강기석은 이 일로 더 높은 평판을 얻었다. 망나니 성친왕 때문에 딸을 잃었는데도 사감으로 성친왕을 대하지 않고 늘 공정한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지금 중신들이 다른 이를 젖혀두고 강기석에게 나서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그런 세평 덕이었다.
“말할 처지가 아니기는 뭐가 말할 처지가 아니오? 선비가 된 몸으로써, 해야만 하는 말은 당연히 하는 것이 법도요. 이 사람은 폐하께서 성친왕의 장자이신 이은 공을 태자로 봉하여 이 나라의 장래를 굳건히 하셔야 한다고 어디서든 말할 수 있소.”
뜻밖에 김세룡이 먼저 일어섰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세룡이 예왕이 아니라 성친왕의 아들을 지지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꽤 전부터 돌았지만, 이렇게 조정 중신 전체를 앞에 두고 공언하지는 않았었다.
“경평공께서 더 적절한 후보가 아니십니까?”
웅성거리던 신하들 가운데서 질문이 나오자 김세룡이 고개를 저었다.
“경평공께서 나이도 딱 적절하시고 세간에서 좋은 평을 받는 준재이심은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나라의 중심을 확고하게 잡으려면 무엇보다 적통으로 보위가 승계되어야 하오. 이는 법도이니,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오.”
일개 사가(私家)에서도 대를 잇는 것은 무조건 적자다. 서자가 새로이 가문을 만든다고 해도, 그 가문을 잇는 아들은 그 서자의 적자다. 서자라고 서자가 대를 잇는 법도는 없다.
자기 자리에서 우뚝 선 김세룡이 자리에 앉아 있는 다른 신하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눈길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대들이 하려는 말은 알고 있소. 경평공께 내 피가 섞여 있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냐는 거겠지. 하지만 법도는 지켜야 하는 것이 법도요. 성친왕의 적자께서 어리다고 하나 나이는 먹으면 되는 것이고, 부족한 자질은 가르쳐서 메울 수 있소. 아직 어리시니까 여유가 있소.”
태황의 건강 상태를 보면 약간의 시간은 있었다. 적어도 당장 죽을 것 같은 상태는 이제 벗어났고, 적당히 정양만 하면 한동안은 큰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게 어의들이 내린 진단 내용이었다.
“하지만…저, 소관은 아무래도 불안한 감이 있습니다. 정말 만약의 경우지만, 새 태자께서 친부와 같은 기질을 가지고 계시고, 이를 그대로 드러내신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성친왕이 망나니 기질을 만천하에 드러낸 건 대략 10세부터였다. 그전에야 궁궐 안에서 내관이나 궁녀들을 상대로만 짓궂은 장난질을 쳤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는 궐 밖에 나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던 탓이다.
성친왕의 장자 이은은 지금 7세, 옛날 성친왕이 그렇게 키워졌듯 부모에게 한껏 귀여움을 받으며 개구쟁이로 자라고 있다. 아직은 괜찮다지만, 자칫하면 성친왕처럼 철이 들 무렵에 개망나니가 될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가르쳐야지요. 승상께서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강기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폐하께서 어전회의에 나오시거든 그렇게 진언합시다. 하루빨리 성친왕의 장자를 태자로 봉하시되, 그 생부이신 성친왕 전하는 미주왕으로 봉하여 미주로 내보내시라고 말입니다.”
“왕비 전하는 어쩌고 말입니까?”
“부부는 일심동체라, 마땅히 함께 가셔야지요.”
새 태자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일이 걱정되어서만이 아니다. 태자가 되면 이제 친부모는 멀어지고 태황을 부친으로 여기고 황후를 어머니로 여겨야 한다. 정을 떼려면 멀리 보내서 멀어지게 하는 수밖에 없다.
“여러분 모두 살아있는 대원왕 같은 것을 모시고 싶지는 않으실 겁니다. 과거 태종께서 상왕으로 계시면서 세종께 도움을 주셨던 것과는 달라도 전혀 다르니까요. 성친왕 전하께서 대원왕이라니…저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친왕이 확실하게 개과천선했다고 생각하는 중신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살아있는 대원왕의 존재는 망설여졌다. 쉽게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